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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23) 오영석 전 카이스트 초빙교수] “자식 진로 개입은 자식과의 동반자살” 

 

장래가 아닌 건강과 삶의 질 책임져야… 아들은 마크롱 정부 디지털경제 장관, 딸은 외무부 본부대사

▎오영석 박사가 자신이 고문으로 있는 인사동 예성화랑에서 포즈를 취했다. / 사진:전민규 기자
“부모가 자식의 전공·진로 결정에 개입하는 건 자식과 함께 동반자살하려는 거와 같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다른 인간의 장래를 책임집니까? 그랬다가 잘못되면 ‘얘야, 미안하다, 한번뿐인 너의 인생을 내가 망치고 말았구나’ 할 건가요?” 오영석 박사(전 카이스트 초빙교수)는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라며 “부모로서 책임질 건 자식의 장래가 아니라 부모 슬하에 있는 동안의 건강과 삶의 질”이라고 말했다. “자기 길을 자식이 스스로 선택하게 해야 합니다. 실패를 겪으면서 성숙해 지죠. 자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면 자기 손등으로 닦게 해야 합니다. 어쩌면 문제 없이 성장하는 젊은이가 오히려 불안한지도 몰라요.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지만 통제하기보다 친구가 돼야 합니다.”

프랑스 국립응용과학원 교수를 지낸 오 박사는 프랑스 유학 전 한국의 프랑스문화원에서 만난 프랑스 원어민 강사와 국제결혼해 30대의 아들과 딸을 뒀다. 아들(세드리크·영택)은 현재 마크롱 정부의 디지털경제 장관, 딸(델핀·수련)은 하원의원을 거쳐 프랑스 외무부의 본부대사로 있다. 세드리크 장관은 마크롱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디지털경제부는 국가의 차세대 기술을 관장한다. 델핀 대사는 유엔여성포럼2020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다. 내년 프랑스에서 열리는 이 포럼엔 세계 50여 개국 정상이 참석해 여성의 권리 증진을 주제로 머리를 맞댈 예정이다. “부모는 자식에게 모범을 보이고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망 내지는 조언해 주는 것까지만 해야 합니다. 경험이란 망루와 같습니다. 많이 쌓일수록 망루가 높아져 앞을 멀리 내다볼 수 있죠. 멀리 내다봐야 판단의 근거가 많아져 큰 오류 없이 미래를 제대로 대비할 수 있어요.”

자식농사 비결은 독서와 대화


▎프랑스 의회에서 대정부 질문 답변을 마친 오 박사의 아들 세드리크 장관(오른쪽)과 동생인 델핀 대사. / 사진:오영석
그는 프랑스에서 25년간 살았다. 2004년 카이스트 초빙교수가 되어 두 나라를 오가다 몇년 후 영구 귀국했다. 현재 개발도상국의 컴퓨터 공학 발전을 돕는 사단법인 액세스넷의 회장을 맡고 있다. 최근엔 두 자녀에 대한 교육 경험을 담은 책 [어떻게 자녀를 인재로 키웠는가]를 냈다. 그는 자녀들이 성공한 요인으로 독서와 대화를 꼽았다. 어린 자녀들과 책을 함께 읽은 후 토론했고, 저녁이면 식탁에 둘러앉아 낮에 겪은 일과 관심사를 서로 나누는 대화를 했다고 말했다. “통상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호기심을 갖도록 하는 한편 ‘왜 안 되느냐(Why not?)’는 질문을 수시로 하도록 가르쳤습니다. 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품고 현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도록 하기 위해서였죠.”

그는 함께한 저녁식사와 책 읽고 한 토론 외에 자신의 자녀 교육법으로 세 가지를 더 들었다. ▶TV를 없앴다(저녁 시간이 저절로 길어진다. 저녁 뉴스를 보지 않는다고 세상이 달라지지 않는다.) ▶하루 8시간 숙면을 취하도록 했다(숙면을 해야 두뇌가 최적화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시간을 내서 놀아줬다(서로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 매일 책을 읽어줬습니다. 글을 익힌 후엔 아이와 한쪽씩 교대로 읽었죠. 그러다 혼자 읽기 시작했어요. 부모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두 아이 다 글을 잘 쓰고 연설도 잘하는데 저는 독서 덕이라고 봐요.”

그는 자식들에게 엄한 아빠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 식사시간에 밥을 먹지 않으면 중간에 먹을 것을 주지 않고 다음 식사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심지어 세드리크는 스무 살 될 때까지 엉덩이를 맞았다. “아들과는 어떤 의미에서는 경쟁 관계입니다. 체벌을 할 땐 그 이유에 대해 설명했고, 좋지 않은 기억으로 마음에 남지 않도록 보듬었습니다. 어떤 땐 세드리크가 순종하기보다 자신이 정당하다고 주장하고 체벌에 항거하기를 바랐죠. 체벌도 하나의 교육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불의와 부정, 비합법적 권위에 대해서는 언제나 맞서라고 가르쳤다고 말했다. 언젠가 세드리크는 지하철에서 여러 청년이 한 흑인을 괴롭히는 것을 보고 이 흑인을 구해준 일이 있다고 한다. 그때 다른 승객들은 못 본 척했다. 세드리크는 일찍이 태권도와 유도를 배웠다. 그는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외출시 지켜야 할 행동 십계명을 정해 주었다고 한다. 그중에 하나가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도움을 주라’이다. 이런 계명도 있다. ‘싸움에서 절대 물러서지 말되 싸움을 걸지도 말라’ ‘리더가 되어 추종자를 바르게 이끌라’ ‘아빠의 아들임을 명심해 사악해지지 말라’.

그는 키 큰 사람과 악수를 할 땐 오히려 손을 아래로 내리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그 사람이 손을 잡기 위해 자세를 낮출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를 만나든 겸손히 대하고 긴장하거나 위축되지도 말라는 뜻이었죠.”

오 박사는 프랑스에 있을 때 재불 한국과학기술자협회장과 재유럽 한국과학기술자연합회장을 지냈다. 한국의 과학기술자 디아스포라의 리더였다고 할 수 있다. 외국에 있는 한국인 과학기술자를 국내에 취업시켰고 외국의 문헌을 수집해 한국에 보냈다. 외국의 석학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후발주자로서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돈과 브레인이 필요합니다. 돈은 밖에서 빌릴 수도 있지만 사람은 키우는 데 시간이 걸려요. 그래서 외국의 한국인 과학기술자를 불러들였죠. 우리나라가 준비가 안 된 채 이들을 유치했다가 숱한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결국 다시 돌아간 사람도 적지 않아요.”

카이스트 입학 사정관 때 학생 성적은 묻지 않아


▎1980년 오 박사가 한복을 입은 부인과 프랑스 리옹 시청에서 혼인신고서에 서명하고 있다. / 사진:오영석
그는 과학기술 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1995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로부터는 교육공로훈장을 받았다. 카이스트에서는 외국 대학과의 자매결연, 외국인 학생 선발 등 국제 협력 업무를 맡았다. 유럽·미국·홍콩·싱가포르의 대학 약 100개 교와의 자매결연을 그가 주선했다. 카이스트가 일반고 출신을 뽑을 땐 입학사정관을 맡았다. 해당 고교 측이 추천한 우수한 학생들과 일 대 일로 두 시간 안팎씩 면접을 했다. 면접 땐 교장실을 벗어나 학생과 나란히 운동장을 걸었다. 성적은 물어 보지도 않았다. 대신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이벤트를 3가지 골라 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 보라고 요구했다. 많은 학생이 당황했다.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것이었기 때문인 듯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그렇게 외로운 줄 몰랐습니다. 공부 기계로 사느라 부모와도, 친구와도 대화가 없어서죠.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이 마음을 열고 대화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면접관인 나에게 그 고통을 호소했겠습니까? 마음 깊이 간직한 비밀을 털어놓기도 했어요. 이야기를 듣다가 여러 번 눈시울을 적셨어요.”

그는 우리 교육은 인지, 분석, 종합, 행동이라는 교육의 사이클이 암기를 수단으로 하는 인지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지적했다. “저는 객관식 시험이야말로 출제자의 주관에 좌우된다고 봅니다. 출제자보다 생각이 많거나 출제자의 생각에 못 미치면 틀리게 돼 있죠. 프랑스의 수능시험은 논술형으로 과목당 4시간씩 보는데 1만 명의 교사가 매달려 채점을 하는 데도 편차가 크지 않습니다. 어휘력, 주제와의 연관성, 표현력 등의 평가 지표에 따라 채점을 하기 때문이죠. 우리도 스스로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을 해야 합니다.”

그는 카이스트 시절 정보통신기술(ICT) 강국으로서 유네스코와 손잡고 공동학위를 주는 오픈 유니버시티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2년 간 온라인 수강을 하고 그 후 1년간 한국에 와 한국어로 기술 교육을 받고 실습도 하는 프로그램이다. 당시 수용이 되지 않았지만 그는 여전히 유효한 아이디어라고 주장했다. 한국이 프랑스에서 테제베(TGV) 기술을 도입할 당시 그는 교통부 장관을 만나 조언을 한 일이 있다. 그 후 프랑스로 돌아가 관련 논문·잡지 기사 등을 분석해 TGV 기술 이전과 관련한 제안서를 작성해 교통부 장관에게 보냈는데 교통부가 프랑스 교통부 장관과 철도청장에게 공문을 보내면서 이 제안서를 동봉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일로 그는 프랑스 정부 기관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동갑내기였던 그의 논문 지도교수는 TGV 기술 이전과 관련해 소집된 프랑스 관계 기관 전략 회의에서 나왔다는 이야기를 전해 줬다. “이 사람이 과학기술 분야 면에서는 주불 한국대사보다 더 영향력이 있다.”

이런 경험을 한 덕에 그는 두 자녀에게 기업이나 국가의 주요 기술과 관련한 자료는 설사 비밀로 분류돼 있지 않더라도 신중하게 다뤄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 후 두 자녀는 촉망 받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그는 유효 기간이 짧은 권력이라는 힘에 대해, 추구는 하되 공정하게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권력은 권력 자체보다 인간과 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사용될 때 더 매력적인 힘입니다. 권력은 너무 집중되면 중앙은 경색되고 변방은 마비가 오죠.”

남이 열어주는 문은 관뚜껑 밖에 없어

그는 세드리크는 정치를 떠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가족에게 봉사할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델핀은 정치인으로서의 자질과 의지가 오빠보다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인생이라는 여행길은 출구가 여럿인 넓은 방을 둘러보는 것과 같아요. 어느 시기에 어느 문을 여느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되죠. 중요한 건 그 문을 제 손으로 열어야 한다는 겁니다. 남이 열어주는 문은 관 뚜껑밖에 없어요.”

그는 우리나라에 의식 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법을 잘 지키고, 다른 사람을 포용하고 인권을 존중하는 창의적인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휴머니티가 살아 있어야 선진국 나아가 대국이 됩니다. 일본이 대국이 못 되는 이유죠. 이렇게 볼 때 중국도 대국이 아닙니다.” 시니어가 대접을 못 받는 건 시니어의 책임이 크다고 말했다.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건 젊은 사람들의 의무가 아닙니다. 그런데 자리를 양보 받고도 당연하다는 듯이 고맙다는 말도 안 해요.”

이 갈등의 시대 그는 프랑스인들에게서 그들 특유의 똘레랑스(관용)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프랑스엔 민족이라는 관념이 없습니다. 인종 간엔 우열이 없습니다. 문화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모든 인간은 평등합니다. 저는 에너지 불변의 법칙처럼 모든 개인에게 주어진 자원의 합이 같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약골인 사람은 에너지 소모가 적어 오래 살고, 체격이 좋아 힘을 많이 쓰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단명할 수 있다고 봐요. 우리는 세계 시민으로서 자신과 다른 모든 인간을 그 모습 그대로 포용해야 합니다.”

1500호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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