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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회담 앞둔 남·북·미 치열한 수싸움] 문재인보다 트럼프가 먼저 평양 가나?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한국·미국·중국 모두 평양행 티켓 노려…9월 유엔 총회에서 종전선언 가능성도

▎올들어 문재인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잇따라 만난 김정은 위원장이 평양에서 누굴 가장 먼저 만날지 관심이 모아진다.
지난 봄 한반도를 요동치게 했던 정상회담의 충격파가 근육질을 더욱 불려 돌아왔다. 4월과 5월 두 차례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던 파노라마가 ‘시즌 2’로 단장해 가을 개봉을 앞두게 된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을 디딤돌 삼아 북·미가 만났던 순차적 패턴이 이번에는 달라질 기세다. 남·북한과 북·미 관계는 물론 한반도와 주변 정세를 변수 삼아 언제, 어떤 형태로 정상회담 이벤트를 진행할지를 놓고 각 정상들이 치열한 수싸움에 들어간 형국이다.

가장 주목되는 건 김정은 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재회다. 판문점에서 8월 중순 북한과 미국이 40여 일 만에 비공개 접촉을 재개했고,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의 네 번째 평양 방문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2차 북·미 정상회담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8월 초 김정은 위원장에게 보낸 친서에서 “곧 만나게 되기를 바란다”며 추가 정상회담을 사실상 예고했다. 첫 정상회담이 3월 평양을 특사 방문했던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일행의 ‘김정은 대미 메시지’에 힘입은 바 크다면, 이번에는 북·미 정상 간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추진되는 모양새다.

북한과 미국이 주고받을 협상 리스트까지 구체적으로 거론된다. 워싱턴과 서울의 외교가에서는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폐기와 해외 반출, 그리고 핵무기 리스트 제출에 나서고 미국은 종전선언을 이행하는 쪽으로 의견 접근이 이뤄지고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폼페이오 장관의 방북 보따리에는 이 같은 내용을 포함한 협상안과 함께 북·미 정상회담 개최와 남·북한과 미국 종전선언 카드가 담길 것으로 예상된다.

북·미 간 구체적 협상 리스트 거론


▎사진:연합뉴스
사실 북한과 미국은 싱가포르 정상회담에도 관계 개선을 위한 속도를 내지 못해왔다. 합의 이행을 위해 서로 소통하고 박차를 가해 나가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웠던 게 현실이다. 이는 정상회담 테이블에서 김정은과 트럼프가 의기투합했던 장면과 이후 두 정상의 상대방에 대한 우호적 제스처에 비춰볼 때 예상 밖이라고 할 수 있다. 6월 12일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서 역사적인 첫 정상회담을 했던 두 사람은 4개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하며 찰떡궁합을 과시한 바 있다. 당초 예견됐던 북핵 폐기를 위한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가 성명에서 빠지면서 국내외에서 비판에 직면한 트럼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김정은에 대해 “똑똑하고, 훌륭한 협상가”(7월 14일자 데일리 메일 인터뷰)라는 찬사를 보내는 등 신뢰를 나타냈고, ‘완전한 비핵화’란 합의 내용을 준수할 것이란 기대를 접지 않고 있다. 김정은 역시 공동성명 제4항에 담긴 한국전쟁 중 북한 지역에서 사망·실종된 미군 유해를 송환하는 등 유화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하지만 워싱턴의 대북정책 담당 관리들은 김정은이 북핵 폐기를 의미하는 ‘완전한 비핵화’ 실행에 미온적이라며 대북 압박의 필요성까지 제기해왔다. 핵과 미사일 포기 같은 본질적인 문제는 도외시한 채 동창리 미사일 기지 해체 같은 변죽만 울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평양 측은 미군 유해 송환 등 공동성명 이행에 성의를 보였는데도 미국은 북핵 리스트나 비핵화 시간표 같은 일방적인 요구만 계속하고 있다면서 불만을 표시해왔다. 정상회담을 앞두고 풍계리 핵 실험장을 폭파 방식으로 폐쇄하고, 3명의 한국계 미국인을 석방하는 등 유화적 분위기 조성에 나선 북한으로서는 미국이 행동에 나설 차례라는 입장이 강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정상회담 이후에도 대북제재의 연장 조치 등을 통해 북한을 계속 압박하자 평양발 대미 비난의 목소리는 커져 갔다.

이런 분위기는 폼페이오 국무장관의 7월 초 방북 때 그대로 드러났다. 김정은 위원장은 폼페이오를 접견하는 대신 평양을 떠나 백두산 인근 감자 생산지를 찾았다. 외교가에선 “김정은이 폼페이오 대신 포테이토(감자)를 선택했다”는 말이 회자되며 북·미 간의 이상기류를 알렸다.

이 같은 상황에서 시진핑 변수까지 가세했다. 북한이 9월 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평양 방문을 초청했고, 이를 위해 중국 관광객의 평양 방문 비자를 제한하는 등의 조치에 들어갔다는 관측이 나온 것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과의 정상회담이나 관계 개선 행보를 보이면서도 중국과 긴밀한 협의 채널 유지와 공감대 형성에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5월 초 시진핑 주석과 만난 건 대표적 사례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마친 후에도 베이징으로 곧바로 달려가 다시 북·중 정상회담을 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위 관료들은 이럴 때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김정은이 시진핑을 만나기만 하면 비핵화 문제나 북한 체제의 개혁·개방, 북·미 관계 진전 등의 사안을 두고 생각이 달라지는 듯한 모습을 보인 때문이다. 우리 외교 당국자는 “미국으로선 기껏 김정은 위원장을 설득시켜 놓으면 시진핑이 불러 딴 생각을 하게 만드는 형국을 달갑게 여기지 않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 ‘한반도 운전자론’ 적극 나서


북·미 관계의 흐름을 관망하던 문재인 대통령이 적극적 입장을 취하면서 ‘한반도 운전자론’에 힘을 싣고 있는 대목도 눈길을 끈다. 8·15 광복절 경축사에는 남·북한과 북·미 관계와 관련한 문 대통령의 인식과 향후 청사진이 드러난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북·미 정상회담을 언급한 후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 이행과 이에 상응하는 미국의 포괄적 조치가 신속하게 추진되길 바란다”고 촉구했다. 미진한 상태로 보여지던 북·미 정상회담 이후 상황과 관련해 이례적으로 ‘속도를 내달라’는 톤의 주문을 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남·북 간 신뢰구축을 강조하는 수준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북·미 간의 비핵화 대화를 촉진하는 주도적인 노력도 함께 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경축사에 문 대통령이 비교적 높은 수위의 발언을 쏟아낸 건 이틀 전 판문점에서 이뤄진 남·북 고위급 회담 합의에 힘입은 때문으로 보인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이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은 네 번째 고위급 회담에서 “남·북 정상회담 9월 안에 평양에서 가지기로 합의했다”는 공동보도문을 냈다. 4·27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가을에 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기로 했다고 합의한 사항을 ‘9월 개최’로 폭을 좀 더 좁힌 것이다. 회담 날짜를 확정할 것으로 기대했던 것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청와대와 정부 당국에선 “9월이란 기간을 명시한 건 나름 의미 있는 합의”라는 평가도 나왔다. 후속 회담이나 물밑 채널을 통해 평양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구체적 일정이나 경호·의전 등 실무 문제를 논의해 나가면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9월을 포함한 올 가을 평양의 사정이 녹록하지 않다는 점이다. 북한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일인 9·9절을 성대하게 치르려 준비해온 데다 추석 명절 연휴까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빡빡한 일정에도 트럼프 미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문재인 대통령이 모두 평양행 티켓을 거머쥔 채 택일을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여기에 가세하는 분위기다.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이 가장 다급해 보인다. 그때까지 비핵화 등 북한 문제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서 미국 내 지지 여론을 이끌어 내야 한다는 점에서 시간표 마련에 압박감을 느낄 공산이 크다. 뉴욕타임스(NYT)가 8월 13일 보도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11월 중간 선거를 앞두고 미국 내 부정적 여론에도 종전선언이라는 깜짝쇼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한 것도 이런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트럼프 대통령은 종전선언에 대해 긍정적 입장이다. 싱가포르 정상회담 때 이미 “종전선언은 좋은 것”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북한이 최근 들어 한국과 미국 정부에 대해 조속한 종전선언 이행을 촉구하고 있는 것도 트럼프에겐 호재다. 폼페이오 장관이 추가 방북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과 이 문제를 타결하게 된다면 9월 유엔 총회에서 남·북한과 미국이 종전선언을 하게 될 것이란 전망도 제기된다. 싱가포르 센토사 섬에 김정은을 불러들여 세기의 이목이 집중된 최고의 쇼를 펼친 트럼프가 유엔을 또 다른 흥행 무대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9월 18일 개막하는 올 유엔 총회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각국 정상이 참가하는 유엔 고위급 일반 토의 첫날인 25일 연설을 잡아 놓았고 문재인 대통령이 27일,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29일 일정을 예정하고 있다. 물론 이 스케줄은 해당 국가의 요청이나 사정에 따라 얼마든지 변경이 가능하다.

김정은 위원장, 평양이냐 유엔이냐

유엔에서의 종전선언은 극적인 상황을 연출하는 데 최적이지만 김정은 위원장으로서는 부담이 따른다. 국제사회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유엔에서 첫 다자외교 무대에 선다는 건 모험일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김정은이 자신의 홈 그라운드인 평양을 선호할 것이란 관측에도 무게가 실린다. 이럴 경우 정상외교의 일정표 짜기와 교통정리가 좀 복잡해질 수 있다. 손기웅 전 통일연구원장은 “트럼프로서는 평양 방문 카드를 문재인 대통령이나 시진핑 주석에게 빼앗기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첫 북·미 정상회담 장소로 판문점을 유력하게 고려했지만 이미 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회담한 자리라는 점에서 탈락시켰던 상황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유엔 총회에서의 종전선언 추진과 평양에서의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 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방북 문제는 예측 불가한 변수가 가득한 복합방정식이 되버렸다. 북한은 아직 어느 누구에게도 확정날짜를 귀띔해주지 않고 있다.

1448호 (201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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