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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호적수(7) 김상헌과 최명길] 김상헌과 최명길이 ‘호적수’가 되지 못한 까닭 

 

서로의 신념 인정하지 않고 극단적 대립… 국정에 악영향 끼쳐

▎1636년 병자호란에서 남한산성에 갇힌 조선의 47일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 중 한 장면.
정적(政敵)이지만 ‘적’이라고 부르기에 남다른 사람들이 있다. 남인의 영수와 서인의 영수로서 치열하게 경쟁했으되 서로를 존중했던 류성룡과 윤두수, 대동법 시행을 두고 격렬하게 대립했지만 사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한 김육과 김집이 여기에 해당한다. 야사에 전해지는 이야기라 신빙성은 덜하지만, 중병에 걸린 송시열이 정적 허목에게 진단을 부탁했고, 허목이 극약 성분으로 가득한 처방전을 지어 줬음에도 그를 믿고 약을 먹어 병에서 나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비록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상대방의 수준과 실력을 신뢰한 것이다.

그런데 이번 화에서 소개할 두 사람은 다소 아쉬움을 남긴다. 1636년(인조 14년) 12월, 조선으로 가보자.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 한양으로 물밀 듯이 밀려왔고 조선군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강화도로 가는 길이 끊긴 인조는 조정 대신들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籠城)을 시작했다. 멸망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욕을 감내하고 항복하여 나라와 백성을 지킬 것인가. 조선은 척화(斥和)와 주화(主和)로 나뉘어 정면충돌한다. 이때 양측을 대표했던 인물이 바로 김상헌과 최명길이다.

김상헌과 최명길, 척화와 주화로 정면충돌

두 사람의 대립은 단순한 정쟁이 아니다. 의(義)와 의(義)의 대결이고, 신념과 신념의 다툼이었다. 즉,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고 사악한 오랑캐로부터 문명 질서를 수호해야 한다는 ‘의’와 나라가 멸망하지 않도록 지켜내고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가 우선순위를 놓고 맞부딪힌 것이다.

김상헌은 “자고로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으니, 죽고 망하는 것은 인내할 수 있어도 역(逆)을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도리를 거스르면[逆] 살더라도 죽은 것만 못하다. 설령 나라가 망하더라도 지켜야 할 가치와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최명길은 “우리나라를 지켜 보전할 생각은 하지 않고 명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하니, 이는 필부(평범한 개인)가 절개를 지키겠다며 개울에 빠져 죽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조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조선의 종묘사직이고 조선의 백성이다. 명나라와 의리를 지키겠다며 이에 대한 책임을 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두 사람의 논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이후 역사적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굳이 여기서 반복하지 않는다. 누구의 주장이 옳은가, 그른가도 주제가 아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상대방을 대하는 두 사람의 태도다.

김상헌은 최명길을 상종하지 못할 간신으로 대했다. 대의를 무너뜨리고 윤리를 거스르며 왕과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적이라고 생각했다. 최명길도 마찬가지다. 김상헌이 나라의 존망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명예만 생각하며, 명나라 황제만 위한다고 비판했다. 김상헌이 자결을 시도한 일에 대해서도 “그가 목을 매어 자결하려 했다지만 그때 옆에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러고도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한마디로 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척화파와 주화파의 수장이 서로에 대해 최소한의 존중하는 마음도 없다 보니, 어떤 합의를 끌어내기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신하들 간에도 봉합할 수 없는 갈등의 상처가 남게 된다.

물론, 이 상태가 끝까지 가지는 않았다. 1642년(인조 20년), 청나라 몰래 명나라와 접촉한 책임을 지고 최명길이 청나라 수도 심양으로 압송되어 감옥에 갇혔다. 마침 척화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김상헌도 이곳에 투옥되어 있었다. 언제 죽을지도 모를 상황에 놓인 두 정치가는 각자의 속마음을 진솔하게 토로했고, 그제야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었다고 한다. 최명길이 “끓는 물과 얼음 모두 물이고 가죽옷과 갈옷 모두 옷”이라며 자신은 권도(權道, 원칙을 지킬 수 없을 때 사용하는 임시변통의 방법)를 행했을 뿐이라 말하고, 김상헌이 “권도는 현인도 잘못 사용할 수 있으니 이치 밝은 선비여 저울질을 신중히 하시라”며 이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등 여전히 좁힐 수 없는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긴 했다. 그러나 김상헌은 최명길의 주화가 진정으로 조선을 생각한 고심에 찬 결정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최명길도 김상헌의 올곧은 신념과 흔들림 없는 절개에 감탄했다는 것이다. 이때의 일에 대해 김상헌은 이런 시를 남겼다. “양대에 걸쳐 나누었던 교분을 다시 찾았고 평생의 의심을 몽땅 풀어버렸네 …… 머리가 다 희어서야 청나라 감옥에서 만나 함께 시를 논하는구려.”([청음집], ‘설교후집’)

공통분모가 있었지만 경쟁하고 대립

사람들은 이 장면을 감동적으로 평가한다. 신념을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던 두 사람이, 누구보다도 극렬하게 대립했던 두 거인이 서로를 이해하고 화해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장면은 매우 아쉽기도 하다. 만약 두 사람이 좀 더 일찍 서로를 이해하고 신뢰했었다면 어땠을까? 타협했어야 했다거나 각자의 신념을 굽혔어야 했다는 뜻이 아니다. 생각과 방법은 다르지만, 상대방 역시 나라를 위한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믿었다면, 여전히 상대의 주장이 잘못됐고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그 주장을 경청하고 존중했다면, 그래서 심양의 감옥에서처럼 진솔하게 대화했다면. 합의점은 기대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각자의 주장을 더 나은 방향으로 보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병자호란이야 경황없이 맞닥트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자. 적어도 전쟁이 끝난 후, 조선 조정의 양상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흔히 김상헌과 최명길을 ‘적수’, 혹은 ‘라이벌’이라고 부른다. 두 사람은 모두 서인이고 김장생의 문하이며, 김상헌이 윤근수의 제자, 최명길이 윤근수의 재전제자(제자의 제자)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인조 대에 재상급 관직을 지내는 등 품계도 비슷했다. 그러면서 김상헌은 인조 대의 산림(山林) 세력을 대표하고 최명길은 공신(功臣) 세력을 대표한다. 김상헌은 경도(經道, 유교의 보편 도덕윤리)를 강조하고 척화를 주장했으며 최명길은 권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주화 노선을 걸었다. 공통분모가 있으면서도 경쟁하고 대립했던 적수라는 것이다.

그런데 서두에 언급했다시피, 두 사람에게 ‘호(好)’자를 붙여 호적수라고 부르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정말로 좋은 적수가 되기 위해서는 상대를 이해해야 한다. 노선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지만, 서로의 신념을 존중해야 한다. 나와 겨룰만한 수준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제대로 싸울 수 있고, 나를 보완하여 성장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상대방을 무조건 비난하고, 무조건 반대하고, 무조건 부정한다면 그것이 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56호 (2020.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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