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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KT 수장의 불명예 퇴진 악순환 언제까지] 정권 바뀔 때마다 사정기관 ‘칼춤’에 흔들 

 

김유경 기자 neo3@joongang.co.kr
“외압 없었다” 권오준 회장 사의표명 … “사외이사·회추위 개선해 독립성 보장해야”

▎권오준 포스코 회장이 4월 18일 오전 서울 대치동 포스코 본사에서 열린 긴급 이사회를 마친 후 “열정적이고 능력 있는 젊은 사람에게 회사의 경영을 넘기는 게 좋겠다”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 사진:연합뉴스
6개월. 정권이 바뀐 후 포스코 회장들의 평균 재임 기간은 반년에 불과하다. 김대중·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전 대통령의 취임 직후로 따졌을 때다. 한국의 철강산업을 이끄는 포스코 수장들은 대통령이 바뀜과 함께 좌불안석에 시달린다. 과거 정부가 정권에 따라 최고경영자(CEO)를 임명하고, 정치권은 그 자리를 전리품으로 생각하는 구태가 여태껏 이어지고 있어서다.

지난해 연임에 성공하며 장기 집권 가능성을 보였던 권오준 회장도 이 공식을 비켜가지 못했다. 4월 18일 임시이사회에서 자진 사퇴의 뜻을 밝혔다. 권 회장은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받고 지난해 6월부터 검찰 조사를 받는 한편 정치권의 사퇴 압력에 시달렸다. 올 10월 예정된 세계 철강협회(WSA) 회장 취임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KT 황창규 회장 역시 자리가 위태롭다. 황 회장은 4월 17일 불법 정치 후원에 관여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지난해에는 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해 검찰 조사도 받았다. 사법당국의 압력이 나날이 거세지고 있어 황 회장이 한계에 다다른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KT는 2002년 민영화 이후 황 회장을 포함해 총 4명의 수장이 거쳤다. 이 가운데 임기를 다 채우고 물러난 사람은 초대 이용경 전 사장이 유일하다. 포스코와 KT는 정부 산하 공기업으로 출발했으나, 공기업 선진화를 통해 이제는 민간기업으로 탈바꿈했다. 그럼에도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직전 정권과 결탁했다는 등의 온갖 구설수에 시달린다. 결국 수장 사퇴라는 극단적인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분야는 아닌 것 같다. 정도에 따라 경영하는 것이 최선책.” 3월 31일 포스코 창립 50주년 기념 간담회 때만 해도 권 회장의 경영 의지는 강했다. 권 회장은 최순실씨의 입김 덕에 회장에 올랐다는 구설수에 시달렸다. 국정농단 특검 수사에서 청와대가 권 회장을 포스코 수장에 임명해 준 대가로 포스코의 광고계열사 포레카 지분 강탈 시도 등 최순실씨의 이권에 도움을 주거나 묵인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그러나 권 회장은 지난해 검찰 조사에서 무혐의 결론이 나면서 임기를 채울 명분을 확보했다. 특히 지난해 6년 만에 최대 영업이익을 달성하는 한편 스마트팩토리 등 신규 사업의 추진 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권 회장이 필요하다는 여론도 나왔다.

지난해 6년 만에 최대 영업이익에도…


그럼에도 청와대 행사에 포스코가 초대받지 못하는 이른바 ‘권오준 패싱(배제)’ 논란이 일면서 사퇴가 불가피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일었다. 권 회장은 지난해 6월 문재인 대통령의 첫 방미와 11월 인도네시아, 12월 중국 방문 때 경제사절단에서 제외됐다. 지난해 10월과 올 2월에는 자원개발 사업과 최씨 등 전 정권과의 유착 의혹이 다시 일면서 검찰 수사가 시작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특히 이명박 전 대통령을 수사 중인 검찰이 포스코건설 등으로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는 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포스코건설이 2016년 인천 송도사옥을 수의계약을 통해 부영에 헐값 매각한 의혹에 대한 조사도 착수한 것으로도 알려졌다. 권 회장이 청와대의 패싱과 사법당국의 끊임 없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자진 사퇴를 선택한 것 아니냐는 게 산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이로써 포스코는 박태준 초대 회장을 시작으로 8명의 CEO가 모두 불명예 퇴진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코드가 맞지 않거나 전 정권 인사라는 이유로 검찰·국세청 등 사정 당국의 칼끝이 포스코를 향했다. 박 전 회장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정치적 갈등을 빚은 끝에 대통령 선거가 있기 전인 1992년 10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후 황경노 전 회장, 정명식 전 회장이 자리에 올랐으나 친 박태준 인사로 분류돼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 퇴진했다. 이은 김만제 전 회장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났고, 유상부 전 회장은 최규선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의혹 끝에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임했다. 이구택 전 회장 역시 이명박 정부 때인 2009년 초 세무조사 무마 로비를 벌였다는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던 중에 사퇴했다. 이명박 정부 때 취임한 정준양 전 회장은 비자금 의혹을 받으며 박근혜 정부 때 물러났다.

CEO 잔혹사로 치면 KT도 만만치 않다. 한국통신에서 정부가 지분을 매각하며 민영화된 KT의 첫 CEO는 이용경 전 사장이다. 엔지니어 출신인 이 전 사장은 한국통신프리텔(KTF) 사장을 거쳐 2002년 8월부터 2005년 8월까지 KT 사장으로 임기를 채웠다. 연임에는 실패했다. 당시 KT 이사회는 성공적인 민영화를 위해 내부 출신을 중용하자는 여론 속에 역시 남중수 전 사장을 선임했다. 남 전 사장은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인 2007년 주주총회를 앞당겨 연임을 관철시켰다. 그러나 무리한 연임 시도로 잡음이 끊이지 않았고, 결국 2008년 11월 뇌물죄로 구속 수감되며 사임했다.

정치권·관료 놀이터 된 사외이사 자리

첫 외부 출신 CEO 이석채 전 회장은 KT·KTF 합병과 스카이라이프 인수 등 굵직한 사업을 성사시키며 2012년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전 대통령과의 선 긋기에 나서며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 끝에 사퇴했다. 박근혜 정부 때 취임한 삼성전자 출신 황창규 회장은 최순실씨의 국정농단 사건에 연루됐다는 의혹을 계속 받아왔다. 최근에는 ‘불법 정치 후원금 제공’ 의혹으로 수사 대상에 올랐다. 정치권에 자신의 연임을 지원하거나 국정감사 출석 명단에서 제외시켜 달라는 청탁과 함께 후원금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황 회장이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스스로 ‘명분있는 명예로운 퇴진’을 바랐다는 후문도 있지만, 사정 칼날에 휘둘리는 모습이다.

포스코와 KT가 끊임없이 정치 스캔들에 휘말리는 것은 아직 관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정치권과 관료 출신들이 사외이사를 독식하면서 정권 입맛에 맞는 CEO를 앉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포스코·KT로서도 CEO 후보추천위원회가 사외이사로 구성되기 때문에 자신의 연임을 위해 친분이 있거나 유력자를 사외이사로 영입해 방패막이로 활용할 유혹을 받게 된다. 박태준 전 회장도 2002년 5월 “25년 간 재직하며 외압을 단절하느라 병이 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특히 사실상 주인 없는 회사라는 인식이 강하다. 포스코와 KT 모두 국민연금이 대주주다. 지분율은 각각 10.79%, 10.07%다. 나머지 지분 대부분은 외국인 소유다. 때문에 정치인·관료의 벽에 막혀 민간 기업 문화가 뿌리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성주호 경희대 경영학부 교수는 “포스코와 KT는 민간 기업의 외피를 썼지만 여전히 공기업 문화에 젖어 정치적 개입과 CEO 교체가 잦다”며 “경영의 연속성과 미래 성장을 위해 정치 개입을 막고 CEO의 임기를 보장하는 제도적 보완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1431호 (20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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