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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CEO를 위한 생태학 산책’(24) | 위계서열의 명과 암] 조직 혁신이 기술 혁신보다 중요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조직의 뜨거운 맛’ 만드는 서열 시스템은 곤란…야생의 침팬지 무리도 민주적 운영

▎사진:© gettyimagesbank
요즘 김과장에게 출근 시간은 제 발로 지옥을 가는 시간이다. ‘오늘 하루를 또 어떻게 보내지?’ 하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차장·팀장·이사는 생각나는 대로 와서 하나씩 던져주고 간다. 명확한 지침도 없이 “한 번 해봐!”가 전부다. 뭐라도 물으면 돌아오는 답변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일단 한 번 알아보고 얘기하자고!” 끙끙거리면서 어찌어찌 해서 가면 항상 듣는 말이 있다. “뭐 더 좋은 거 없어?” 간신히 팀장 입맛에 맞췄다 싶어 이사에게 갖고 가면 아득한 절벽으로 떨어지는 말이 들려온다. “내가 말한 건 이게 아닌데?”

가끔은 사장까지 올라간 결재서류가 이런 식으로 다시 김 과장 책상에 떨어진다. 힘이 쭉 빠진다. 별 수 있겠는가. 처음부터 다시 해야지. 그 사이 다른 걸 지시한 팀장은 “그건 또 어떻게 됐느냐?”고 채근한다. 그리스 신화의 시시포스가 따로 없다. 보고서, 결재서류라는 바위를 날마다 산꼭대기까지 올려 놓지만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계속 그걸 올려 놓아야 하는 조직 속의 시시포스! 원래 조직이라는 게 이런 걸까? 서로 모여 이러저러하게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면 한 번에 끝낼 수 있을 텐데, 도대체 왜 이래야 하는 지 알 수 없다.

생각나는 대로 제각각 지시하는 상사들

요즘 어느 조직이든 복잡하고도 견고한 서열 체계 때문에 힘들어 하는 곳이 많다. 조직은 서열을 근간으로 하고, 서열이 없는 조직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왜 이 서열이 문제일까? 서열은 일정한 기준에 따른 순서를 말한다. ‘위계(位階)‘가 붙은 위계서열은 지위나 신분에 따른 순서다. 우리가 날마다 출근해서 경험하는 서열이 바로 위계서열이다. 서열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자연의 생태계에도 서열이 있는 걸 보면 분명 오래된 것이다. 지금도 유기적으로 기능하는 걸 보면 진화적 이익이 있다는 뜻이고, 진화적 이익이 있다는 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말이다. 생명의 진화는 왜 이런 숨 막히는 서열을 만들어냈을까?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서열은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북극 근처에 사는 코끼리바다표범은 평소에는 흩어져 살다, 번식철이 되면 무리를 짓는다. 보통 수컷 우두머리 한 마리가 수십 마리, 많게는 거의 100마리에 가까운 암컷 집단을 이끈다. 한 수컷이 이렇게 많은 암컷을 독점하니 다른 수컷이 가만 있을 수 없다. 생명이란 모름지기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에 전하는 임무가 우선인데 어떻게 가만 있을 수 있겠는가. 아직 자신의 무리를 갖지 못한 수컷들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우두머리 수컷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한두 마리가 아니다. 마치 줄을 선 것처럼 덤비니 우두머리 수컷은 눈코 뜰 새가 없다. 번식철이 끝나면 무리가 사라지니 서열도 없어진다.

야생마와 얼룩말의 무리는 지속적이다. 우두머리 수컷의 자리는 새로운 도전자에게 밀려날 때까지 유지된다. 사자 무리도 마찬가지다. 개미와 벌은 힘이 아니라 스스로 왕국을 시작하거나 여왕이 죽을 경우 우연하게 차례가 된 개체가 여왕의 자리에 오르지만, 서열 체계는 비슷하다. 여왕과 개체, 두 단계의 서열이 존재한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서열의 다른 형태는 침팬지 무리에서 볼 수 있다. 보통 40~60마리 정도로 구성된 무리는 코끼리바다표범과 달리 하나의 우두머리 외에 여러 유력한 구성원, 그러니까 강자들이 포진해 있다. 우두머리는 이 중에서 나오는데, 근육에서 나오는 힘이 중요하고, 힘으로 그 자리에 오를 수는 있지만 힘만 가져서는 오래갈 수 없다. 의외로 이들 집단에서는 ‘전략적 동맹’을 통한 권력 획득이 일반적이다. 동물학자 프란스 드 발의 책 [침팬지 정치학]에 나오는 침팬지들은 미국의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만큼은 아니지만 연합하고 분열하며, 갈등하고 마찰한다. 협력과 배신 또한 리얼하다. 정치와 전략은 인간 세상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이들에게도 있다.

이들에게 서열은 중요하다. 서열은 권력을 가진 순서이며 ‘대권’을 차지하기 위한 예비 후보 리스트이지만 집단의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여러 구성원들이 모여 사는 집단에서는 갈등과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그러니까 날이면 날마다 누가 더 힘이 센지를 가리는 싸움을 하면 어떻게 될까? 집단은 매일 아수라장으로 변하고 모든 구성원이 여기에 에너지를 쏟게 될 터이니 집단의 힘은 자연스럽게 약해질 것이다. 반면 서열이 명확하면 이런 소모적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 싸워봤자 질 게 뻔한데 왜 싸우겠는가.

집단의 생존력 높이는 늑대 무리의 서열


▎늑대 무리는 서열 체계가 엄격하지만 사냥에서 실력 발휘를 못하면 높은 서열에 오를 수 없다. / 사진:© gettyimagesbank
그래서 얼마나 힘을 가졌.는지를 알려주는 서열이 필요하다. 높은 서열이란 무엇인가? 낮은 서열이 함부로 덤볐다가는 큰코 다칠 수 있다는 뜻이다. 마치 사원이 전무에게 덤벼드는 게 죽음으로 가는 지름길인 것처럼 말이다(인간 사회는 이걸 확실하게 하기 위해 계급장을 달고 책상에 명패를 놓는다). 한마디로 집단을 안정시키는 데 서열만 한 게 없다.

늑대 무리는 이런 서열 체계가 가장 엄격한 곳이다. 넘버1에서부터 넘버2, 넘버3 같은 방식으로 모든 구성원의 서열이 매겨진다. 서열을 정하는 기준은 역시 힘이지만, 이 힘은 무리 내의 대결에서만이 아니라 사냥 실력으로도 발휘되어야 한다. 내부에서의 싸움은 잘하는데 사냥에서 실력 발휘를 못하면 높은 서열에 오를 수 없다.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능력이어야 서열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다. 침팬지와 늑대 무리에서의 서열은 이렇듯 외견상으로 다를지 몰라도 기본 목적은 같다. 집단의 생존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다.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마지막 서열 형태는 생태계 차원에서 볼 수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쫓고 쫓기는 과정인 먹이사슬이 그것이다. 앞의 두 서열과 다른 건, 앞의 두 서열에서는 같은 종끼리 대결하고, 대결이 승패로 끝나지만, 먹이사슬에서는 한 쪽의 죽음으로 끝난다는 것이다. 앞의 두 유형에서는 서열을 획득할 때 상대를 죽이는 일이 많지 않다. 승자와 패자를 정하는 싸움이지 죽고 죽이는 싸움이 아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유형에서 패자는 도전을 포기하고 도망치는 것으로, 두 번째 유형에서는 항복을 표시하는 것으로 대결을 끝낸다. 그러나 먹이사슬에 나타나는 서열은 죽고 죽이는 것으로 끝난다. 상대를 죽이고 그 몸을 자신이 살아가는 에너지로 소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어떨까? 1만2000여 년 전 농경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오랜 수렵채집생활 동안에는 대체로 두 번째 서열 형태를 가졌던 것 같다. 지금도 수렵채집으로 살아가고 있는 세계 곳곳의 전통부족들을 보면, 대륙 자체가 다른데도 다들 비슷한 서열 시스템을 갖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혼자서 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일을 다같이 하면 더 나은 생존력을 확보할 수 있었기에 집단을 형성해 협력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갈등과 마찰을 줄이기 위해 서열 시스템을 가동했을 것이다. 지배하고 종속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나은 협력을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서열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농경과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무엇보다 공동체 규모가 수백 명 단위에서 수천 명 이상으로 커지면서 인간 사회는 세 번째 서열에 가까운 사회로 변해갔다. 무엇보다 전에 없던 무기와 말(馬) 같은 전쟁 수단을 잘만 활용하면 훨씬 더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안 특정 부족들이 이 체제 확산의 일등공신이었다. 싸움만 잘 하면 고생스럽게 땅을 갈 필요도 없고, 양을 치지 않아도 되며 이리저리 옮겨 다닐 일 없이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들은 기꺼이 전사가 되었고 무자비하게 적을 죽였다. 자연에서는 대개 같은 종을 죽이지 않고 승부만 가리지만 그들은 같은 종인 인간을 서로 다른 종처럼 죽고 죽였다.

수평 사회를 수직 체계로 만든 고대 문명

다른 게 하나 더 있었다. 자연의 동물들이 상대의 몸을 소화시켜 에너지를 취하는 것과 달리, 인간은 상대를 죽인 후 그 몸이 아니라 그의 소유물과 노동력, 그러니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빼앗았다(식인종도 있긴 했지만 극히 소수였다). 싸울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죽였고 다른 사람들은 끌고 와 노예로 삼았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과 사람, 부족과 부족을 수직체계화했다. 수평에 가깝던 사회 체계를 수직으로 바꾸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생겨난 최초의 고대문명들이 하나 같이 각종 신무기와 전문 군대를 통해 노예를 부리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게 이런 이유에서다.

당연히 신분제는 필수였다. 다른 부족들을 정복(약탈)해서 먹고 사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었기에 신분을 토대로 한 계급사회를 만들어 ‘건전하게’ 내부를 수탈했다. 피지배계급을 생산에 종사하게 해서, 평민들에게서는 세금을 거두고, 노예는 아예 물건처럼 소유했다(여성도 재산이었다). 기원전 2250년쯤 최초의 제국인 아카드를 세운 사르곤 대제는 100만 명의 백성에게서 세금을 걷어 5400여 명의 전문 군대를 유지했다. 뒤이어 나타난 앗시리아·바빌론도 그랬고, 인도와 중국의 왕조들도 마찬가지였다.

묘한 건 이런 국가들은 출현도 비슷했지만 종말 역시 비슷했다는 점이다. 강력하게 나타날 때만큼 허무하게 무너졌다. 지배-종속에 기반한 시스템의 역기능이 순기능만큼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구성원 각자가 자기 능력을 공동체 전체의 생존력을 키우는 쪽으로 집중할 때 서열에 기반한 시스템은 안정적이고 효과적이다. 전체 파이가 커질수록 구성원들이 가질 수 있는 파이도 덩달아 커지기에 모두들 성장의 과실을 충분하게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체제가 안정되면서 새로운 파이가 줄어들면 구성원들은 내부에 집중, 전체 파이를 키우기보다 자신의 이익과 부 축적을 우선한다. 새로운 성장을 만드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제로섬 게임을 시작한다. 소모적 분란과 마찰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의 나라는 그야말로 귀족이자 특권층인 ‘그들만의 나라’여서 외부 침략이 있을 경우 하부구조는 별 힘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균열이 생기면 급격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이 시스템은 수천년 간 지속됐다. 다소 변형이 있긴 했지만 기본은 변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렇게 지배해도 지나치지만 않으면 별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씩 유능한 왕이 나타나 선정을 베풀면 상황은 호전됐고, 한숨을 돌린 지배층은 다시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역사에 나타나는 수많은 국가의 흥망과 성쇠가 놀랍도록 비슷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이 오랜 시스템에 변화의 조짐이 일고 있다. 구글을 비롯한 세계적인 기업들이 새로운 조직을 부단하게 실험하고 있다. 조직의 토대를 바꾼다는 건 어렵고 힘든 일인데 왜 이들은 쉬운 길 대신 어려운 길을 가고 있을까? 예전과 달리 비선형적이고 복잡계에 가깝게 변해가는 세상을 현재의 조직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생명의 제1 법칙은 환경에 맞는 적응력을 가지는 것이니 여기에 맞는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걸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서열이 필요하지만 생산적이어야 효과

이전 회에서 언급했지만 야생의 침팬지 무리에서는 독재가 많지 않다. 그들이 민주주의자여서 그럴까?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환경이라 모두의 협력이 필수적인데, 독재와 경직된 서열체계는 구성원을 수동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강제적인 참여가 아니라 모두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수적이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느 정도 민주적인 게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수없이 자신들의 생존모델을 실험했을 것인데 가장 효과적인 게 이것이었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문화에는 장유유서를 바탕으로 한 깊은 서열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더구나 전체 파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일사불란이라는 순기능으로 발현되었던 서열 시스템이 이제는 ‘조직의 뜨거운 맛’을 만들어내는 진원지가 되고 있다. 숨차게 달려야 할 조직을 숨막히는 곳으로 만들고 있다. 나이는 분명 존중해야 하지만 ‘나이가 벼슬’일 수는 없다. 서열은 필요하지만 생산적이어야 한다. 무엇보다 시키면 군말 없이 해야 좋다는 일방적인 문화가 문제다. 되물을 수 없고, 다른 생각을 말하면 눈엣가시가 되거나 눈 밖에 나는 문화를 고치지 않고는 이제 성장은 요원하다. 생각의 교류가 생산적인 결과로 이어지는 새로운 조직이 필요하다. 풍성한 수확을 얻으려면 좋은 품종의 씨앗을 뿌리는 것보다 토질을 개선하는 게 우선이다. 척박한 땅에서는 척박한 결과만 나온다. 기술 혁신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조직 혁신인데 다들 기술에만 눈을 두고 있다. 서열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 사회와 조직이 어떻게 되는지 말해주는 역사적 사례는 차고 넘친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436호 (2018.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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