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2)] 마음 속 응어리를 풀어주는 대화의 힘 

 

질문하고 마음 알아주면, 상대방 분노를 녹일 수 있다

▎영화 [몰리스 게임]의 한 장면.
영화 [몰리스 게임(Molly’s game)]이 있다. 한때 미국 사교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지하 포커 세계의 여왕, 몰리 블름(Molly bloom)의 실제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아래 내용에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다.)

26세에 내로라하는 스타와 기업가들이 참여한 하루 판돈 400만 달러(44억여원) 규모의 포커 하우스를 운영했던 그녀는 나름 신중하게 처신했음에도 결국 범죄 혐의로 FBI의 수사를 받게 된다. 수사와 함께 하우스는 사라졌고, 그녀는 빈털터리가 됐을 뿐만 아니라 꼼짝없이 감옥에 갈 처지가 된다. 그녀가 힘겹게 소송을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버지가 찾아온다. 포커판에 발을 디디면서 보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는 심리학과 교수이자 유명한 심리치료사이다. “왜 왔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그의 아버지는 “아주 비싼 심리치료를 해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3년짜리 심리치료를 3분 만에 해주겠다”면서 세 개의 질문을 받겠다고 한다. 방금 자신에게 물었던 “왜 왔느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아버지가 “자, 두 번째 질문!”이라고 하자 기다렸다는 듯 몰리가 묻는다.

“좋은 남편이었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왜 묻는 거냐?”

“내 아버지가 몹쓸 인간이었다고 생각해서요.” 딸이 잔뜩 벼른 듯 ‘한 방’을 날렸는데 아버지는 뜬금없이 “축하한다”고 말한다.

“축하한다. 2년 차도 끝냈구나. 네 아버지는 교수 월급으로 자식 셋을 키웠다. 한 놈은 올림픽에서 2회 우승했고, 다른 놈은 종합병원 심장전문의. 마지막 놈은 수백만 달러짜리 사업을 하면서 능력을 썩혔지. 나도 몇 가지는 제대로 했다는 거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다.”

“가야 해요.”

“아니야. 반드시 물어야 해. 반드시 물어야 한다.”

그러자 한참을 뜸 들이던 몰리가 입을 뗀다.

“왜 저를 동생들만큼 좋아하지 않았어요?”

“나왔구나. 좋아했다. 때때로 그렇지 않게 보였을 뿐이지.”

“뻔한 소리. 사실 (제가) 버릇이 없긴 했죠. 말대꾸하고 규칙도 어기고 밤에 몰래 차를 몰고 나가 맥도날드를 들이받고…. .”

“네가 안다는 걸 알았으니까!”

“뭘요?”

“내가 바람을 피웠는데 다섯 살 난 몰리가 그걸 본 거야.”

“스무 살 때까지 몰랐어요.”

“(바람피우는 상대와) 차에 있는 날 봤지만 뭔지 몰랐던 거지. 넌 알고 있었어. 네가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내가 수치심에 그렇게 반응한 거다. 그래서 너도 날 경멸하는 반응을 보인 거고”

아버지의 질문에 딸은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던, 사실은 자신도 몰랐던 마음을 알게 되고 아버지 또한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토로한다. 덕분에 둘은 눈물로 화해한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피는 물보다 진하다지만 십 년 넘게 등 돌리고 살던 사이가 이렇게 빨리 화해할 수 있을까?

몰리 마음을 읽은 아버지의 대답 세 가지

심리치료 전문가인 아버지 말에 실마리가 있다. “축하한다. 2년 차도 끝냈구나”라는 말이 그렇고, 몰리가 “가야 한다”고 했을 때 “반드시 물어야 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한 것, 그리고 “왜 저를 동생들만큼 좋아하지 않았느냐”고 하자 “나왔구나” 하는 게 그것이다. 또 아버지가 이 말을 하게 한 몰리의 말에는 공통점이 있다. 꼭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베어도 베어도 계속 자라는 잡초를 완전히 제거하려면 땅속에 있는 뿌리를 뽑아야 하는데, 그녀가 질문을 통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마음의 응어리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를 어디론가 이끌고 간다. 예를 들어 어릴 적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억압 때문에 내상을 입은 사람은 성인이 된 후 그걸 자신도 모르게 분출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저 반대 의견을 개진하는 정도로 해도 되는데 심하다 싶을 정도로 어깃장을 놓거나 하며 자신을 절벽 가까이 몰고 간다. 무의식이 감정을 충동질하는 까닭이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 봐야할 건 몰리의 아버지가 했던 ‘원래는 3년짜리이지만 3분 만에 할 수 있는 아주 비싼 심리 치료법’이다. 원활한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부정적인 감정을 제거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3년 전이었을 것이다. 하루에 은행을 세 번이나 갔던 날이 있었다. 갈 때마다 서류가 하나씩 빠졌다고 하는 바람에 다음날 네 번째 방문까지 해야 했다. 은행원이 보완해야 할 서류를 한 번에 다 말했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한 번에 하나씩 말하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어 한 번만 더 그러면 참지 않을 작정이었다. 더구나 그날은 사람도 많아 한참을 기다린 끝에야 창구 앞에 앉을 수 있었는데, 서류를 죽 훑어보던 은행원이 세상에, 또 같은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뭐, 한 번 더 오라고?’ 더는 참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아니 참아서는 안 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 화는커녕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을 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것만 가져오면 되는 거죠?”

이유가 있었다. 그 은행원 때문이었다. “죄송합니다. 고객님. 몇 번씩 왔다 갔다 하라고 하니 짜증 나시죠? 아마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어쨌든 죄송하게 됐는데 이거 하나만 가져오시면 바로 해드리겠습니다. 번호표도 뽑지 마시고 바로 저에게 오세요. 제가 다 준비해 놓고 있다가 서류 가져오시면 5분 내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그 말에 혹한 나는 화를 내기는커녕 “감사하다”는 말까지 하면서 기분 좋게 서류를 가져다주었고 그 또한 곧바로 처리해주었다. 일을 끝내고 나오면서 생각하니 내가 왜 그랬는지 몰라 혼자 웃었다. 은행원이 내 마음을 알아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짜증 폭발 직전이라는 걸 알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번호표도 뽑지 말고 바로 오라는 ‘특혜’까지 주어서였을 것이다.

맞장구치며 상대방 존재를 인정

우리가 흔히 접하는 불만, 짜증, 두려움 등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 마음에 쌓이면 불이 돼 타오른다. 쌓일수록, 생각할수록 증폭되는 이런 감정들은 ‘전의’를 불타오르게 해 상대에게 불을 토해 내게 한다. 그렇게 상대를 태워버리려 하다 자신을 태워버리기도 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몰리의 아버지처럼 질문해주고 앞의 은행원이나 의사처럼 마음을 알아주면 마음속 불이 눈 녹듯 사라져버린다. 몰리가 그러했던 것처럼 누군가 알아주어 밖으로 나오면 아무리 강한 부정적인 감정이라도 대체로 해소된다. 고장 난 차가 치워지면 막혔던 길이 뚫리듯 말이다.

마음을 알아주는 힘은 이렇게 크다. 존재에 대한 위협과 달리 마음을 알아주는 건 존재를 인정한다는 의미다. 소통의 고수들이 가진 능력이기도 한데, 이들을 가만히 보면 질문도 잘하지만 맞장구를 참 잘 친다. 추임새처럼 맞장구를 치면 상대의 속에 있는 부정적인 감정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끌려 나오기 때문이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십을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그렇게 일하면 아무도 모릅니다][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583호 (2021.05.03)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