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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컨슈머’ 그 빛과 그림자 

 

그들에게 고객은 늘 왕(王)이어야 한다.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매장, 호텔 등 서비스업체에서는 단정한 유니폼을 입은 종업원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손님을 맞는다. 언제나 반가워하는 얼굴로 상냥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 비록 자신의 기분이 좀 언짢더라도 겸손한 자세로 웃음을 지어야 고객은 기분이 좋아 다시 찾고 싶어질 것이다. 손님의 입장에서 보면 마냥 즐거운 일이지만 그들은 직업상 피치 못해 자신의 본성과 감정을 숨겨야 한다. 항상 밝은 표정으로 고객을 맞는 일을 되풀이하는 그들은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를 받을까. 이들에게 ‘감정 노동자(Emotional labour)’라는 표현을 쓴다.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조용필의 히트곡 ‘그 겨울의 찻집’의 가사 중 일부다.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대목에 주목한다. 물론 생리적으로 웃을 때도 눈물이 날 수가 있다. 그러나 즐거워 웃고 있을 때 눈물이란 걸맞지 않다. 역설이자 모순이다.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움이 사무친다는 뜻일까.

감정노동은 육체노동이나 정신노동과 달리, 고객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특정한 감정 상태를 연출하는 것이 업무상 요구되는 노동 유형이다. 대체로 감정 관리 활동이 직무의 40% 이상을 차지하는 경우를 말한다. 1980년대 미국에서 이 용어가 처음 학문적으로 정립됐을 때에는 주로 텔레마케터, 항공기 승무원의 사례에 초점을 맞췄다.

산업이 고도로 발달하면서 ‘고객은 왕(王)이다’라는 구호 아래 서비스업체는 직원에게 고도의 감정노동을 요구한다. 때론 극기 훈련을 통해 예절교육을 하는가 하면 곳곳에 감시 카메라를 두거나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까지 풀어 직원을 살핀다. 이 산업에 종사하는 직원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다. 미스터리 쇼퍼는 일반 고객으로 가장하여 매장을 방문해 물건을 사면서 점원의 친절도나 판매기법, 사업장 분위기 등을 평가하여 개선점을 건의하는 일을 맡는다. 이를테면 내부 모니터 요원. 고객이 시식코너에서 음식을 무한정 먹어대거나, 여러 차례 반품을 요구할 경우 직원이 다소곳하게 응하는지 점검하고 점수를 매기는 ‘악역’이다.

이는 상품의 질과 더불어 서비스 질에 대한 소비자의 평가에 따라 기업 매출이 큰 영향을 받게 되면서 생겨난 새로운 직업 가운데 하나이다. 미스터리 쇼퍼는 기업이 직접 소비자 반응을 살피기 어려운 것을 대신해 이를 점검하고 평가한다. 이들은 매장을 방문하기 전에 해당 매장 위치, 환경, 직원 동향, 판매제품 등의 정보를 파악한다.

최근 외식업체와 금융회사, 백화점 등 쇼핑몰, 병원, 관공서, 판매업체 등에서 매장 직원의 평가를 의뢰하는 회사가 늘고 있으며, 이에 따라 미스터리 쇼퍼가 할 일도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감정노동자들에게 더 고약한 ‘고객’이 있다. 기업을 상대로 부당한 이익을 취하려는 목적으로 제품 구매 후 고의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고객이다. 이들은 구매한 상품의 하자를 문제 삼아 기업에게 과도한 피해보상금을 요구하거나 거짓으로 피해를 본 것처럼 꾸며 보상을 요구한다.

이들을 ‘블랙 컨슈머(Black consumer)’라고 부른다. 상품 구매 후 일정 기간 사용한 후 상품의 하자를 주장하며 제품 교환 또는 환불을 요구하는 단순한 유형에서부터, 상품으로 인한 근거 없는 신체·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면서 반품·환불을 넘어 보상금을 요구하는 전문적 유형까지 다양하다. 거액의 보상금을 수령할 목적을 가지고 일부러 식료품 등에 이물질을 넣어 악의적인 민원을 제기하는 블랙 컨슈머도 있다.

대부분의 블랙 컨슈머는 소비자보호 관련 단체나 기관을 거치지 않고 기업에 직접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 과정에서 제품 교환보다는 과다한 금전적 보상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는 사회적인 파장을 강조하며 언론 또는 인터넷에 관련 사실을 유포하겠다고 협박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최근 유명 분유회사는 자사의 분유 캔 뚜껑 부분에 녹이 슬어 있다는 한 방송사의 뉴스에 대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이를 제보한 소비자가 거액을 요구해와 민형사상 고소를 진행 중”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회사 측은 “블랙 컨슈머에 대한 적극적이고 공정한 대응으로 소비자와 제품을 지키겠다”라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렇다면 블랙 컨슈머은 영원히 배척해야만 할 고객군(顧客群)일까.

다른 한편으로 ‘블랙 컨슈머’를 고정 고객으로 많이 확보했다는 사례도 있다. 악성 고객은 사람의 감정을 교묘하게 건드리기 때문에 강경하게 대처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서비스업에서 종사하다 보면 여러 가지 유형의 블랙 컨슈머를 접하게 된다. 그 중에도 상습적으로 꼬투리를 잡는 비양심적인 고객이 있는가 하면, 힘들게 번 돈을 제대로 ‘왕처럼’ 쓰려는 보상 심리를 가진 고객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을 되레 고정 고객으로 확보했다니 믿기 어렵다.

블랙 컨슈머를 ‘우리 편’으로

블랙 컨슈머 중에는 ‘갑’이 되고 싶어 하는 보상 심리를 가진 고객도 있다. 브랜드에 대한 애정이 유난해서 무의식 중에 불편한 마음을 표출하는 경우가 있다. 한 사례를 보자.

어느 날 화가 잔뜩 난 50대 남자 고객이 매장에 들이닥쳤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여기 매니저가 누구요?”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큰 소리부터 먼저 내는 경우는 대체로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할까 두려워 선제적으로서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경우다.

“제가 매니저인데요. 무슨 일이신지, 일단 차 한잔하시지요”

화가 난 사람은 일단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직원은 함께 차를 마시며 자초지종을 묻고 사정 얘기를 들어준다. 고객서비스(AS) 기간이 끝난 옷을 고쳐 달랬다가 거절당해 화가 났다는 사연이다. 직원은 현재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알려준 뒤 함께 대안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러자 고객은 마음을 열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고객은 그날 이후 그 직원의 고정 고객이 되었다.

이렇듯 때론 작은 배려에 감동하는 것이 고객이다. 블랙 컨슈머도 언제든지 ‘화이트 컨슈머’로 변할 수 있다. 블랙 컨슈머가 충성고객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새겨두어야 한다.

- 정영수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1519호 (2020.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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