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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내전 7년 어쩌다 이 지경까지…] ‘아랍의 봄’ 사태로 촉발 후 이슬람 종파·강대국 대리전으로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바샤르 알아사드 독재에 맞선 시위가 도화선…사망자 47만, 등록 난민 511만 명 추산

▎미·영·프 연합군의 4월 14일 공습으로 폐허가 된 시리아 다마스쿠스 외곽의 과학연구센터 건물. / 사진:연합뉴스
미국과 영국, 프랑스가 4월 14일 시리아의 화학무기 시설 3곳을 공습하면서 다시금 시리아가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미국의 폭격은 이른바 ‘외과수술식 정밀 폭격’으로 시리아 내 화학무기 시설 3곳에만 집중했다. 공군이나 미사일 기지를 비롯한 시리아의 주요 군사 시설도 일절 건드리지 않았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 정권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정부 시설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알아사드는 러시아·이란과 손잡고 그들의 도움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이며, 정부군에 맞서는 반군은 미국의 동맹인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고 있다.

사실 시리아 내전은 2011년 3월 ‘아랍의 봄’을 계기로 시작됐다.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의 독재 권력에 맞서 시민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벌인 시위가 도화선이었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작은 낙서 하나가 그 발화점이라는 사실이다. 2011년 3월 시리아 남부도시 데라에서 4명의 어린이가 담벼락에 휘갈긴 ‘이젠 당신 차례야, 닥터’라는 낙서였다. 여기서 ‘닥터’라는 말이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았다. 알아사드는 영국에서 안과 전문의로 수련을 받았기 때문이다. 당시 중동에는 ‘아랍의 봄’이 한창이었다. 시리아 내전은 민중봉기가 서구인의 전망이나 예상와 달리 얼마나 다양한 모습으로 번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사실 아랍의 봄은 너무도 다양한 형태의 결과를 빚어내고 있다.

미·영·프 연합군, 시라아 화학무기 시설 공습


▎이슬람국가(IS)의 시리아 내 근거지 라카에서 탈출한 난민 어린이가 지난해 7월 11일 북부 아인이사의 임시 난민 캠프에서 빵을 나르고 있다.
아랍 민중이 독재자에 반발하며 사위를 벌인 아랍의 봄은 2010년 말 북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처음 시작됐다. 튀니지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1987년 11월 7일부터 튀니지의 5~9대 대통령을 지내며 23년 간 장기 집권하던 제인 엘아비디네벤알리(82)가 아랍의 봄으로 권력을 내놓은 첫 독재자였다. 2010년 말 당국의 단속에 절망한 노점상 청년이 스스로 분신한 사건이 시위 사태에 불을 질렀다. 높은 실업률에 시달리며 절망한 청년층과 고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면서 생활이 어려워진 서민층이 대대적으로 시위에 참가하거나 동조했다. 2009년 9대 대통령 선거에서 5선을 이룰 당시 얻었던 89.62%의 높은 지지율은 허상임이 드러났다. 민중은 지도자가 제대로 국정을 운용하지 못해 살기가 힘들어지면 얼마든지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아니면 지지율이 정치적인 압력이나 홍보를 앞세운 대중조작의 결과일 수도 있다. 지지율은 국민의 마음을 정확하게 반영한 게 아니든지 언제라도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대대적인 항의 시위가 그치지 않고 이어지자 벤알리는 2011년 1월 13일 차기 대선에 나서지 않고 임기만 마치면 권좌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언했다. 대리인을 앞세워 수렴청정할 것이 뻔한 상황을 국민이 모를 리가 없었다. 이에 따라 시위 사태가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벤알리는 다음 날 한걸음 더 물러나 조기 총선 실시로 국민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하지만 국민은 속지 않았다. 그러자 벤알리는 비행기에 올랐다. 프랑스로 가려고 했지만 받아주지 않지 여기저기 떠돌다 1월 15일 자신을 받아주겠다는 사우디아라비아에 망명했다. 23년 독재는 한순간에 사라졌다.

튀니지는 이로써 독립운동가들이 지속해온 독재의 고리를 끊었다. 튀니지는 1956년 3월 20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다. 처음엔 튀지니 왕국으로 군주제 국가로 출발했지만 이듬해 독립운동가 출신의 하비브 부르기바(1903~2003년)가 군주제를 축출하고 공화국을 세웠다. 부르기바는 1957년부터 1987년까지 1~4대 대통령을 지냈다. 부르기바는 벤알리를 후계자로 점찍고 내무장관·정보국장에 이어 총리까지 시키면서 권력승계 작업을 이어갔다. 하지만 권력욕을 참지 못한 벤알리는 쿠데타로 부르기바롤 물아내고 자신이 권력을 차지했다. 아버지를 몰아내고 황제에 오른 수양제 격의 인물이었다. 독립국가나 군주를 몰아내고 들어선 신생 공화국은 독립운동가나 공화국 설립 세력의 전리품이 됐다. 부르기바도 벤알리도 튀니지를 개인 재산처럼 다뤘다. 막대한 재원은 개인 차지가 됐다. 그는 국민의 것이어야 할 국부를 추종자들에게 나눠주고 대신 충성을 다짐받으며 권력을 유지했다. 장원제나 다름없는 중세적인 권력이 20세기 지중해 연안에 들어선 것이다. 튀니지 혁명은 이런 독재자를 국민이 시위로 몰아냈다는 데서 의미가 크다. 튀니지는 이후 협의 기구를 발족해 대화와 협상, 타협과 협치를 통해 정상적인 민주국가를 키워나가고 있다.

이 여파는 아랍 세계로 확산했다. 1981년부터 철권통치를 계속하던 이집트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90, 재임 1981~2011년, 7~11대) 대통령이 뒤를 이었다. 시위 사태가 벌어지자 무바라크는 군을 출동시켜 진압에 나섰다. 진압군은 전차까지 동원해 시내에 진입하고 먼 곳에서 저격수가 시위 주동자를 사살하는 등 유혈 진압에 나섰다. 하지만 휴대전화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이용하는 민주화 시위대를 감당하지 못했다. 결국 무바라크는 2011년 2월 11일 대통령에서 물러나 시나이 반도의 남단에 있는 휴양도시 샤름엘셰이흐의 리조트로 은거했다. 하지만 무바라크는 4월 13일 아들 가말과 함께 부정부패와 권력남용 혐의로 구금돼 재판을 받고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 무바라크는 1975년부터 부통령으로 지내다 1981년 10월 6일 전임 안와르 사다트(1918~1981년, 재임 1970~1981년, 5~6대 대통령) 대통령이 군사 퍼레이드 도중 소련의 사주를 받은 이슬람 극단주의자 군인들의 공격으로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 무바라크는 그 뒤 30년 간 장기 집권을 했지만 결국 국민에 의해 밀려났다. 이집트 혁명은 1953년 이후 이어진 군부 독재의 맥을 끊었다는 의미가 있다.

사실 사다트는 철권 정치를 완화하고 다양한 개혁정책을 폈으며 중동 평화를 위해 노력한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다. 하지만 이집트 특유의 서민 빵 배급제 폐지 시도와 1978년 캠프데이비드 평화협정에 이어 1979년 아랍 주요 국가로는 최초로 이스라엘과의 수교를 하면서 일부 이슬람 과격파의 불만을 샀다.

사다트는 전임 가멜 압델 나세르(1918~1970년, 재임 1956~1970년 2~4대) 대통령과 1953년 자유장교단을 이끌고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무하마드 알리 왕조의 마지막 국왕이던 파루크 1세(1920~1965년, 재위 1936~1952년)를 쫓아내고 공화국을 세웠다. 이들은 무하마드 나기브(1901~1984년, 재임 195~1954년 1대)를 초대 대통령으로 내세웠으나 마음에 들지 않자 갈아치우고 나세르가 직접 통치했다. 나기브는 이집트에서 거의 200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등장한 이집트인 국가원수로 기록된다.

아랍의 봄 그 후는 여전히 혼란


기원전 3000년부터 고대문명을 이룬 이집트는 중간에 리비아인이나 수단계 누비아인 파라오의 지배를 받기도 했지만 이집트인 왕조를 유지하다 기원전 525년 페르시아 제국 아키메네스 왕조의 캄비세스 2세에 점령됐다. 그 뒤 이집트에선 일시적으로 이집트인 왕조가 부활했다. 그러나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를 몰아내고 점령했다. 이후 알렉산드로스의 부하 프톨레마이오스가 헬레니즘 파라오 왕조를 세워 지배하다 기원전 30년 클레오파트라 7세와 로마 카이사르의 아들인 프톨레마이오스 15세가 세상을 떠나면서 로마의 속주가 됐다. 그 뒤 비잔티움 제국을 거쳐 7세기 이후 여러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다가 16세기 초 오스만 튀르크의 영토가 됐다.

무하마드 알리 왕조는 알바니아 출신으로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이집트 태수를 지내다 슬그머니 준독립적인 왕조로 바꾼 무하마드 알리(1769~1849년, 재위 1805~1849년)와 그의 후손들이 지배한 왕조다. 이런 왕조를 몰아내고 이집트인이 지배하는 공화국을 개국했으니 자부심이 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세습 군주를 몰아내고 자신들이 왕조나 다름없는 군부독재 체제를 세운 셈이다.1970년 나세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사다트가 후임을 맡았다. 사다트가 세상을 떠나면서 뒤를 이은 무바라크가 국민에게 쫓겨나면서 이집트에 새로운 역사가 도래할 줄 알았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게 간단히 굴러가지 않았다. 2012년 치러진 선거에서 아랍권 최대 이슬람 단체인 무슬림형제단 출신의 이슬람주의자 무함마드 무르시(67, 재임 2012년 6월 30일~2013년 7월 3일, 12대)가 대통령에 올랐지만 2013년 7월 군부 쿠데타로 밀려났다. 그 뒤 군부 지도자인 압둘팟타흐 시시(64, 2014년 6월 8일~, 13대 현직)이 13대 대통령을 맡고 있다. 이집트 민중이 아랍의 봄으로 만든 민주정권이 군부에 의해 하이재킹 당한 셈이다.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의 뒤를 이어 밀려난 리비아의 독재자 무아마르 가다피(1942~2011년, 1969~2011년)가 뒤를 이었다. 가다피는 1969년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을 무너뜨리고 독재 정권을 열었다. 이집트 자유장교단의 쿠데타를 보고 어려서 감명을 받았던 가다피가 자신도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것이다. 그는 의회도 헌법도 모두 폐지하고 ‘혁명 수호자’라는 이름으로 독특한 독재 정치를 했다. 가다피는 민주화 시위대에 밀려 고향 시르테로 피신했지만 주민들에게 체포돼 연행되다가 2011년 10월 20일 한 청년의 총격을 받고 사살됐다. 이후 리비아는 2012년부터 트리폴리 중심의 서부 트리폴리타니아와 벵가지 중심의 서부 카레나이카로 나뉘어 치열한 내전을 벌이고 있어 나라 전체가 무법천지다. 원래 리비아는 트리폴리타니아와 카레나이카, 그리고 서남부의 페잔이 합쳐져 1911년 이탈리아령 리비아로 한 지역이 됐으며 이 상태로 1951년 리비아 연합왕국으로 독립했다. 가다피를 축출한 뒤 민주시대가 열릴 줄 알았지만 해묵은 지역주의에 알카에다와 이슬람국가(IS) 등 다양한 테러 세력이 진출해 혼란이 극심한 상태다.

정부군, 민주세력, 반군·터키군, SI 각축전

하지만 인구 640만 명의 리비아 내전은 인구 1700만 명의 시리아 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인구도 인구지만 잔혹함은 더하다. 2011년 3월 15일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에 반대하는 시위가 무장 투쟁으로 번진 데는 이유가 많다. 우선 바샤르는 세습 독재자다. 2000년 7월 17일 부친인 하페즈 알아사드(1930~2000년, 재임 1971~2000년, 12~16대) 대통령이 세상을 떠나자 권력을 물려받았다. 바샤르는 원래 안과 의사 출신으로 유약 체질로 보였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지독한 독재자였다. 2011년 3월 15일을 시작으로 치는 시리아 내전은 현재 7년 1개월을 넘었다. 그동안 사망자가 시리아 비정부기구인 인권감시단(SOHR) 추정으로 35만~49만 명, 시리아 비정부기구이자 싱크탱크인 시리아 정책과 연구 센터(SCPR) 추산으로는 47만 명에 이른다.

난민 통계는 더욱 참혹하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시리아에서 집을 잃은 사람은 2015년 3월 기준으로 760만 명에 이르며, 2017년 7월 기준으로 난민생활을 하는 등록 난민은 511만 명을 넘는다.

2018년 4월 기준 외신을 종합하면 알아사드의 정부군이 시리아 영토의 55%를, 쿠르드족을 주축으로 다양한 민족과 종교공동체가 결합한 시리아 민주세력(SDF)이 26.6%를, 반군과 터키군이 12.3%를, IS가 6.1%를 각각 통제하거나 점령하고 있다. 어느 한 쪽이 승리를 거두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바샤르 알아사드는 7년 내전에도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21세기 최대의 비극

문제는 내전이 하나의 전쟁이 아니라는 점이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여러 전쟁이 겹쳐 있다. 우선 이슬람 종파 전쟁이다. 알아사드는 시리아에서 소수파에 속하는 시아파 계열의 알라위트에 속한다. 알아사드는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과 사실상 동맹 관계이며 이웃 레바논 헤즈볼라의 지원도 받는다. 국경을 맞댄 이라크의 시아파와도 은근히 손을 잡고 있다. 이란과 앙숙인 수니파 종주국 사우디아라비아는 인구 다수(약 74%)인 이슬람 수니파가 주축인 반군을 지원한다.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 사우디와 이란의 대리전이다. 알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면 그동안 정부의 보호를 받아왔던 소수(약 10%) 기독교도도 종교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다.

여기에 러시아는 시리아에 있는 지중해 유일의 자국 해군과 공군 기지를 보호하기 위해 알아사드를 노골적으로 지원한다. 시리아 내전은 국제적으로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 서방과 러시아의 대리전 성격도 있다. 종교와 종파, 국제사회가 뒤엉킨 채 비극적인 시리아 내전은 해결 기미를 찾지 못하고 한없이 진창으로 빠지고 있다. 시리아 내전은 이미 21세기 최대의 비극이다. 얼마나 비극이 더 커져야 국제사회가 해결을 위해 팔을 걷고 나올까.

1431호 (2018.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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