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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값 발목’에서 벗어난 그의 선택“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아 보이는 건 맞아요. ‘네가 뭔데’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도 ‘그러게요. 내가 뭐라고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라고 자문했어요. 그런데 한편으로 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 지금이지. (다들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기회가 왔잖아! 껍데기로 일하는 직업이라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 없는 게 늘 속상했어요.”한혜진의 껍데기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키가 줄어드는 게 소원이었던 초등학생 한혜진은 수업 종료를 알리는 벨소리가 싫었다. 키재기를 하기 위해 남자 아이들이 교실 앞에 매일 줄을 섰다. 이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는 수업시간이 그에겐 안전한 도피처였다.평균은 이중성을 내포한다. 우리는 지극히 평균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고 평균에서 벗어난 삶도 두려워한다. “우리 아이가 너무 평범해질까봐 걱정이에요.” 특별한 삶을 살았던 한 배우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에게 평범함은 수월성과 유능함의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다. 실패의 표징이며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지루한 현실이다. 그의 솔직한 두려움을 이해할 수 있다. 평균적인 사람은 투명인간이기 때문이다.이렇듯 무색무취의 평균 인간이 되는 것을 경계하지만, 동시에 평균에서 멀어지는 것도 두렵다. 어린 시절의 한혜진처럼 말이다. 평균에서 한참 이탈한 자신의 모습은 수치심과 불안의 원천이다. 나의 생김새,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좋아하는 활동 등 나의 특성들이 보편성과 일반성을 보장받을 때 비로소 안도감을 느낀다. ‘평균에 속함’은 나를 받쳐주는 안전망이자 내가 사회집단 구성원으로서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인증이다.이래저래 우리의 삶은 평균에 닻을 내리고 있다. 이 사회적 압력을 대하는 나의 자세와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일까? “남들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마!” 유효하지만 적정 수준으로 활용해야 할 충고다. 뼛속까지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남들의 시선 따위’로 시작하는 조언은 공염불일 때가 많다. 평균의 압력을 인정하면서도 그 실체를 꿰뚫는 안목이 필요하다. 평균은 옳음이 아니다. 숫자로 밀어붙인 합의에 불과하다. 시대와 영역(domain)에 종속된 사회적 구성물(social construct)일 뿐이다. 따라서 시대가 달라지고 장면이 전환되면 절대선으로 군림하던 평균값이 조정된다.내가 노는 판을 다시 짜면 새로운 평균이 등장한다. 나의 독특함을 다른 관점으로 재평가해 줄 새로운 맥락을 ‘선택’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한혜진의 선택은 자신의 ‘이상함’을 공유하는 집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1999년 SBS 슈퍼모델 선발대회에 지원한 그는 운 좋게도 딴 세상과 마주쳤다. 그곳은 그토록 소원하던 평범함을 보장해주는 곳이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큰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곳에 나 같은 사람이 200명이나 있는 거예요. 처음으로 깨달았어요.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일 수도 있겠다고. 너무 행복했죠. 일부러 홀을 왔다갔다 했어요. 아무도 나를 쳐다보지도, 놀리지도 않았거든요.”
“내가 염두에 둔 그 평균이 과연 절대선일까”괴롭기만 했던 나의 ‘이탈(deviation)’이 평범함을 넘어 강점으로 대접받는 장면을 발견한 그는 행운아다. 그런데 이 행운을 붙잡은 것은 그의 ‘선택’이다. 나를 괴롭히는 평균값에 영원히 발목을 잡히고 있다고 느낀다면 다시 따져볼 일이다. 극강의 외향성을 발휘해야 하는 세일즈 집단에서 나의 내향성은 취약점이지만 다른 영역에서는 보배가 될 수 있다. 규칙적인 인간들로 가득한 조직에서 자유로운 나의 영혼을 탓하기 전에 나의 융통성과 창의성이 힘을 발휘할 영역이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고민할 수 있다.새 판에서 한혜진은 다른 모델들과 구별되는 자신의 특출함을 불편해하지 않았다. 남다른 키가 부끄러웠던 소녀에서 남들이 한 번도 가지 않았던 길을 만드는 개척자로 성장했다. 주요 패션잡지의 표지와 세계 4대 패션위크를 섭렵하면서 자신의 이름 앞에 ‘한국인·동양인 최초’ 타이틀을 수없이 달았다. 디지털 런웨이는 평균으로부터의 이탈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내가 노는 판을 바꿀 수 없을 땐 ‘마음의 새 판’을 짠다. 그의 100벌 챌린지가 제공한 통찰이다. 물리적 맥락을 바꿀 수 없을 때도 새 관점을 선택하는 행위는 여전히 가능하다.“네가 뭔데 그걸 하느냐”는 말은 모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평균적 인식을 드러내는 조언이다. 굳이 그렇게 힘든 일을 벌일 필요가 있겠냐는 최측근의 애정 어린 걱정일 것이다. 하지만 한혜진은 100벌 챌린지를 통해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로 일하는 것도 모델의 일이라고 선언하며 자신의 역할 정체성을 과감하게 수정했다.혹시 자신에게 이 말을 반복하고 있는가? “내가 뭐라고… 튀지 말자.” 평균 이탈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인생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가끔씩 점검해보자. 내가 어떤 ‘마음의 판’에서 놀고 있는지. 내가 염두에 둔 그 평균이 과연 절대선인지.※ 필자는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을, 연세대에서 심리학(박사·학사)을 전공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아메리카 온라인(AOL) 수석 QA 엔지니어, 넷스케이프(Netscape) QA 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연세대에서 사회와 인간행동을 강의하고 유튜브 ‘한입심리학’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