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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연구 | 드라마 작가로 산다는 것 - “작가도 드라마처럼 치열한 현실에 울고 웃어요” 

 

김슬기 월간중앙 기자 rookie@joongang.co.kr
한류 드라마 열풍의 또 다른 주역으로 각광… ‘쪽대본’과 시청률 경쟁 속에서도 시청자의 호응에 보람 느껴

▎한 회당 250매에 이르는 드라마 대본에는 작가들의 고민과 노력이 묻어있다. 역대 JTBC 드라마 대본들.




▎한류 드라마의 원조로 꼽히는 MBC 드라마 <대장금>은 ‘스타 드라마 작가’가 등장하는 신호탄을 쐈다. 장금이 역의 배우 이영애와 연출을 맡은 이병훈 감독이 대본을 살펴보고 있다.
“< 별에서 온 그대>를 쓴 박지은 작가에게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또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어준 감독님 이하 모든 스태프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의 여주인공 전지현이 5월 27일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을 수상한 자리에서 가장 먼저 감사의 뜻을 입에 올린 것은 연출자도 동료 연기자도 아닌 작가다. 작가의 얼굴은 시청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지만 그들의 이름과 작품을 기억하는 대중이 늘어간다.

작가는 더 이상 대중스타 뒤의 ‘고독한 그림자’가 아니다. 과거에는 출연 배우가 드라마의 성패를 좌우했다면, 이제는 극본을 쓴 작가의 파워가 성공을 좌우하는 시대가 도래했을 정도다. 바야흐로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중에는 스타 작가의 이름을 앞장세워 ‘누구의 드라마’라는 식의 홍보가 보편화될 정도다. ‘김수현표 드라마’, ‘임성한 드라마’ 등이 그렇다.

한류 드라마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이 드라마들의 성공을 이끄는 스타 작가가 늘면서 작가를 꿈꾸는 지망생들도 늘어난다. 서울에 거주하는 40대 주부 홍계란(41) 씨는 지난해부터 드라마 작가를 목표로 학원에 다니면서 공부한다. 그는 한 방송사가 운영하는 아카데미스쿨에서 ‘드라마 작가 수업’을 들으며 대본을 쓰고 있다. 6개월 과정에 100만원이 넘는 수업료를 내고 있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홍씨의 의지는 꽤나 확고해 보인다.

“집에서 드라마를 보다가 ‘나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대학 시절부터 남들에게 글 잘 쓴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라도 제 꿈을 찾아야겠다 싶었죠.”

홍씨가 수업을 듣는 아카데미스쿨에는 대학 졸업반 학생부터 직장인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작가의 꿈을 키워가고 있다. 수강생 중에는 십중팔구가 여성이 차지한다. 지방 소재의 한 방송국에서 FD(Floor Director)로 일한 경험이 있는 최현준(33) 씨는 “학원에서 전문적인 내용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로 집을 옮겼다”며 “나이, 성별을 불문하고 드라마 작가를 하려는 사람이 많아 경쟁이 치열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드라마 작가로 들어서는 길은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불투명하다. 방송국 직원 채용과정에서는 별도로 드라마 작가를 뽑지는 않는다. 방송사가 주관하는 드라마 극본 공모에 당선되거나 예능프로그램이나 영화 등 다른 분야에서 작가로 활동하다가 드라마 쪽으로 영역을 넓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다 보니 지망생들은 드라마 극본 공모에 목을 매고 있는 형편이다.


▎한국방송작가협회가 여는 드라마 작가 수업에서 수강생들의 토의시간. 드라마 작가 지망생들의 수업료는 60만~100만 원에 이른다.
KBS·SBS·MBC 등 각 방송사가 개최하는 극본 공모는 ‘신인 작가의 등용문’이라고 불린다. 극본 공모 수상을 하게 되면 방송사 관계자와 인맥을 쌓거나 제작사의 눈에 띄게 될 기회가 생기기 때문이다. 극본 공모는 드라마 콘텐트의 다양성을 넓히고 신인 작가를 육성한다는 취지로 매년 열린다. 보통 공모가 열릴 때마다 2만~2만5천 편의 작품이 몰리는데 그중 10편 남짓이 당선작에 이름을 올릴 뿐이다. 지망생들이 공모 당선을 ‘고시’라고 부르는 이유다.

바늘 구멍보다 좁은 신인작가 등용문

신인 작가 이강(24) 씨는 최근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은 이 과정을 통과한 행운아다. 2013년 KBS ‘TV드라마 단막극 극본 공모’에서 이씨의 <다르게 운다>가 최우수작으로 뽑혔고, 드라마로 제작되어 지난 6월 초에 방영됐다. KBS는 <드라마스페셜>을 통해 공모에 당선된 신인 작가들에게 방영 기회를 제공한다. 이 밖에도 수상 후 1년 동안 인턴십을 운영해 수상자들이 매달 드라마 작품을 발표할 자리를 마련해주고 있다. 수상자들이 쓴 대본을 현직 드라마 PD들이 검토하고 평가해 옥석을 가려내는 것이다.

이씨는 “대개의 극본 공모는 상을 받는 것으로 끝나지만, KBS의 경우는 신인 작가들에게 수상 이후에도 꾸준히 대본 쓸 기회를 줘서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공모를 통해 데뷔한 이들 신인 작가의 성공담은 수많은 작가 지망생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KBS 드라마국 고영탁 국장은 최근 열린 ‘KBS 드라마스페셜 단막 2014 극본공모당선작 시리즈’ 기자간담회에서 “<정도전>의 정현민 작가, <기황후>의 정경순 작가, <비밀>의 유보라 작가, <골든크로스>의 유현기 작가 등 많은 스타 작가가 극본 공모를 통해 데뷔했다”고 말한 바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작가 지망생들의 극본 공모 열기는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뜨겁다. 대부분의 작가 지망생은 “극본 공모에 당선되기까지는 5~10년의 시간을 투자한다”고 입을 모을 정도다. 오랫동안 극본 공모 당선을 준비한 사람이 많다 보니 ‘드라마 낭인’이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드라마 낭인’은 방송사 아카데미를 여러 군데 번갈아 가며 수업을 듣거나 극본 공모에 오랫동안 도전한 작가 지망생을 가리키는 말이다.

3~5년 동안 공모 준비만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이도 적지 않다.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작가 지망생은 “확실하게 작가가 될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공모 당선을 위해 쏟은 시간과 노력이 다른 분야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도전하는 사람만큼이나 포기하는 사람도 많다”고 설명했다.

오랜 기간 작가를 준비하다 다른 활로를 모색하는 이들 중에는 드라마 작가의 작업을 돕는 서브 작가도 많다. 서브 작가는 드라마 방영 전부터 종영까지 메인 작가의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한다. 2~6개월 정도 걸리는 드라마 한 작품의 제작기간 동안 드라마에 필요한 사전 취재와 자료조사를 해주는 역할을 한다. 드라마 씬(Scene)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내거나 메인 작가가 쓴 대본을 보면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제작사가 채용하거나 드라마 작가가 직접 서브 작가를 뽑는데 습작 실력이 좋은 지망생을 선호한다.

드라마 작가 준비를 시작한 지 10년이 넘었다는 이경미(가명·35) 씨가 그런 경우다. 이씨는 현직 드라마 작가의 일을 도우며 기획 단계에 있는 드라마의 사전 취재와 리서치 업무를 담당한다. 그는 “드라마 제작 과정 전반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만족스럽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직 작가가 일하는 모습을 보면서 배우는 것도 많고, 제 아이디어를 드라마에 반영할 기회도 있어 좋아요. 공모 수상을 위한 대본을 쓰는 것과 실제 드라마를 만드는 작업은 많이 다르기때문에, 필드에서 배운다는 마음가짐으로 일하고 있어요.”

“첫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될 수도”

일부 작가 지망생은 서브 작가 생활이 ‘양날의 칼’이라고도 한다. 필드에서 현직 작가에게 업무를 배울 수 있어 좋지만, 투자하는 시간과 노력에 비해 보상은 턱없이 적기 때문이다. 실제 서브 작가들은 드라마 제작 기간 동안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80만~120만 원 정도의 월급을 받는다고 알려졌다. 이씨 역시 100만원이 조금 넘는 월급을 받고 일한다. 한때는 수학 강사로 일했던 그가 이전에 받았던 월급에 비하면 턱없이 적은 금액이다.

“처음에 서브 작가 일을 할 때는 월급이 100만 원이 채 안 됐어요. ‘88만원세대가 바로 나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죠. 일부 서브 작가는 일이 고되고 ‘현직 작가에게 아이디어만 뺏긴다’는 생각에 중도에 포기하는 경우도 있죠.” 그런데도 서브 작가들이 현직 드라마 작가의 곁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현실적인 요인이 있다. 현직 작가 밑에서 오랜 기간 일한 뒤에 드라마 작가로 데뷔한 신인 작가의 성공 신화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서브 작가들 사이에서는 “모 작가 밑에서 일하면 확실하게 키워준다더라”, “서너 개의 작품을 함께 한 서브 작가는 무조건 데뷔시켜 준다더라” 등의 소문이 돈다. 드라마 작가로 데뷔할 수 있는 통로가 공모전 말고는 전무한 상황에서 현직 작가의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서브 작가로 일하는 박미란(가명·32) 씨는 “보조 작가로 일하다가 드라마 작가가 되는 게 흔치 않은 사례라는 걸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며 “대부분의 서브 작가는 현직 작가의 ‘오른팔’이 되어 작품 관련 일뿐만 아니라 잡무까지 해내면서 버티기를 계속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현직 드라마 작가는 “드라마 작가가 되는데는 인맥이 많이 작용하고, 누군가의 소개를 받는 게 중요하다 보니 서브 작가도 현직 드라마 작가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며 “극본 공모에 당선돼도 인맥이 없으면 작품을 맡을 수 없고, 서브 작가 생활을 하면서 기회를 잘 잡으면 작가가 될 수도 있는 게 이 바닥의 정서”라고 설명했다.

치열한 경쟁을 뚫은 드라마 작가에게도 고충은 따른다. 드라마 작가들 사이에서는 “첫 작품이 마지막 작품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익숙하다. 높은 시청률을 낸 드라마 작가일지라도 다음 드라마 방영을 기약할 수 없는 현실을 반영한 말이다.

드라마 작가들은 대게 외주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대본을 준비한다. 지상파방송에 방영되는 드라마의 70%가량이 외주 제작사를 통해 만들어지는데, 방송사 편성을 내줄 때까지 작가는 드라마의 사전 기획을 한다. 최소 6개월~1년 정도의 기간 동안 드라마 구성에 필요한 사전 취재와 인터뷰를 하고 3회분의 대본을 작성한다. 그러나 방송사 간 드라마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준비 중이던 드라마가 기획 단계에서 취소되는 일도 적지 않다. 최근 3년 사이에 세 편의 드라마 기획을 중단해야 했던 김은영(가명·41) 작가는 씁쓸한 심경을 토로했다.

“그동안 작가 생활을 해 오면서 몇 편의 흥행작도 냈던 만큼 제 작품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는데 적잖은 충격을 받았어요. 대본을 쓰면 바로 드라마화됐던 과거와 비교해보면 요즘 드라마 시장은 정말 녹록하지 않다는 걸 실감해요.”


▎스타 작가를 꿈꾸는 작가 지망생들은 현직 작가 밑에서 서브 작가로 일하며 드라마를 배우기도 한다. 2008년 열린 ‘서울 드라마 페스티벌 2008-김수현 작가 팬미팅’에서 김수현 작가가 예비 작가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하루 16시간 동안 앉아 대본 쓰는 작가들

신진 작가의 상황은 더욱 열악할 수밖에 없다. 기성 작가들도 편성을 받기 힘든 상황에서 신인에게 돌아오는 기회는 더욱 적다. MBC <앙큼한 돌싱녀>를 쓴 작가 이하나(39) 씨는 “신인 작가가 주요 방송국에서 편성을 받아내기란 하늘의 별 따기”라고 말했다. 이씨는 “각 방송사마다 대작들을 쏟아내며 시청률 경쟁을 하는 상황에서 흥행이 보장 안 되는 신인 작가에게 차기작을 믿고 맡기는 일은 흔치 않다”고 덧붙였다.

어찌어찌 해서 편성을 받았다고 할지라도 드라마가 종영되기 전까지 작가들은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다. 미리 써놓은 3회 분량의 대본이 드라마 첫 방영일 전에 촬영을 마치면 그 뒤로 매주 대본을 써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작가들은 이를 가리켜 ‘생방됐다’고 표현한다.

방영이 시작되면 바삐 돌아갈 게 뻔한데 작가들이 미리 대본을 써 놓지 못하는 까닭은 뭘까? 사전제작 시스템이 구축되지 못한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 때문이다. 드라마를 100% 사전에 제작하지 않고 시청자의 반응에 따라 극 내용에 변화를 주는 별스러운 제작 정서가 그것이다. 방송사 관계자들이 흔히 ‘시청자 호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방영 중에 시청자들이 끼어들 여지를 만들어줘야 시청률이 잘 나온다는 불문율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사전제작의 경우 제작비가 1.5배가량 많이 나온다는 방송사의 손익계산도 이를 부채질한다. 방송사는 통상적으로 방영일 두세 달을 앞두고 편성을 내주는데 그 이유는 사전제작이 일찍 진행될수록 비용이 더 많이 든다는 판단 때문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방송사 관계자는 “하루 드라마 촬영하는 것도 다 비용인데, 방영일까지 시간이 넉넉하게 있으면 아무래도 비용이 더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편성 직전까지 드라마 방영 여부를 확신할 수 없는 작가들은 1~6회 분량의 대본을 쓰는 데 그친다. 드라마 첫 방영 후 3주 정도를 촬영할 수 있는 대본을 미리 써 놓고, 나머지 대본은 드라마 방영과 맞춰 작성하는 것이다.

60분 미니시리즈를 기준으로 드라마 작가가 한 회에 쓰는 대본 분량은 대략 원고지 250매다. 작가들은 1주일 2회 방영에 맞춰 매주 500매의 대본을 쓰는 꼴이다. 드라마 방영 기간 동안 칩거나 다름없는 생활이 계속되는 이유다. 작가 서현용(가명·46) 씨는 “하루 16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서 대본을 쓰는데, 두세 시간 쪽잠을 자는 일이 다반사”라며 “대본 마감의 압박을 견디지 못해 작가가 도중에 펑크를 내고 잠적하는 일도 생긴다”고 전했다. 그는 “드라마가 방영되는 기간 내내 엄청난 중압감에 시달린 나머지 약을 복용하며 글을 쓰는 작가도 있다”고 귀띔한다.

이런 상황에서 드라마 후반부로 갈수록 작가들의 ‘쪽대본’이 발생하기도 한다. 쪽대본은 ‘바로 촬영할 장면의 대본’을 일컫는다. 제작 현장에 두세 장의 대본을 먼저 보낸 뒤, 드라마를 촬영하는 동안 작가가 나머지 대본을 써서 주는 상황이 벌어진다. 작가 이지선(가명·36) 씨는 “올해 상반기에 가장 히트한 모 방송국의 드라마도 마지막회에서 쪽대본 상황이 발생했다는 얘기를 건네 들었다”며 “국내 드라마 제작 환경에서는 쪽대본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드라마 제작 관계자나 출연 배우들은 ‘쪽대본’의 원인을 작가에게 돌리기도 한다. 지난 2011년 8월 드라마 <스파이 명월>의 여주인공 한예슬이 드라마 방영 중 촬영을 거부하고 미국으로 떠난 일이 발생했다. 그때에도 쪽대본을 양산하는 드라마 작가들과 열악한 국내 드라마 제작환경에 비난의 화살이 쏟아졌다.


▎(왼쪽부터)생방송처럼 이뤄지는 드라마 제작환경에서 만들어진 ‘쪽대본’은 무리한 촬영 스케줄을 낳기도 한다. 작가들은 보통
그러나 작가들은 ‘쪽대본의 책임을 작가에게만 돌리는 건 문제가 있다’는 입장이다. 촉박한 제작일정 말고도 방영기간 내내 작가가 요구받는 수정요청과 간접광고(PPL)는 대본 완성시간을 지연시키는 요인이다. 2010년 1월 방송법 시행령 개정으로 인해 PPL이 허용되면서 쪽대본이 등장하는 일이 더욱 빈번해졌다는 것이다. 드라마 제작비를 협찬사로부터 충당하는 게 관행처럼 굳어지면서, 협력사 제품을 대본에 노출하는 것이 작가의 주 업무가 되다시피 했다. 출연 배우가 극의 흐름과 상관없는 장소에 등장하거나 특정 제품을 홍보하는 대사를 읊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다.

“시청자 반응 좋을 때 가장 행복하죠”

협력사들은 작가에게 연락을 해서 “우리 제품을 더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거나 “중요한 장면에 노출시켜 달라”는 등 수정사항을 요구한다. 지나친 PPL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제재를 당하기도 하지만 작가들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대본을 수정해야 한다. 작가 박은미(가명·40) 씨는 PPL이 가져온 악순환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드라마에 가장 큰돈을 댄 메인 협찬사의 제품은 반드시 의미 있는 장면에 등장시켜야 한다는 암묵적인 룰이 있어요. 극 흐름을 깨지 않으면서 시청자가 제품을 알아챌 수 있도록 해야 하니 작가로서는 머리가 깨지죠. 꼼수를 부려서 특정 조연한테 PPL 대사를 몰아주기도 하는데, 협찬사의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할 경우 시간이 걸리더라도 다시 대본을 쓸 수밖에 없어요.”

작가들의 고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드라마가 종영될 때까지 ‘시청률’이라는 꼬리표에 시달려야 한다. 드라마가 방영된 다음날 아침이면 작가들은 방송사로부터 전날 시청률을 통보받게 된다. 타 방송국의 시청률을 넘어서면 ‘운수 좋은 날’이지만, 조금이라도 밀릴 경우에는 여지없이 ‘문책’을 들어야한다. 작가 허지원(가명·39) 씨는 “작가의 표정만 봐도 전날 시청률이 잘 나왔는지 못 나왔는지 알 수 있다”며 “한 회분이라도 시청률이 소수점 차이로 밀리면 ‘시청률이 더 낮게 나온 이유가 뭐냐’는 방송사의 질책에 시달려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방송가에는 ‘1~2회에서 시청자를 사로잡지 못하면 다른 방송사에 시청자를 뺏긴다’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허 작가는 “초반 시청률에 변동이 없으면, 드라마 후반부에 전개되는 에피소드를 한 회에 모두 쏟아부으라는 지시를 받기도 한다”며 “일부 드라마가 초반에는 흥미진진하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급격히 재미가 없어지는 것도 그런 배경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작가로 사는 게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자신이 쓴 드라마 한 편이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사회적 변화까지 일으키는 걸 볼 때는 큰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SBS <드라마의 제왕>을 쓴 작가 이지효(36) 씨는 “소소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네 드라마 진짜 재밌더라’ 이 한마디를 들을 때 가장 행복하다”며 “작가의 가장 큰 보람은 드라마로 세상과 소통하는 데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작가 서현용(가명·46) 씨는 “제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을 보고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했다는 한 학부모의 이야기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며 “작가가 쓴 드라마가 개인이나 사회에 영향을 미칠 때, 그것이 또 다른 좋은 드라마를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드라마 작가들 사이에서는 ‘쉬는 작가는 없다’는 말이 있다. 드라마가 화려한 막을 내린 뒤에도 작가들은 치열함과 불안함 속에 다음 작품을 구상하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울고 웃으며 즐기는 드라마 한 편에 작가들의 고민과 눈물이 녹아 있다.

- 김슬기 월간중앙 기자 rookie@joongang.co.kr

201407호 (201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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