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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경의 ‘IF’ㅣ부자를 꿈꾸는 당신에게(18) 세상에 모차르트가 넘친다면] 지나친 경쟁은 화를 부른다 

 

모차르트에 뒤진 살리에르의 열등감… 1등 집착 버리고 무리하지 말아야

▎1817년 바바라 크라프트가 완성한 모차르트의 초상화로 빈 음악애호가협회가 소장하고 있다.
누구나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그런데 나보다 잘하는 사람이 나타난다. 그럴 때 초라해지는 기분이 든다. 그게 흔히 말하는 ‘질투’라는 단어인지 모르겠다. 초연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기 어렵다. 그 사람을 뛰어넘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보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부자가 된 기업들도 그렇다. 1등이 아니면 살아남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런 마음이 당연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금이야 삼성하면 제일이지만, 고 이병철 회장 당시에 삼성의 전신이었던 제일제당의 설탕·밀가루·조미료가 국내에서도 1등을 못한 게 그의 한이었다. 그만큼 기업하는 사람은 1등을 최선으로 여긴다. 그런데 그릇된 ‘질투’는 자신과 기업을 파멸에 이르게 만들 수도 있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얼마 안 남았을 때 우리는 생을 돌아보며, 세상이 야속했다고 말할까? 아니면 그렇지 않다고 할까? ‘난 그럭저럭 착하게도 살았고, 나름 열심히도 살았는데, 돈만 나를 피해가는 거 같아.’ 그런 생각을 하니 갑자기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생각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 하염없이 사라지나. 지나가 버린 것 그리움 되리니.’

푸시킨의 시를 읊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지나온 날을 생각하며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렇다 할 부를 이루지 못한 것도 상당히 아쉽다. 은퇴 후 생활이 걱정되기도 한다. 꼬박꼬박 나올 은퇴 후 자금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누군가는 현재의 상황이 순조롭기만 하진 않다고 하소연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일상에 먹구름이 꽉 끼는 날에는 이 시를 낭독해 보면 어떨까? 지금이 어렵더라도 내일은 다를 수 있지 않을까. 내게 생생한 기운이 샘솟을 날을 믿고 있는데 자신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누구에게나 시련이 온다고 위안을 하자. 힘들었던 순간이 내 삶의 발자국으로 소중히 기억되기를 바라자. 누구에게나 삶에서 음지와 양지가 있다. 중요한 것은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고 국면을 전환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그래서 푸시킨의 다른 시 ‘마지막 꽃들은 더 사랑스럽네’를 되내어 본다. ‘마지막 꽃들은 더 사랑스럽네. 들판에 화려한 첫 꽃들보다도. 우리 가슴에 슬픈 꿈들을. 더 생생하게 일깨우는 마지막 꽃들. 그렇게 간혹 이별의 순간은 더 생생하네. 달콤한 만남의 순간보다도.’

알렉산드르 푸시킨은 1799년 모스크바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났으며 자기애가 강했다. 훗날 부인 나탈리아가 사교계에 빠져 있는 모습에 실망해 심한 가정불화를 겪게 된다. 그녀의 무분별한 사치와 향락으로 많은 빚을 져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다. 나탈리아와 황제와의 염문은 그를 더욱 궁지로 몰아가는데, 세간에는 나탈리아가 네덜란드 대사의 양아들 조지 단테스와 불륜관계란 소문이 무성하다. 그는 단테스와 결투를 하고 부상을 입고 사망한다. 사랑하는 아내가 다른 남자와 불륜에 빠졌을 때 그는 분명히 질투의 화신이었을 것이다.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

질투가 심하면 화병이 나고 패가망신하지만, 질투를 나의 힘으로 만들어 성공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상대를 무조건 얕잡아 보는 기질도 좋은 태도라고 할 수는 없다. 흔히 가난한 처지에 머물기 쉬운 사람은 그 처지를 세상이나 부모 탓으로 돌리기 쉽다. 성공한 사람이나 부자가 나쁜 일을 해서 부를 얻었거나, 타고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도 보인다. 그럴만도 하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이나 부자를 존경하지 않고 혐오하기도 한다. 하지만 부자가 되려는 상당수의 사람은 성공하는 사람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자기계발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본받으려고 한다.

푸시킨이 쓴 희곡 단편 [모차르트와 살리에르]를 보며 인간의 마음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본다. 그의 희곡에는 살리에르가 모차르트의 재능을 시기해 독살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둘간의 관계를 그렇게 보지 않는 게 다수설이다. 살리에르는 음악적 재능을 타고난 뛰어난 음악가였다. 모차르트 이후의 유명하고 위대한 음악가들, 예를 들면 베토벤의 스승이기도 했다. 이렇게 뛰어난 그였지만 그 역시도 하늘이 내린 천재, 모차르트 앞에선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정말 노력파였던 살리에르는 오랜 시간을 열심히 고뇌하고 머리를 써서 만들어낸 훌륭한 곡보다, 모차르트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순간적으로 영감을 받아 겨우 몇분 만에 지어낸 곡이 훨씬 더 훌륭한 것을 보고 비통한 심정을 느꼈다. 그렇다고 독살까지 했다는 이야기는 도가 넘치고 사실이 아니지 않을까?

음악의 재능을 타고난 살리에르도 모차르트를 보면서 동경, 감탄, 놀라움과 열등감으로 신을 원망했을 수 있다. 그래서 살리에르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신이여, 저에게 욕망을 갖게 했으면 재능도 주셨어야지요…”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모짜르트가 아니라 바로 너 살리에르야.”

신을 책망하며 모짜르트의 재능을 시기, 질투하는 살리에르의 열등감은 누구나 한번쯤은 접할 수 있는 일반적 이야기다. 이는 ‘살리에르 증후군’으로 표현된다. 중요한 건 스스로 그것을 어떻게 풀어나가느냐이며, 이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은 달라질 수 있다. 우리는 흔히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욕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보다 많지 않을까? 만약에 이 세상에 모차르트 같은 인물로 넘쳐흐른다면, 그 천재성으로 세상이 미쳐서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 다 천재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서울대에 다니는 학생들이 다 천재인가? 그렇지 않다. 누구에게나 열등감은 있다. 모두가 최고가 되려는 경쟁사회 속에서 개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하다 보면 좌절의 근원이 타자 때문인지 나 자신 때문인지 생각하게 된다. ‘최고’는 오직 하나지만 ‘특유한 개성’은 여럿일 수 있다. 살리에르는 죽을 만큼 노력해도 천재인 모차르트를 이길 수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을 원망해서야 되겠나? 그냥 ‘모차르트는 천재니까, 잘난 인간이니까’라고 쿨하게 인정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학교 다닐 때 보면 죽어라고 노력하는데도 성적이 안 오를 수 있다. 나보다 공부는 훨씬 적게 하는데 성적이 뛰어난 친구들도 있다. 푸시킨의 희곡이나 여러 다른 이야기에서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방해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살리에르 정도 되는 인물이 1등을 못했다고 질투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 세상 기업들이 다 나름의 개성을 살린 제품을 만든다면 부를 일구는 또 다른 길이 얼마든지 열릴 수 있는 것 아닐까. 굳이 공부가 아니어도, 어떤 분야에서든 정말 죽도록 노력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적은 시간을 들이고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그들은 노력을 하지 않았을까? 그렇진 않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성이나 다른 점에서 다른 사람보다 우월할까? 그렇지는 않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참담함까지 느낄 필요는 없다.

세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고 싶은가? 사람마다 경제적 자유로움의 정의는 다르다. 재무적 안락함을 확보하면 행복하고 아니고는 다른 변수에 따라 좌우된다. 세상은 모차르트 한 사람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움직인다. 물론 세상이 모차르트를 기억하겠지만, 전쟁터에서 죽어간 이름 모를 무수한 의병들을 보며 푸시킨의 시를 읊을 필요까지는 없다고 본다.

푸시킨의 살리에르가 모차르트를 독살했다는 설정에 반하는 증거가 나왔다. 오랫동안 분실된 것으로 알려져 왔던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의 콜라보레이션 작품이 체코의 박물관에서 발견됐다. 다행이다. 세상은 천재와 조금 덜 천재인 자와 그렇지 않은 여럿이 공존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너무 많은 모차르트는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 것 같다. 2등의 질투에 질식해버린 천재의 안타까운 이야기와 죽어도 1등이 될 수 없는 평범한 사람의 고통은 영화나 연극으로 족하다.

1등만 행복한 것은 아니다


▎모차르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하이든, 글룩,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막내 아들 크리스티안, 모차르트의 주치의 바리사니, 모차르트가 모셨던 잘츠부르크 주교, 모차르트의 라이벌로 알려진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초상화(왼쪽부터).
학생 골프대회에서 전국 1등을 한 어느 학생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한다고 상상해 보자. “나는 포클레인 기사고 아내는 배추 농사를 짓습니다. 딸의 재능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땅이며 축사까지 모두 팔았는데, 남들 뒷바라지에 비하면 딸에게 쏟는 금전적 비용이 한참 부족한 것 같습니다. 딸이 국가대표 상비군으로 발탁됐지만, 돈이 없어 바로 프로로 전향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딸아이 성적마저 점점 떨어지고 있어 걱정이 태산입니다. 빚이라도 내서 고액 과외를 시켜야 할 것 같아요. 세리 키즈로, 지애 키즈로 키우려면 어떻게든 뒷바라지를 해야 할텐데. 내 머리에는 돈 생각뿐입니다. 돈 없는 사람들이 어디 나뿐이겠어요. 세상 부모 마음은 다 똑 같겠죠. 올 한해에만 42억원의 상금을 획득한 누구 아버지를 보면 욕심을 내고 싶어요. 그분 딸도 프로에 데뷔하기 전인 4년 전만 해도,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5만원짜리 방에서 살았다죠. 확신을 갖고 모든 걸 걸라는 그분의 주문에 내 마음은 더욱 어두워집니다.”

이런 고민을 가진 부모들이 대한민국에 넘쳐난다. 내 딸·아들 뒷바라지 못해, 부가 저긴데 여기서 그만둘 것인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속 시원하게 답을 줄 수 있겠나! 그건 각자 선택의 몫이리라. 다만 객관적인 집안의 사정과 아이의 재능과 잠재성을 감안해 결정할 사항이다.

대세 가수라는 말을 한번도 듣지 못한 50대 남성이 있다. 그는 꽤 유명한 연예인이지만 데뷔 후 단 한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다. 그는 노래에서는 1등을 한번도 못했지만 예능에서는 자리를 굳혔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부동의 심사위원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토크쇼의 단독 게스트가 될 정도로 존재감이 커졌지만 그는 2등이고 싶다고 말한다. 그에게도 왜 어려움이 없었을까. 화려한 무대에 가려진 연예인 생활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전 재산을 탕진해서 빚잔치 하는 사람도 많다. 그 역시 음악제작자로 나서 처음 잘 나가던 때 모은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

그럴 정도로 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무리’ 때문이었다. 무리하게 되는 것은 성공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이다. 나름 인기는 있지만 1등이 되지 못한 콤플렉스가 무리를 낳는다. 인생에서 그런 교훈을 얻으면 2등이어도 좋은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있다. 최고이면 너무 좋겠지만 인생에서 최고가 최선은 아니다. 2등이라도, 3등이라도, 아니 그보다 훨씬 못해도 인생의 의미는 나름 값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에게서 인생의 연륜이 느껴진다. 젊었을 때 이런저런 실패를 해도 나중에는 그게 큰 자산이 될 수 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은 천재가 아니고 1등이 되지 못하는데 대한 속상함이 없다고 강조한다. 혹시 천재성을 보이는 후배가 나타난다면 그에게 꼭 필요한 관리자가 되고 싶다는 희망을 털어넣는다. 누구나 자기 분수를 알아야 지혜롭게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다. 그래야 자신을 비우고 남을 받아들일 수 있다.

2등은 패배자가 아니라 훌륭한 경쟁자이다. 2등도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삼성 다니는 사람들이 모두 SK나 LG 다니는 사람보다 행복한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물론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1등은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그게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살리에르 증후군이다. 2등부터 다른 모든 집단이 패배자여야 할까? 부모가 자식에게 왜 ‘1등을 못해’라고 다그치는지 이해는 된다. 하지만 자식이 그 때문에 패배의식을 느낀다면 그것은 올바른 사회를 만드는 길이 아니다. 한 아이가 있다고 하자. 시험에서 100점 맞고 엄마에게 칭찬받을 부푼 기대를 하고 집으로 온다.

“엄마 나 수학 시험에서 100점 맞았어!”

“너희 반에서 100점 맞은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니?”

“몰라, 그런 건 왜 물어? 내가 100점 맞았으면 됐지.”

우리는 비교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문화에 익숙하다. 남에 대한 평을 하는 데 익숙하다. 칭찬에 인색하다. 인사에서 연줄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나쁜 것, 끊임없이 비교하고 또 비교한다. 입시 위주의 교육제도, 기형적인 사교육 시장,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행복감을 느끼기를 기대하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에서 한국이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생은 긴 마라톤이다. 마라톤에서는 신기록이 중요하지만 인생에서 신기록이 그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다. 마라톤에서 1등은 한 명이지만, 인생에서 1등은 누구나 일 수 있다. 삶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포기하지 않는 삶이 중요하다. 1등이 꼴찌 되고 꼴지가 1등 될 수 있는 게 인생이다. 돈이 중요하지만 돈 많다고, 부자라고, 1등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최악은 끊임없는 비교


▎사진:© gettyimagesbank
요즘 같아서는 천재가 돈이 된다. 사업에서 천재라면 더욱 그렇다. 모차르트가 살던 당시는 달랐다. 프리랜서 예술가를 받아들일 사회적 여건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그의 천재성은 빛났지만 찰스부르크가 뮌헨이나, 빈, 만하임, 바이에른보다 작은 국가라 궁정악단의 실력도 한참 뒤졌고, 주교 역시 그릇이 작았다. 그의 천재성이 너무 일찍 발휘됐다. 어린 시절에는 신동이라 후원금도 많이 받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 레오폴트는 아들을 통하여 자신의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불행하게도 당시 그의 아들은 궁정음악가가 되기에는 너무 어렸다. 잘못된 매니저 아버지 밑에서 재정관리를 제대로 못한 모차르트는 결혼을 하고서도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는 설도 있다. 물론 반박하는 이야기도 많다. 궁중은 즐거움과 기분전환을 위한 음악을 원했는데 모차르트 같은 초인 예술가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가 궁중에서 일한 기간도 짧았다. 가장 슬픈 것은 그가 재정적으로 곤궁했을 때 그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에게 평생 의지할 친구가 없었다는 것 역시 지극히 안타까운 일이다.

모차르트의 연간 수익은 공식적인 직위가 보장해 주는 돈이 전부가 아니었다. 후원자들의 희사금, 음악 교습으로 번 돈, 연주회 수입, 저작료, 작곡 위촉을 받은 경우 사례금 등도 그의 수익원이었다. 그가 미카엘 푸흐베르크에게 절박한 대부요청을 하던 시기에도 그는 2층짜리 아파트에서, 마차와 말을 소유하고 남녀 하인 1명씩을 고용하고 살았다. 그의 편지에 나타난 경제적 곤궁 상황은 돈을 빌리기 위한 엄살이 아닐까라는 견해도 있다. 그는 1791년에 경제적 상황이 호전되자 더 비싼 아파트로 이사했다. 모차르트의 사후 6일이 지난 1791년 12월 11일, 그의 미망인 콘스탄체 모차르트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교습생인 귀족 신분의 여인의 도움을 받아 황제 레오폴트2세에게 공개적으로 탄원한다. 당시 탄원의 목표는 빈에서 만연하던 모차르트의 거대한 부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말하고 미망인인 자신이 황제의 연금을 신청할 자격이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모차르트의 소나타에 담긴 슬픈 메시지

사실 콘스탄체는 법적으로는 그런 연금을 수령할 권리가 없었다. 모차르트가 궁정작곡가로 근무한 것은 고작 4년이었다. 연금수급권은 10년 이상 봉직한 사람에게만 주어졌다. 그러나 콘스탄체는 대담하게 법적 근거도 없는 청원을 밀어 붙였다. 그녀는 ‘자비로우신 황제폐하!’로 시작하는 탄원서에서 궁정 사람들은 모두 남편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을 말한다고 했다. 그들은 남편의 부채 규모에 대해 터무니없이 과장된 소문을 흘린다고 강조했다. 그 소문의 핵심은 모차르트가 남긴 부채가 실제의 10배라는 점으로 그녀의 탄원이 진실임을 꼭 믿어달라고 당부한다. 황실은 이는 이례적인 일로 이를 차후에 선례로 삼을 수 없다고 선언하며 연금지급을 승인했다. 콘스탄체의 증언은 항간에 떠도는 모차르트의 부채가 3만 굴덴이라는 이야기를 불식시키고자한 것이다. 이 탄원에 콘스탄체는 남편의 부채액에 대해서만 자세히 언급했을 뿐, 채무 발생 시기와 원인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모차르트의 부채의 원인은 미스터리로 남았다.

문득 그가 1789년 5월 12일 부인에게 남긴 편지를 읽고 싶어진다. 로버트 스파에쓰링의 [모차르트의 편지, 모차르트의 삶]에 나오는 대목이다. ‘여보, 당신에게 바라는 게 있어. 쓸쓸해 하지 말고 건강할 것. 봄의 바깥바람을 만만하게 보지 말 것. 혼자 걷지 말고 우리 사랑을 확신할 것…(중략)…편지를 더 자세히 써 줄 것…(중략)…당신을 1095060437082번(이것으로 발음 연습이 되겠지) 키스하고 꼭 껴안을 게.’

세상이 천재로 가득하다면 잘난 맛에 세상이 미쳐 돌아갈지도 모른다. 저마다 다른 색깔의 사람들이 모여 살기에 세상은 살 만하다. 사람들이 다양한 것처럼 부자들의 색깔도 저마다 다를 것이다. 그들이 맨 넥타이와 스카프가 다른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 다만,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처럼 재정적 곤궁으로 어렵게 되는 불상사는 막아야 한다. 천재도 2인자도 결코 행복한 말년을 보내지 못했다. 우리가 1등도 2등도 아니라도 행복할 이유는 수만 가지다. 모차르트의 7번 소나타를 듣는데, 밝은 장조 뒤에 이어지는 그의 슬픈 이야기가 가슴을 적신다. 그는 아내에게 수도 없는 키스를 말없이 하고 있었다.

※ 필자는 국제경제 전문가로 현재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이다. 대한민국OECD 정책센터 조세본부장, 대외경제협력관 등을 지냈다. 저서로 [한 권으로 읽는 디지털 혁명 4.0]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 등이 있다.

1484호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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