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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사우디 석유 감산 공방전] 국제 오일 전쟁 뒤엔 사우디 왕실의 피바람 있다 

 

무함마드 왕세자, 왕위 승계 위해 유가 통제 방해되는 러시아와 치킨 게임

▎화염을 내뿜고 있는 중동 유전 모습 / 사진:연합뉴스
코로나19로 글로벌 경제의 미래가 불확실해지는 가운데 중동 최대 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가 다시 소란스럽다. 3월 6일 사우디와 러시아의 감산 합의가 무산되자 사우디가 역으로 공급을 대대적으로 늘리겠다고 밝히면서 국제 유가가 급락했기 때문이다. 뉴욕타임스(NYT)와 니혼게이자이 등에 따르면 국제유가는 이날 뉴욕시장에서 무려 34%가 떨어져 4년 만에 가장 낮은 배럴당 32달러 전후를 기록했다.

유가 폭락은 사우디가 주도했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3월 6일 러시아를 비롯해 10개 주요 비OPEC 산유국과 함께 모인 자리인 OPEC+에서 코로나19 확산에 대비해 추가 감산을 논의했다. 하지만 러시아의 반대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았다. OPEC과 러시아가 감산을 계속하면 국제 유가가 올라간다. 사우디와 러시아는 석유를 고가로 팔아 더 많은 오일달러를 벌 수 있다. 하지만 감산을 중지하면 공급이 늘면서 유가가 내려간다. 특히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미국의 셰일오일 생산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강력한 수압으로 지하의 암석층을 분쇄해 얻는 셰일오일은 생산단가가 배럴당 50달러 정도로 중동이나 러시아의 원유보다 높다. 국제유가가 50달러 이하로 떨어지면 미국의 셰일오일 산업은 타격을 입게 된다. 생산가보다 판매가가 낮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일 업계에는 지난 몇 년 간 엄청난 자금이 투입됐는데, 국제유가가 생산비를 밑돌 경우 미국 셰일 업계는 당시 얻은 부채와 이자를 갚는 데도 허덕일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때문에 일부에선 러시아가 국제유가를 셰일오일 생산 원가 이하로 유지해 자국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는 미국에 피해를 주려는 의도로 사우디와 감산에 합의를 해주지 않았다고 추측한다.

그러자 사우디는 러시아와 과거 합의했던 석유 감산 시한이 3월 말에 끝나는 즉시 4월부터 산유량을 대대적으로 늘리겠다며 러시아를 압박했다. 사우디는 4월 선적분 원유 수출가를 3월에 비해 배럴당 6∼10달러 정도 인하했다. 사우디는 아예 국제유가를 더욱 내려 러시아에도 타격을 주기 위해 대대적인 증산과 가격 인하 카드를 내놓은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거대한 산유량과 수출량을 가진 사우디가 생산량 조절을 통한 가격 통제로 러시아에 타격을 주려고 시도한 것이다. 사우디의 공세는 러시아와 지난 3년간 유지했던 산유량 조절 공조가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말이 공조지 사실상 담합이다. 공조가 끝나 더 이상의 감산이 없으면 국제 시장에 석유 물량이 넘쳐 가격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3월 9일의 유가 폭락은 이 때문이다.

사우디가 치고 나오자 러시아도 반격을 가했다. 러시아 국제방송인 RT의 인터넷 판에 따르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노박 에너지장관은 이에 대해 “러시아는 현재 생산량에서 하루 50만 배럴을 더 생산할 수 있다”라고 받아 쳤다. 러시아의 하루 산유량은 1130만 배럴이므로 앞으로 하루 1180만 배럴로 증산하겠다는 이야기다. 사우디와 러시아가 유가 주도권을 놓고 그야말로 치킨 게임에 들어간 셈이다. 이에 따라 누가 먼저 손을 들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에 따르면 재정 균형을 이루기 위해선 원유 1배럴당 사우디는 83.6달러, 아랍에미리트(UAE)는 70달러, 이라크는 60.3달러, 러시아는 42.4달러의 유가가 유지돼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보면 사우디가 불리한 게임일 수밖에 없다.

사우디 왕실 내 가족 간 권력 암투 잇따라

그렇다면 사우디는 왜 불리한 상황을 무릅쓰고 이런 ‘유가 전쟁’을 시작한 것일까? 사우디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빈 압둘아지즈 알사우드 왕세자의 기 싸움과 권력 게임의 일환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같은 날 NYT와 워싱턴포스트(WP) 등은 사우드 왕실 내부 소식통을 인용해 무함마드 빈 나예프 전 왕세자와 그의 동생 나와프 빈 나예프 왕자(사우디를 건국한 압둘아지즈 국왕의 남자 자손들에 붙이는 호칭), 그리고 살만의 이복 동생인 아흐메드 빈 압둘아지즈 왕자를 비롯한 왕실 고위 인사가 당국에 체포됐다고 보도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이 자신의 왕위 승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삼촌과 사촌들을 잡아넣었다는 이야기다.

워싱턴포스트(WP)에 따르면 이들이 잡혀간 혐의는 왕위 찬탈을 위한 반역 모의다. 유죄 판결을 받으면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해당하는 무거운 처벌을 받을 수 있는 혐의다. 사우드 왕가에 피바람이 날 것인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은 무함마드 빈 살만의 승계가 그리 순조롭지 않다는 의미일 수 있다. 왕실 내부에 반발 세력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러시아와의 유가 전쟁도 왕위 승계를 위해 엄청난 자금이 필요한 무함마드 빈 살만의 초조한 심리를 반영한 것일 수 있다. 러시아를 어느 정도 눌러야 국제 유가를 조절해 국가 재정 수입도 늘리고 국내 증시에 상장한 사우디 국영 석유회사 아람코의 주가도 높일 수 있다. 순조로운 왕위 계승을 위해선 복지와 경제 개발을 위한 자금이 필요하다. 왕실의 안보 비용이다. 게다가 저유가가 계속될 경우 사우디가 감기에 걸리고 러시아가 독감을 앓는다면 사우디와 미국의 숙적인 이란은 빈사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수 있다. 이란과 러시아를 눌러 미국을 돕는 척하면서 미래 글로벌 석유 산업을 좌우할 수 있는 미국의 셰일 오일산업도 어느 정도 눌러두는 효과를 노렸을 수도 있다. 사우디로선 한번 해볼 수 있는 모험이다.

사우디에서 사실 왕위 승계는 힘든 작업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왕위 승계는 사우디 건국 이래 처음 있는 부자 상속이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사우디는 초대 국왕인 압둘아지즈 빈 압둘라흐만 알사우드(1875~1953년, 재위 1932~53년)에 이어 아들들이 차례로 국왕을 맡아왔다. 중세식 형제상속이다.

형제상속의 왕위 승계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2대 국왕 사우드(1902~69년, 재위 1953~64년)는 왕실 구성원들과의 불화로 강제 퇴위 당했다. 당시만 해도 국왕 한 사람보다 왕실 구성원들의 집단 발언권이 더욱 강했다는 이야기다.

3대 국왕 파이살(1906~75년, 재위 1964~75년)의 삶은 더욱 굴곡졌다. 재위 중 1973년 서방 메이저 석유사에 대항해 석유파동을 주동해 막대한 오일 달러를 벌어들여 비축했다. 사우디에 엄청난 국부를 안겨줬음에도 조카 파이살 빈 무사이드에게 암살됐다.

파이살이 즉위하면서 동생인 무함마드(1910~88년)가 왕 세제(재임 1964~65년)를 맡았지만 왕실 내부 불화를 조정하는 과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왕실의 어른이자 막후 실세로 군림했다. 하지만 1977년 19세의 손녀가 간통으로 체포되면서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사우디를 지배하는 이슬람 수니파의 극보수 집단인 와하비파는 중세의 종교 기준은 물론 사회 기준까지 강요했다. 이에 따라 사우디는 간통형에는 투석형으로 사형에 처해왔다. 하지만 무함마드의 손녀는 왕실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살로 처형됐다. 이례적인 일이었다.

뺏고 뺏기는 사우디 왕가의 승계 혈투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아라비아 왕세자(왼쪽)가 2019년 10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정상 회의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선물을 주고 받고 있다.
4대 국왕 칼리드(1913~82년, 재위 1975~82년)는 극보수화로 치달았다. 이슬람 와하비 세력에 교육통제권을 넘겨줬다. 지금도 와하비 세력은 사우디의 교육을 지배한다. 이를 통해 와하비 세력은 이권을 얻었고, 사우드 왕가는 와하비파의 직접적인 비난을 피하고 그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칼리드는 즉위 전 제1부총리를 맡아 왕실 의전 업무를 수행했다.

5대 국왕 파드(1921~2005년, 1982~2005년)는 1995년 이후 건강 악화로 정치에서 사실상 2선으로 후퇴했다. 재위 중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한 사우디의 군주다. 그의 재임 중 사우디는 미국이 일으킨 1990~91년 걸프전과 2003년 이라크전에 참전하고 미군에 자국 내 군사기지를 내줬다. 즉위 전에 권력 실제의 하나인 내무장관(1962~75년)을 지냈다.

6대 국왕 압둘라(1924~2015년, 재위 2005~2015년)는 즉위 전에 국가경비대장(1962~2010년) 부총리(1975~2005년)를 맡아 권력 보위와 국가 경영 경험을 쌓았다. 48년 동안 국가경비대장을 30년간 부총리를 맡았다. 독특한 것은 79세에 즉위한 압둘라 국왕의 재위 기간 중 차기 왕위 계승권자인 왕세제가 두 사람이나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압둘라 국왕이 즉위하면서 곧바로 왕세제가 된 술탄(1928~2011년, 왕세제 재임 2005~2011년)이 그 중 한 명이다. 술탄은 사우디 역사상 최장수 국방장관(1963~2011년 재임)으로 48년간 자리를 지켰다. 32세에 국방장관을 맡아 종신 장관을 맡았다.

압둘라가 먼저 떠나 보낸 또 다른 왕세제로 나예프(1934~2012년, 왕세제 재임 2011~2012년)가 있다. 술탄이 사우디의 최장수 국방장관이었다면, 나예프는 최장수 내무장관(재임 1963~2011년)이다. 그는 재임 중 국내 치안 및 통제를 강화해 강력한 경찰국가 사우디를 만들었다는 평을 듣는다. 압둘라 국왕 재위 중 세 번째로 왕세제가 된 살만(85세·1935년~)은 압둘라보다 더 오래 살았다. 2015년 1월 사우디의 7대 국왕으로 즉위해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주목할 점은 먼저 세상을 떠난 술탄 왕세제가 생전에 움켜쥐었던 사우디 국방장관 자리를 압둘라가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48년간 주지사(1963~2011년)를 지내던 그는 국방장관(재임 2011~2015년)을 맡고 있다가 국왕에 즉위하면서 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35세·1985년~)에게 그 자리를 넘겨줬다. 2017년 6월부터 왕세자를 맡고 있는 바로 그 아들이다.

압둘아지즈이자 살만 국왕의 배다른 동생인 아흐메드(79세·1941년~)는 32년간 내무 부장관(1975~2012년)을 지냈다. 하지만 왕위 승계전에서 탈락하면서 장관 자리도 잃었다. 5대 국왕 파드, 왕세제 술탄, 왕세제 나예프, 7대 국왕 살만이 모두 수다이리 왕비의 아들로 동복 형제다. 이는 사우디 왕가의 승계 구도에서 큰 역할을 했다. 수다이리의 아들들은 왕위 계승 과정에서 똘똘 뭉쳤기 때문이다.

살만의 또 다른 이복 형제 중 탈랄(89세·1931년~)은 어머니가 아르메니아계 기독교도 출신이라 왕위계승에서 탈락했다. 권력에서 소외된 반발인지 탈랄은 1958~64년 입헌군주제를 요구하는 ‘자유왕자 운동’을 벌여 ‘붉은 왕자’로 통한다. 탈랄의 아들이 알왈리드 빈 탈랄(85·1955년~)이다. 180억 달러의 자산을 보유한 세계적인 부호로 킹덤홀딩스 회장이다.

살만 국왕은 즉위하면서 형제 중에서 결격사유가 있는 아흐메드와 탈랄을 제외하고 막내인 무크린(75세·1945년~)을 왕세제에 올렸다. 하지만 무크린은 2015년 1~4월 왕세제 자리에 앉아있다고 밀려났다. 최후의 왕세제다.

녹록치 않았던 국왕 아들의 첫 왕위 계승

무크린의 뒤를 이어 왕위 계승 순위 1위가 된 사람은 살만 국왕의 조카였다. 나예프 빈 압둘아지즈 전 왕세제의 아들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61세·1959년~)였다. 사우디 최초의 왕세질(국왕의 조카로인 왕위 승계 예정자)이자 초대 국왕 압둘아지즈의 손주 대의 첫 승계 예정자였다. 나예프 전 왕세제는 수다 이리 왕비의 아들로 살만 국왕의 동복 형제다. 압둘라 국왕 시절 왕세제를 지내다 국왕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무함마드 빈 나예프는 2011년 부친인 나예프 빈 압둘아지즈 왕세제가 세상을 떠나면서 부친이 맡고 있던 내무장관 자리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무함마드 빈 나예프는 2017년 왕세질에서 밀려나면서 내무장관 자리도 내놓아야 했다.

그 뒤 살만 국왕의 친아들인 무함마드 빈 살만이 왕세자가 됐다. 사우디 역사상 처음으로 국왕의 아들이 왕위 계승 예정자가 된 것이다. 무함마드 빈 살만은 2015년 부왕이 즉위하면서 국방장관을 물려받았다가 2017년 6월 마침내 왕위 계승자인 왕세자가 됐다. 과정은 복잡하고 잔혹했다. 왕세자가 되는 과정에서 삼촌인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와 사촌인 무함마드 빈 나예프를 쳐낸 것이 하나다. 여기에 더해 왕실 내부의 쟁쟁한 인물들의 견제를 이겨내야 했다. 바로 무함마드 빈 살만의 사촌들이다.

파이살 국왕의 아들인 칼리드 빈 파이살(80세·1940년~)은 이슬람 성지인 메카의 주지사(2007~2013년)를 맡았다가 교육장관(2013~2015년)을 거쳐 2015년 다시 메카 주지사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일찌감치 탈락했다. 이유는 베일에 쌓였다. 파이살 국왕의 또 다른 아들인 사우드 빈 파이살(1940~2015년)은 왕국의 최장수 외교장관(1975~2015년)을 지냈지만 2015년 세상을 떠났다.

압둘라 국왕의 아들인 무타이브 빈 압둘라(68세·1952년~)는 사우디의 왕실을 보위하는 국가경비대장(2010~2013년)을 거쳐 국가경비장관(2013~2017년)을 맡았지만 무함마드 빈 살만이 왕위 승계자가 되면서 자리를 잃었다. 압둘라 국왕의 또 다른 아들인 투르키 빈 압둘라49세·1971년~)는 수도인 리야드의 주지사(2014~2015년)를 지냈지만 밀려났다.

살만 국왕의 동복형제로 왕세제로 있다 세상을 떠난 술탄 빈 압둘아지즈의 아들인 반다르 빈 술탄(71세·1949년~)은 가장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22년간 최장수 주미대사(1983~2005년)을 지내다 워싱턴에서 돌아온 뒤 국가안보실장(2005~2015년)을 맡았으며 잠시 국가정보원장(2012~2014년)을 겸직하기도 했다. 외교·안보·정보를 움켜쥔 인물이어서 왕위 계승에 유리하다는 관측도 있었다. 하지만 반다르는 영국 방산업체인 BAE 시스템스로부터 10억 10억 달러 이상의 리베이트를 받은 혐의로 공직에서 완전히 배제됐다. 사우디 왕실의 뇌물 수수는 이미 오랜 관습이라 이를 빌미로 공직에서 밀어낸 것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는 분석도 있다.

무함마드 빈 살만은 친형제도 경력이 화려하다. 서방에서는 무함마드 빈 살만을 줄여서 MBS로 쓰기도 하지만 단순하게 ‘빈 살만’으로만 쓰기도 한다. 하지만 사우디 왕실에 빈 살만은 한둘이 아니다. 무함마드 빈 살만의 형제들은 사실 모두 ‘빈 살만’이기 때문이다. 아랍어 명법에서 ‘빈 살만’은 ‘살만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반 압둘아지즈’는 ‘압둘아이즈의 아들’이라는 의미다. 무함마드 빈 살만의 형인 술탄 빈 살만(64세·1956년~)은 조종사로 공군 대령이다. 그는 사우디에서는 물론 전 아랍권, 전이슬람권에서 명성이 자자하다. 1985년 미국 우주연락선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우주를 비행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왕족·아랍인·무슬림의 제1호 우주비행사다. 하지만 이런 명성이 왕실에서의 지위를 보장해주지는 못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의 또 다른 형인 압둘아지즈 빈 살만(60세·1960년~)은 에너지 담당 국무장관을 거쳐 2019년 9월 8일 석유 장관을 맡았다. 전 세계 에너지 분야에서 막강한 힘을 가진 이 자리를 왕족이 맡기는 처음이다. 석유 자원을 무함마드 빈 살만이 형제를 통해 직접 챙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인사다. 또 다른 형제인 파이살 빈 살만(50·1970년~)은 2013년부터 이슬람의 또다른 성지인 메디나의 주지사를 맡고 있다. 왕세자에서 밀려난 무크린 빈 압둘아지즈의 아들 투르키 빈 무크린(47·1973년~)은 사우디 항공스포츠협회장을 맡고 있다. 권력에서 밀려난 자리다. 또 다른 아들인 만수르 빈 무크린(1974~2017년)은 사업가로 일하다 2017년 11월 4일 의문의 헬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이런 배경 속에서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성공적인 왕위 승계를 위해 경쟁 왕족을 견제하면서, 유가 통제에 방해가 되는 러시아와 치킨 게임에 들어간 셈이다. 사우디와 무함마드 빈 살만이 이런 상황을 극복하고 목적을 이룰 수 있을지 전 세계가 주목한다.

-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 기자 ciimccp@joongang.co.kr

※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1526호 (2020.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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