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로버트 프로스트는 미국의 ‘계관시인’이다. 계관시인이란 국가나 왕실이 뛰어난 시인을 임명해 공식행사 때 시를 지어주기를 요청하는 명예직이다.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된 전통이라고 한다. 그만큼 그는 미국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았다. 장수도 누려 90세 가까이 살고 1963년 영면했다. 그는 1894년 첫 시집을 출간한 이래 여러 시집을 냈지만 그중 가장 유명한 시는 단연, 1916년 발표된 ‘가지않은 길(The Road Not Taken)’일 것이다.‘노란 숲 속에 두 길이 갈라졌지. 나는 두 길을 다 갈 수 없고 한 길만을 가는 것이 아쉬워 오랫동안 서서, 저 아래에서 그 길이 굽어지는 곳까지 가능한 한 멀리 내려다 보았네… 중략…오, 나는 다른 날을 위해 한 길을 남겨 두었지! 하지만 길이 어떻게 (다른) 길로 이어지는지를 알기에, 나는 다시(이곳으로) 돌아오기 힘들거라 생각하며. 나는 멋훗날 나이 먹어 어디에선가 한숨을 지으며 말하리라: 숲 속에 두개의 길이 갈라져 있었고, 그리고 나 -, 나는 사람들이 덜 다닌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그는 1912년에서 1915년 사이 영국에 머물면서 에즈라 파운드 등 시인들과 교분을 쌓았는데 이 중에는 에드워드 토마스라는 시인도 있었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는 미국으로 돌아오게 됐고 이 시는 그가 귀국 후 발표한 것이다. 그런데 프로스트는 이 시의 초본을 출간 전 토마스에게 보냈고 이를 읽어 본 토마스는 이미 나이가 차고 기혼자라서 징집에서 면제되었음에도 큰 결심을 하고 영국군에 자원 입대했다. 인생의 ‘결단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해석한 것이다. 하지만 곧 프랑스 전선에서 별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사했다. 일견 ‘의로운’ 죽음이었지만 시인으로서 그의 재능을 생각한다면 과연 국가적으로나 사적으로는 과연 좋은 선택이었을지 의문이 든다.#2. [손자병법]의 세(勢) 편에서 ‘기정(奇正)’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전쟁에서 지지 않는 것은 이 ‘기정’에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쓰여있다. 승리를 위해서는 ‘비정규 전술(奇)’과 ‘정규 전술(正)’을 둘 다 잘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전쟁사를 살펴보면 장군들은 그 기발함 때문에 비정규 전술을 선호하는 예를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효과가 의문시되는 시점 이후에도 말이다. 1939년 일본과 소련이 크게 충돌한 ‘노몬한 사건’이 일어났다. 독일과의 일전이 임박한 것을 예감한 소련은 동쪽의 ‘화근’을 미리 제거해 놓을 목적으로 400대 이상의 탱크를 동원하는 등 단단히 준비하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에 비해 일본군의 탱크는 총 100대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군 탱크의 성능이 좋지 않아 개전 초에 적 탱크 등에 의해 30대 이상 파괴되자 일본군 사령부는 전력 상실을 우려해 모두 철수시켰다. 변변한 대전차 무기도 없던 일본군은 이제 ‘육탄’으로 소련군 탱크를 상대해야 했다. 소련군 탱크가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것에 착안한 일본군은 탱크를 파괴하는 기발한 방법을 창안해냈다. 바로 ‘화염병’이다. 병에다 휘발유를 넣어서 적의 탱크 엔진 부위에 던지면 불이 크게 붙어 탱크가 파괴됐던 것이다. 다만 이를 수행한 것은 당연히 보병으로, 적 탱크의 기관총 사격에도 탱크에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 화염병을 던져 넣어야 했다. ‘쇠를 근육으로 잡은 것’이었다. 실제로 상당수의 소련군 탱크가 이런 공격에 파괴됐다. 하지만 결국 일본군은 이 전투에서 소련군에게 완패를 당했다.그런데 이후 일본군 수뇌부는 ‘보병으로 탱크를 잡을 수 있다’는 경험을 과신하게 됐다. 이렇게 탱크는 ‘잡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수의 병사가 죽거나 다치는 문제는 외면했다. 제대로 된 대전차 무기를 개발하거나 ‘탱크를 잡는 가장 좋은 수단’인 아군의 탱크 성능을 강화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미군에게 톡톡한 대가를 치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군은 일본군이 맞붙어본 적이 있었던 소련군의 경량 전차가 아니라 훨씬 강한 탱크를 몰고 왔던 것이다. 남태평양의 섬에서 섬으로 옮겨 가던 전장에서 일본군은 아군의 탱크나 대전차 무기의 성능이 여전히 현저히 떨어지는 상태에서 미군 탱크도 화염병 등으로 상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전술은 전혀 먹히지 않았다. ‘대전차 총검술’ 등 말도 안 되는 방법까지 동원해 적 탱크에 달려들었지만 결국 일본군은 수많은 병사의 목숨만 파리 목숨처럼 날리고 말았다. 특히 과달카날 전투 이후 종전까지 한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모두 적 탱크를 제대로 잡지 못한 것이 큰 패인 중의 하나였다.#3. 제롬 I. 로데일은 한때 미국에서 아주 잘 나가는 유기농 식품 옹호론자였다. 그는 항상 건강을 자신한 나머지 “나는 백세까지 살 것이다. 설탕에 취한 택시기사가 나를 치지 않는다면 말이다”라는 호언장담도 했다. 그러던 그는 1972년 어느 토크쇼에 출연해 여느 때처럼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다가 녹화 도중 갑자기 쓰러져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날 밤 방영이 예정돼 있던 프로그램은 당연히 취소됐다. 성경에서도 베드로는 “닭이 두 번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라는 예수에게 “죽는 한이 있어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리라 장담했다. 하지만 그날 밤 그는 세 번이나 예수를 부정했다.현 정부가 출범한 지 2년이 지났다.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다. 실제로 출범 이후 현 정부는‘소득주도성장(소주성)’의 기치 아래 단행한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을 필두로 재정 투입으로 공공부문 일자리 만들기, 노조 우대 등 정통 경제학 이론과는 다른 파격적인 경제정책을 펴왔다. 손자병법을 빌려 평해 보자면 ‘정(正)’보다는 주로 ‘기(寄)’에 의존한 정책들이다. 애써 찾아보면 일부 긍정적인 효과도 있으나 지금까지 이들 정책의 종합성적표는 매우 실망스럽다. 청년실업률 급등에다 공공부문을 제외하면 급속히 줄어드는 일자리, 우려스러울 정도로 빨리 늘어나는 국가 부채는 차치하더라도 10여 년 만의 최대 마이너스 성장률, 5달 연속 역신장하는 수출은 부정적 통계의 일부일 뿐이다.하지만 일부 긍정적인 효과에 집착한 탓인지 이런 정책기조를 바꿀 조짐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대통령은 올해 초 신년사에서도 “경제정책의 기조와 큰 틀을 바꾸는 일”은 “시간이 걸리고,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고 “예상하지 못하고 살펴보지 못한 부분”도 있으며 “가보지 못한 길”이어서 불안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가야하는 길”이라는 언급도 했다. 과연 이 판단이 옳은 것일까? 그래서 한국 경제가 ‘돌아오기 힘들’ 정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인가?그런데 새 정부가 시작된 이후 ‘소주성’의 효과가 곧 나타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던 청와대와 행정부의 실무 인사들은 거의 모두 현직이 아니다. 마치 그들도 이럴 줄 알고 중도하차를 결정한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이들을 데려다 장(杖)을 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유튜버도 보인다. 하지만 그 후임들이 전임자의 잘못을 인정하고 ‘길’을 바꾼다면 책임을 물을 바가 아닐 것이다. 베드로도 결국 그의 행동을 후회하고 다른 길을 가 기독교회의 ‘반석’이 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