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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호적수(14) 하륜과 정도전] 역사는 보수(하륜) 아닌 혁명(정도전)을 택했다 

 

하륜과 정도전, 출신 성분부터 학문 성향까지 비슷… 성향의 차이가 역사적인 평가 갈라

▎화가 권오창이 그린 정도전 표준영정.
몇 년 전, 어느 사극을 통해 ‘인생은 하륜처럼’이라는 말이 유행했다. 하륜(河崙, 1347~1416)은 여말선초라는 정치적 혼돈 속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인물이다. 태종의 핵심참모로 일등공신에 책봉됐고 12년간 재상에 재임하며 부귀영화를 누렸다. 태종의 대대적인 공신 숙청 때도 무사했다. 그러니 그 처세술을 닮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대 최고 지식인 이인복이 인정할 정도로 재주 좋았던 하륜

하륜이 처세에 뛰어나고 책략에 능했다는 것, 물론 사실이다. 하지만 여러 드라마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모사꾼’에 불과한 인물은 아니다. 그는 실각한 정도전을 대신하여 건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조선왕조의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이후 조선의 근간이 된 정치·경제·사회제도의 상당수가 하륜의 손에서 정비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성리학의 핵심주제인 ‘심성(心性)’에 관해 깊이 있는 논설을 남기고, 이를 토대로 체계적인 정치사상을 제시했을 정도로 뛰어난 학자이기도 했다. 하륜이 과거에 급제할 당시, 좌주(座主, 시험책임관)이자 당대 최고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던 이인복이 그의 재주에 감탄하며 조카사위로 삼았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하륜은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관직 생활 초기부터 출세가도를 달렸다. 1379년(고려 우왕5) 성균관 대사성, 1384년 밀직제학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한데 1388년 권신 이인임이 몰락하면서 인척(이인임이 하륜의 처삼촌이다)이라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며, 이후에도 몇 차례 고초를 겪었다. 스승인 이색, 동문인 정몽주와 입장을 같이 하며 역성혁명에 반대하다가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고 세상이 바뀌자 그는 경기좌도관찰출척사에 임명하겠다는 조선 조정의 제안을 받아들인다(태조 2년 9월 13일). 이를 두고 권력의 양지만 찾는 인물이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말 그랬다면 적어도 이보다 일찍 전향했을 것이다. 대세순응적인 인물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그런데 조선에서의 관직 생활은 하륜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색 스쿨의 우등생이며 고려 때 이미 정계의 중심에 있었던 하륜, 뛰어난 능력과 지혜로 천하를 경영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던 그가 2선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조선 건국 작업에 참여하지 못한 탓이지만 그보다는 정도전이라는 거인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륜과 정도전은 캐릭터가 겹친다. 같은 스승(이색)에게서 배웠고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비전을 공유했으며 정몽주, 권근, 이숭인, 조준 등 난다 긴다 하는 신진사대부들이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학문이 높고 여러 방면에 능통했음은 말할 것도 없고 두 사람 모두 극심한 권력투쟁을 뚫고 자신의 주군을 보위에 올렸을 정도로 권모술수에 뛰어났다. 출신성분이 변변치 못했던 것도 비슷한데, 하륜이 주류사회에 편입되고 싶어 했다면 정도전은 세상을 뒤집음으로써 스스로 주류가 됐다고 할까? 하륜이 수동적이었다면 정도전은 능동적이었고, 하륜이 보수적이었다면 정도전은 혁명적이었다. 이와 같은 차이가 두 사람의 행보를 갈랐고 역사는 더 과감하게 도전한 정도전에게 기회를 주었다.

하륜은 불만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지식이나 역량도 정도전 못지않은데, 자기도 새로운 국가의 제도를 만들고 질서를 주도할 수 있는데 하며 열패감을 느꼈을 것이다. 정도전이 창업 주역이 되어 훨훨 날고 있는 마당에 자신은 지방의 도지사나 맡고 있다니. 그것도 새 왕조 탄생을 저지하려 들었던 전 왕조의 잔당이라는 감시의 눈초리와 함께.

초조해진 하륜은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해 승부수를 던진다. 태조가 계룡산으로 천도를 추진하자 해박한 풍수 이론을 설파하며 이를 중단시킨 것이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천도할 새로운 도읍지를 찾는 책임을 맡았다. 요즘에도 수도이전 이슈가 모든 사안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듯, 천도는 새로운 국가 질서를 수립하는 중대사였다. 각종 이익, 기득권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정치적으로도 첨예한 사안이다. 하륜이 이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것은 조정의 중심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명나라 외교분쟁 위기에서도 건재했던 정도전

하지만 하륜은 다시금 정도전에게 가로막힌다. 그는 여러 풍수 대가들을 논리로 압도하며 새 도읍지로 ‘무악’(毋岳, 지금의 연세대 부근. 조선 시대 기준으로 한양 밖임)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무악이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漕運)이 잘 통합니다.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이곳이 길지임을 증빙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전해오는 비기(記)들과도 대부분 부합하는 곳입니다.” 이에 대해 정도전은 “이곳이 나라 중앙에 위치하여 조운이 통하는 것은 좋으나 안타깝게도 협소하여 도읍으로 정할만한 자리가 못됩니다”라고 반대했다. 그러면서 “나라가 잘 다스려지느냐는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땅의 형세에 있지 않다”며 “술수가(術數家)의 말만 믿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서 술수가란 풍수지리 이론을 내세우는 하륜을 가리킨 것이다. 유학자인 하륜을 잡술이나 주장하는 사람으로 격하한 것이다. 결국 도읍은 정도전의 뜻에 따라 지금의 위치에 자리하게 된다.

이 사건 외에도 명나라와의 외교분쟁(표전문 사건, 명 태조 주원장이 정도전이 지은 표전문을 불손하다며 트집 잡은 것)으로 정도전이 곤경에 처하자 하륜이 이를 활용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자 했지만 역시 실패했다. 정도전은 건재했고, 오히려 하륜이 명나라로 가서 갖은 고생을 하며 뒷수습을 해야 했다. 정도전이 살아있는 한 자신에게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하륜은 방법을 바꾼다.

보위를 노리며 정도전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이방원과 손을 잡은 것이다. 그리하여 1398년(태조 7), 하륜은 “이제 다른 계책이 없고 마땅히 선수를 쳐서 저 무리를 없애는 것뿐입니다”라며 정도전 일파에 대한 선제공격을 주장하였고, 소위 ‘1차 왕자의 난’의 전략을 수립, 반란을 성공으로 이끈다. 그리고 1416년(태종 16) 70세의 나이로 은퇴할 때까지 권력의 실세이자 조정의 영수로서 조선을 이끌었다.

이러한 하륜이 정도전에게 맞수로 여겨졌을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한 수 아래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하륜에게 정도전은 반드시 넘어서야 할 적수였을 것이다. 부귀와 권력에 대한 욕망 때문이건 재상이 되어 나라를 경륜하겠다는 포부 때문이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노력했고 안주하지 않았다. 비록 폭력이라는 비정상적인 수단을 사용했고, 정도전이 구상한 조선의 크기를 협소화시켜놓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긴 하지만, 정도전이라는 적수가 존재한 덕분에 그가 강해진 것만은 분명하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70호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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