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임상 결과 중증환자 치료효과·안전성 검증돼… “계열사 정리를 통해 바이오제약 기업으로 재정비할 것”
▎ 사진:김현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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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치매 치료법은 뇌에 생기는 찌꺼기(아밀로이드베타)를 없애는 데 주력했다. 이 찌꺼기가 치매의 원인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최근 연구개발은 환자에게서 아예 찌꺼기가 생기지 않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치매가 발생하는 원인이 한두 가지가 아닌 탓이다. 원래는 항암제로 개발했던 GV1001이 항염·항산화와 세포보호 효과가 큰 것이 밝혀지면서 알츠하이머 치료제로 개발 중이다.
GV1001, 알츠하이머병 질병조절제로 평가
▎ 사진:김현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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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치료의 가능성을 높인 GV1001을 개발한 회사는 국내 바이오기업 ‘젬백스앤카엘’이다. 의사 출신으로 10년 넘게 알츠하이머병 신약 개발에 몰두하는 김상재 젬백스앤카엘 회장을 12월 1일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 사옥에서 만났다. 김 회장은 “지난달 발표한 알츠하이머병 2상 임상시험 결과가 좋게 나왔다”며 “DFx 코리아 포럼에서 전문가들이 5년 내에 신약이 개발될 거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우리가 그 기간을 더 단축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2년 간 진행한 GV1001의 알츠하이머병 2상 임상시험 결과를 최근 공개했다. 의미 있는 결과를 소개하자면.“가장 보편적으로 쓰이는 1차 평가지표인 중증장애점수(SIB)가 대조군보다 7.1점 가량 높았다. 점수가 높을수록 장애 정도가 작다는 의미다. 중등도 이상의 알츠하이머병 환자에 대한 임상 시험 중 이 같은 호전을 보인 연구는 지금껏 없었다. 이외에도 일상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하는 척도(ADCS-ADL) 등 2차 지표에서 SIB 결과와 유사한 경향성을 보였다. 인지기능의 호전이 확인된 동시에 옷 입기나 불끄기 등 환자의 일상적인 생활능력이 향상돼 환자 상태가 전반적으로 좋아졌다는 결과다.”
현재 처방되는 약물과 GV1001의 차별점은.“기존에 개발된 약제들은 대부분 초기 단계 환자들에게만 집중됐다. 알츠하이머병이 이미 상당히 진행된 상황인 중등도 환자들에게 쓸 수 있는 약은 아직까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2상보다 환자 수를 늘린 3상 임상시험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GV1001의 차별점은 효과성 뿐만 아니라 안전성에서도 확인된다. 기존 치료제들에서 나오는 부작용이 거의 없다는 점이 이번 임상시험을 통해 밝혀졌다.”
현재 알츠하이머병에 처방되는 약물은 모두 증상을 경감시킬 뿐 근본적인 치료법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GV1001도 마찬가지인가.“GV1001은 증상완화제가 아니라 근본적인 질병을 치료하는 질병조절제다. 세계알츠하이머협회가 발간한 학술지에 게재된 ‘2020년 현재 개발 중인 알츠하이머 신약에 대한 분석’ 논문에서도 GV1001을 질병조절제로 분류했다.”현재 치매 치료제 후보로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약물은 미국 바이오젠의 ‘아두카누맙’이다. 아두카누맙은 알츠하이머 환자의 뇌에 있는 아밀로이드베타를 타깃으로 하는 항체다. 알츠하이머 치료제 개발에서 3상 임상에 도전했던 유일한 후보 물질로 주목 받았지만 지난해 실패로 끝났다. 이후 연구를 재개했지만 유효성이 부족해 최근에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유효성이란 효과를 의미한다.
GV1001은 아두카누맙과 어떻게 다른가.“아직 알츠하이머병의 발병 원인 자체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은 상태에서 대부분의 약물이 아밀로이드베타 또는 타우 단백질을 타깃으로 접근하고 있다. 아밀로이드와 타우 단백질이 병을 일으켰던 주요 인자로 알려진 것은 맞지만 이에 대한 의문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자 새로운 치료 타깃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번 디멘시아포럼 엑스에서 알츠하이머병의 세계적인 석학인 필립 셸튼 교수도 복합기전을 가진 약물 개발이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런 면에서 GV1001은 다양한 복합기전을 가진 약물이다. 당초 항암제로 개발했지만 전립선비대증, 알츠하이머 등에서도 효과가 입증되고 있다.”
연내 알츠하이머병 국내 3상 임상시험에 돌입할 계획을 밝혔다. 미국 2상 임상시험은 코로나19로 미뤄진 상태인데.“이달 중 국내 3상 임상시험의 허가(IND)를 제출할 예정이다. 실제 환자의 모집은 내년 상반기부터 이루어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미국 임상 역시 이미 허가를 받은 상태라 내년 상반기 중 중등도 알츠하이머병 환자를 대상으로 임상시험에 착수할 계획이다. 코로나19로 미국 2상이 미뤄진 것은 오히려 기회가 됐다. 지연된 기간 동안 국내에서 실시한 2상 임상시험의 결과가 경도인지장애나 초기 치매에 평가에서 이용되는 여러 가지 척도가 호전되는 경향성을 보이는 것을 밝혀냈다. 이를 높이 평가한 FDA의 권고에 따라 내년에 미국 및 유럽에서 경도인지장애 및 경증 환자까지 대상을 확대한 임상시험을 신청할 계획이다.”GV1001을 처음으로 개발한 ‘젬백스AS’는 원래 노르웨이에 있는 세계적인 항암백신 회사였다. 덴마크 생명공학 회사가 대주주로 있던 이 회사는 영국 왕립암협회가 아무런 대가 없이 연구비를 지원할 정도로 기술력을 입증 받은 기업이었다. 김상재 회장이 젬백스와 인연이 닿은 계기는 2003년 간암 판정을 받은 어머니의 치료제를 찾으면서다. 이전까지 줄기세포 추출·보관회사를 운영하던 김 회장은 줄기세포 배양을 위한 공기필터를 찾다가 반도체 공정용 필터를 만드는 카엘환경연구소를 인수한 상태였다.김 회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세상을 떠났지만 젬백스의 항암백신 기술을 일찌감치 눈여겨 본 그는 신약의 한국 판권이라도 사고 싶어 젬백스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젬백스는 한국의 작은 바이오회사에게 좀처럼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뜻밖에도 2008년 유럽에 불어닥친 경제위기가 기회가 됐다. 자금난에 몰린 젬백스가 급매물로 나온 것. 김 회장이 젬백스의 지분 100%를 인수하는데 든 비용은 1000만 달러(약 110억원)였다.
텔로머라제 효소 억제로 암세포 증식 막아김 회장이 젬백스를 인수한 다음 해인 2009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는 인간 염색체 끝 부분에 있는 텔로미어(telomere)가 어떻게 생성되고, 무슨 기능을 하는지 밝혀낸 공로를 세운 세 명의 교수였다. 염색체 끝에 모자처럼 붙어서 유전자 손상을 막는 역할을 하는 텔로미어는 세포가 분열할수록 길이가 점점 짧아진다. 텔로미어의 길이를 보면 세포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어 과학자들은 텔로미어를 ‘생체 시계’에 비유한다. 세포가 더 이상 분열할 수 없을 정도의 노화 단계에 접어들면 텔로미어는 점점 더 짧아지다가 결국 소멸한다.그런데 암세포의 경우엔 분열을 아무리 해도 그 길이가 줄어들지 않는다. 암세포에 든 텔로머라제(telomerase)라는 효소가 원인이다. 이 효소의 기능을 억제하면 텔로미어 길이가 정상적으로 줄어드는데, 이는 암세포의 증식을 막을 수 있다는 뜻이다. 바로 이 같은 작용원리를 이용해 항암백신을 개발한 회사가 젬백스였다.2009년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발표된 후 덴마크 회사의 주주들은 경영진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유전(油田)보다 무궁무진한 가치를 지닌 바이오기업을 헐값에 팔아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끼쳤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차라리 북해의 유전을 내주는 게 나을 뻔 했다”는 성토가 이어졌다.노르웨이를 떠난 GV1001이 그렇게 젬백스앤카엘의 품에 안겼지만 신약 개발의 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인수 당시 GV1001은 췌장암 치료제로 영국에서 1062명의 췌장암 환자를 대상으로 한 대규모 3상 임상시험 중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GV1001의 성공은 기정사실인 듯 보였다. 그러나 생존률에 있어서 GV1001을 투여한 군과 그렇지 않은 군 사이에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차이를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실패로 끝났다. 지난 8월에는 리아백스주(GV1001의 췌장암 치료제 상품명)의 조건부 품목허가가 취소되기도 했다.
2013년 영국에서의 췌장암 치료제 3상 임상시험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는데.“결과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임상시험 중에 의사들로부터 GV1001을 투여한 환자들이 각종 염증 반응이 억제되고 면역력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항암제 투여 후 생기는 부작용이 감소하는 효과도 있었다. 그래서 2012년부터 실제로 여러 가지 염증성 질환, 면역매개질환에 대한 GV1001의 기전을 확인하고자 국내외 연구진과 협업해 60여 건의 전임상 연구를 병행했다. 수많은 시도를 한 끝에 중요한 단서를 찾아낼 수 있었다. 이번에 종료된 한국에서의 3상 임상시험에선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생존률 차이를 보일 것으로 기대한다. 최종결과가 이달 중에 나온다. 기대해도 좋다.”
리아백스주의 조건부 품목허가가 취소된 데 대한 입장은.“리아백스주가 췌장암에 효과가 없어서가 아니라 조건부 허가의 조건이었던 3상 최종 임상시험 성적서 등을 정해진 기간 내 제출하지 못해 품목허가가 취소된 것이다. 췌장암은 다른 암 질환에 비해 발병률이 매우 적은 데다 임상시험의 환자 모집 요건을 충족하는 환자가 적어 임상시험 기간이 지연됐다. 임상시험 중 실시된 중간분석에도 오류가 있었다. 현재 소송 등을 통해 불합리한 조건부 허가 취소에 대한 이의제기를 하고 있다. 올해 안에 최종임상시험결과 보고서를 완성하고 법과 규정 안에서 신약 품목허가 신청을 진행할 예정이다.”
‘제약의 역사’는 곧 ‘실패의 역사’… “결실 머지않아”신약 개발은 10년 이상 1조원을 투자해도 10개 중 한 개 정도만 성공하는 고위험 사업이다. 천문학적인 연구·개발(R&D) 비용도 무시할 수 없다. 젬백스앤카엘이 제약과 반도체 필터 제조업 외에도 건축·인테리어·에너지 등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면서 자본을 모으는 이유다. 김 회장은 “그간 M&A를 통해 인수한 회사들에서 수익이 나고 자산가치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바이오와 무관한 사업을 벌인다는 지적도 있다.“신약 개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이 될만한 것은 다 했다. 그동안 바이오와 관련 없는 회사를 인수한 것도 신약 개발을 계속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다행히 대부분의 사업에서 성과가 난 덕분에 R&D를 지속하는데 도움을 받고 있다. 더 이상 다른 사업군으로 확대할 계획은 없다. 이번 연말을 기점으로 바이오사업 외 계열사 정리를 통해 바이오제약 기업으로 재정비할 것이다. 매각 비용은 글로벌 임상시험 비용에 투자할 계획이다.”
신약 개발에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드나.“현재까지 약 4000억원을 신약 개발 비용으로 썼다. 여기에는 약 60여건의 국내외 각 대학이나 연구기관의 위탁연구비, 특허 출원 및 유지비, 적응증별 임상시험 비용 등이 포함된다. 신약 개발하는 과정에서 돈이 없어 망하는 회사는 있어도 기술이 없어 망하는 회사는 없다고 생각한다. 바이오사업, 특히 신약 개발은 일반 제조업과 다르다. 최소 20년 이상의 세월을 필요로 한다. 제약의 역사는 곧 실패의 역사다. 실패와 재도전 없이 한 번에 만들어지는 신약은 없다. 그런데 국내에선 특히 임상시험의 중간 결과만 보고 실패를 운운한다.”젬백스앤카엘은 지난 8월 미국·유럽 지역에서 바이오·제약산업 분야 투자 전문가로 활약해 온 요겐 윈로스를 해외 투자 IR 담당 사장으로 영입했다. 요겐 사장은 스웨덴 파마시아와 오르판비오비트룸AB(Sobi), 영국 아스트라 제네카에서 투자 담당자로 뉴욕 상장 및 미국 내 주주 기반을 확대하며 회사 가치를 극대화시킨 글로벌 바이오 투자 전문가다. 젬백스앤카엘은 요겐 사장을 중심으로 해외 IR과 홍보·투자를 적극 늘릴 계획이다.
해외 투자 지분 확대에 공을 들이는 배경은.“젬백스를 인수한 후 매년 미국에 투자설명회(IR)를 가는데 10년 넘게 같은 펀드투자가가 담당을 한다. 알츠하이머병에 대한 대규모 글로벌 임상을 위해서는 글로벌 롱펀드의 장기적인 투자 유치가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지난해부터 해외 투자 지분을 늘리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고, 올해는 요겐 사장을 영입해 본격화했다. 최근 알츠하이머병 2상 임상시험 결과에 대한 해외 투자자들의 문의가 이어지면서 장기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IR도 계획하고 있다. 현재 장기간 젬백스와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미국과 유럽 진출에 도움을 줄 곳과 긴밀히 협의 중이다.”
신약 개발에 대한 확신은 어디에서 오나.“신약 개발 기업의 힘은 결국 특허와 연구 결과, 즉 발간 논문이라고 생각한다. 젬백스는 GV1001에 관한 특허를 포함해 총 250여건의 국내외 특허를 가지고 있고, 지금도 위탁연구를 통해 새로운 특허를 출원 중이다. 또 현재까지 GV1001을 주제로 한 논문 100여 편이 SCI급 학술지에 게재됐다. 이러한 펀더멘탈이 바이오 기업을 지속시키는 가장 큰 힘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회사를 인수한지 갓 10년이 지났을 뿐이고, 그간 이뤄진 임상시험 결과를 토대로 했을 때 결실을 볼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나 역시 한때는 ‘원샷 원킬’을 꿈꿨다. 그런데 신약 개발을 위해선 제때 여러 발의 총을 쏘는 게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제 장전은 끝났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