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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학각색(各學各色)’ | 백약이 무효? 저출산 해법은 어디에 - 여성학] 돌봄 민주주의와 ‘함께 돌봄’ 실천해야 

 

황정미 서울대 여성연구소 객원연구원
출산장려식 도구주의에서 벗어나야…출산·양육을 행복으로 여기게 해야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은 1.052로 역대 최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를 기록했다. 사실 한국이 세계적인 ‘초저출산’ 국가가 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2005년 출산율 1.076의 충격 속에 저출산·고령사회 대책이 주목을 받았고, 정책 목표는 출산율 제고와 신생아 수를 늘리는 것으로 설정됐다.

그러나 결과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바와 같다. 우선 국가 중심적 정책 관성이 방향을 그르쳤다. 개개인이 사랑하고 결혼해 아이를 낳는 일에도 인센티브를 제공하면 성과지표가 올라갈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나 안일하고 비현실적이다. 둘째, 출산율 지표에 집착한 나머지 실제 임신과 출산을 감당하는 사람들의 삶과 일상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결국 저출산 정책에 대한 여성들의 불신이 커졌고, 가임기 여성의 수를 지역별로 표시한 ‘출산지도’ 반대 시위, 더 나아가 ‘저출산’이라는 용어 자체를 쓰지 말자는 주장마저 나온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가 최근 “출산율과 출생아 수를 목표로 하는 국가주도 출산정책에서 개인의 선택권을 존중하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사람 중심 정책으로 방향을 바꾸겠다”고 밝힌 점은 다행스런 일이다. 출산장려 위주의 도구적 정책에서 아이 기르기 좋은 사회, 사회적 돌봄을 지향하는 정책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한 것은 그간의 비판에 귀를 기울인 결과라 하겠다. 그런데 저출산 정책 논란은 으레 돈과 예산으로 이어진다. 물론 아이를 키우는 데 현실적으로 많은 돈이 필요하며, 정책 지원에 많은 예산을 배정해야 한다.

그러나 돈이 해법이라는 주장에는 함정이 있다. 평생 돌봄면제권을 누리는 남성들, 양육과 집안일에 무관심하더라도 지갑을 여는 것으로 모든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는 전형적인 남성들의 인식은 돈이 곧 해결책이라는 데에서 멈춘다. 힘든 육체노동과 집중적 정신노동, 세심한 감정노동이 복합적으로 요구되는 전생애적 돌봄 역할과 책임을 과연 누가 어떻게 분담해야 하는가?

돌봄은 사랑과 헌신인 동시에 엄연한 노동이라는 점을 여성학자들은 주목한다. [돌봄 민주주의]의 저자 조안 트론토는 돌봄의 과정을 다섯 단계로 설명한다. 누구에게 돌봄이 필요한지 확인하고, 필요한 곳에 돌봄을 충족시켜줄 책임을 확인하며, 실제 돌봄 제공 활동을 하고, 또 돌봄을 받는 이들의 반응을 확인하며, 마지막으로 돌봄의 필요와 제공이 이루어지는 모든 과정이 민주적 원칙에 부합하는지 확인하는 것, 즉 ‘함께 돌봄’다. 한마디로 돌봄은 더 이상 집안일이 아니다. ‘무한 책임의 독박육아’를 어머니의 아름다운 희생으로 찬미하는 이야기들은 돌봄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 돌봄은 정의, 평등,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원칙에 부합하게끔 계획되고 실천돼야 한다.

가부장제는 전통의 잔재, 과거의 유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성별의 구분을 권력위계로 구조화하는 가부장제는 오히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형태로 재창조된다고 동서양의 여성학자들은 입을 모아 지적해왔다. 이런 불평등 구조가 여성들의 ‘출산 파업’을 불러왔다고 흔히 말한다. 그런데 출산 파업은 조용한, 이름 없는 파업이었다. 기혼여성들은 ‘못 살겠다 낳지 말자’는 구호 아래 집단행동으로 출산을 거부하지 않았다. 스스로 피임, 심지어 인공 임신중절의 고통도 조용히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제 미투 운동의 세례를 받은 청년 여성들은 성폭력과 여성혐오에 반대하고, 낙태죄가 여성의 몸과 성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억압한다고 비판하며 시위에 나서고 있다. 시위 방법이나 일부 구호에 대한 논란에도 여성들이 몸과 성의 문제를 민주주의 쟁점으로 제기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20세기 역사에서 몸과 성의 권리를 요구하는 여성들의 대중적 저항은 이미 미국과 유럽 등 세계에서 나타난 보편적 경험이다. 생명의 존엄성을 내세우며 ‘자궁을 지닌 시민’들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 황정미 박사는…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HK연구교수 등을 역임했다

1456호 (2018.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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