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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 심층분석] 기로에 선 30년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 

할머니와 정의연은 왜 갈라섰나 

■ 피해자 명예회복 취지 빛바래고 이념의 선전도구로 변질됐다는 지적
■ 일본 지원금 받은 피해자 배제하고 비판 학자 따돌리기도
■ 이념 대결 멈추고 피해자 중심으로 새 운동방향 모색 필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명예 회복 활동이 30년째 접어들면서 과거 운동 방식에 대한 문제점이 수면 위로 노출됐다. 논쟁이 길어질수록 살아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시간은 점점 짧아진다.
'1439' 5월 13일에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수요집회(공식 명칭은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기 수요시위’) 차수다. 첫 시위가 열렸던 1992년 황혼에 접어들었던 예순두 살 위안부 피해자는 어느덧 구순을 지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었고, 혈기왕성했던 스물여덟 살 청년은 예순을 바라보는 어엿한 정치인이 됐다. 피해자와 활동가로서 30년 가까이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의기투합해온 이용순(92) 할머니와 윤미향(56) 더불어시민당 비례대표 당선인의 얘기다.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 곁을 지켰던 두 사람은 1439차 수요집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이제 주최자가 아닌 관람자가 될 전망이다. 이 할머니는 더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윤 당선인은 이제 국회의원 신분으로 활동 무대를 국회로 옮긴다. 1439차 수요집회는 지키려는 이와 반대하는 이의 외침이 공간을 채웠지만, 인생의 대부분을 쏟아부었던 주역들이 빠진 자리는 헛헛했다. 무엇이 두 사람을 갈라서게 했을까.

30년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 시간은 성인이 되어 살아갈 인생의 반평생에 해당한다. 누군가의 진정성을 보여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적어도 외형적으로는 그랬다. 지난 5월 7일 이 할머니가 기자회견을 자청해 정의기억연대(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의 후신, 이하 ‘정의연’) 운영의 난맥상과 윤 당선인에 대한 서운함을 토로할 때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 할머니의 기자회견이 불러온 파장은 컸다. 보수와 진보 이념으로 갈라져 인신공격성 비난을 토해냈다. 윤 당선인에겐 국민이 낸 기부금을 부정하게 착복했다는 의심이 덧씌워졌다. 이 할머니의 문제의식은 친일 적폐세력에게 이용당하는 ‘기억이 온전치 않은’ 노인의 망언으로 치부됐다. 피해자와 활동가들이 함께 일궈낸 한국 위안부 운동의 성과가 하루아침에 이념 대결과 진영 논리의 제물(祭物)로 전락했다.

학자들 “할머니의 변심 문제 아냐”


▎이용수 할머니의 문제 제기 이후 5월 13일에 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1439차 수요집회는 정의기억연대 측(위)과 반대자들(아래)의 구호가 엉킨 이념 대결의 장으로 전락했다. / 사진:김상선 기자
정의연과 윤 당선인을 옹호하는 진영에선 이 할머니의 문제 제기가 순수하지 못하다고 의심한다. 하지만 월간중앙을 만나 털어놓은 이 할머니의 생각은 그런 의심과 거리가 멀었다. 이 할머니는 인터뷰 내내 자신의 문제 제기가 오랜 고민 끝에 나온 것임을 강조했다. 5월 7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당사자들이 단체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생계와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는 주장을 하기까지 이 할머니는 “1년 동안 고민했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지금까지 이어온 운동 방식에 관한 문제의식을 내비쳤다. 그는 “내 잇속을 채우려는 게 아니라 다음 세대는 다른 방식의 운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나섰다”고 했다.

지금까지 운동 방식이 어땠기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걸까. 위안부 운동을 연구해온 연구자들은 “이 할머니의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로 볼 문제가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오랫동안 내재해 있던 문제가 수면 위에 드러난 것”이라는 게 연구자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한 대학교수는 “소모적인 논쟁으로 그칠 게 아니라 위안부 운동 과정의 문제를 성찰하고 새로운 방향을 모색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선 지난 30년의 위안부 운동 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위안부 운동을 이끄는 정의연의 전신은 정대협이다. 1990년 37개 여성단체가 가담해 출범했다. 1992년 1월 8일 수요일, 서울 종로구 중학동의 일본대사관에서 대장정이 시작됐다. 미야자와 키이치 일본 총리 방한을 계기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34명이 참여했다. 정의연의 전신인 정대협은 이보다 2년 앞선 1990년에 발족했다. 37개 여성단체가 참여했다. 이후 2016년에 설립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과 통합해 정의기억연대로 확대됐다.

정대협에서 정의연으로 이어지는 동안 이뤄낸 30년의 성과는 작지 않았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8월 14일이 2018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한국의 위안부 운동은 국제적인 여성 인권운동의 모범으로 자리매김했다. 일본·대만·캐나다·필리핀·미국·독일·네덜란드·인도네시아 등 9개국에서 위안부 명예회복을 위한 수요집회 개최 등 연대활동 네트워크가 구축됐다.

UN과 미국 현지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 의제로 떠오르게 된 것도 한국 위안부 운동이 견인한 측면이 컸다. 미국 하원은 일본의 집요한 방해를 뚫고 2007년 7월 30일 ‘일본군 위안부 사죄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네덜란드·캐나다·필리핀·유럽 의회에서도 잇따라 위안부 결의안이 압도적인 찬성으로 채택되는 등 국제사회의 지지 여론이 확산했다.

이 같은 성과는 위안부 운동에 참여한 이들의 피땀 어린 노력의 결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대협은 그런 노력을 하나로 모아낸 큰 우산이나 다름없었다.

위안부 운동 누가 이끄나


▎위안부 운동은 1992년 1월 8일 첫 수요집회를 통해 조직적인 시민운동으로 전개됐다.
위안부 운동을 이끄는 축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과 이들의 실질적인 명예회복을 돕는 활동가 그룹, 위안부 참상을 학문적으로 밝혀 운동의 역사적 당위성을 제공하는 연구자 그룹이다. 연구자 그룹은 대중 운동의 오류를 바로잡는 역할을 해왔다. 정의연의 전신인 정대협이 이름을 바꾸게 된 계기도 위안부와 근로정신대가 다르다는 학문적 연구 결과가 바탕이 됐다.

무엇보다 대중적 지지를 끌어내고 학문적 근거가 되는 근본은 피해자의 증언이다. 위안부 운동이 피해자 중심으로 전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대협 활동 초기에는 이런 원칙이 대체로 지켜졌다고 한다. 문제를 제기한 이용수 할머니도 한때 윤 당선인과 함께 정대협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위안부 운동은 활동가 그룹이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 활동가 그룹은 시민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피해 할머니들을 조직하고 한·일 양국의 위안부 관련 정책이나 입장에 영향을 끼칠 여론을 조성한다. 국제적인 연대를 끌어내는 것도 활동가 그룹의 역할이 중요하다. 국내 주요 여성단체들이 위안부 운동을 시작해 지금까지 이끌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당연할 수도 있다.

문제는 위안부 운동이 시민사회단체의 헤게모니(주도권) 수단으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상은 피해 할머니들이 고령으로 인해 생존자 수가 줄어들고 활동력이 약해질수록 점점 뚜렷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를 두고 위안부 문제를 연구해온 한 학자는 “피해 할머니들과 활동가들이 추구하는 운동의 본질적인 목적과 방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라고 분석했다.

이 연구자에 따르면 할머니들은 자기가 겪은 피해를 알려서 명예를 회복하고 적절한 경제적 보상을 받는 게 가장 큰 목적이다. 일본에 의해 강요당한 피해자인데도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손가락질받으며 숨죽여 살아야 했던 세월에 대한 보상 심리가 강하다. 이런 생각을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저마다 생활 수준과 운동에 관한 의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일부 할머니들이 일본이 낸 10억 엔으로 세운 화해·치유재단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겠다는 뜻을 표했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증언과도 일치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활동가 그룹의 생각은 이념에 따라 다양하게 분화한다. 페미니스트는 위안부 운동을 여성인권 신장의 계기로 여긴다. 이는 정대협의 출발을 주도한 여성단체들이 대체로 갖는 목적의식이다. 이용수 할머니 역시 자신을 ‘위안부 피해자’가 아닌 ‘여성인권운동가’로 지칭한다. 지난 5월 7일에 낸 입장문에서도 스스로를 여성인권운동가라고 지칭했다.

시민운동계는 이념 대중화 수단으로 삼아


▎2004년 2월의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활동가들. 왼쪽이 당시 대표인 신혜수 이화여대 교수이고, 앞에 앉은 사람이 당시 사무총장이었던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인이다.
평화운동의 계기로 삼길 원하는 이들도 있다. 대체로 반미·반일 운동을 지향하는 이들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1980년대 민주화운동 주도 그룹인 민족자주(NL) 노선으로 맥락이 닿는다. NL 노선은 한반도의 구조적 모순을 청산되지 않은 이유를 친일 세력이 해방 후 친미 세력으로 탈바꿈해 기득권을 유지해오는 데서 찾는다.

30년간 위안부 운동에 투신해온 윤 당선인은 1980년대 해방신학의 본거지인 한신대 신학과를 나왔다. 80년대 통일 운동의 거목인 문익환 목사가 한신대 신학과 교수였다. 윤 당선인의 남편인 김삼석 수원시민신문 대표는 과거 통합진보당의 주류 세력인 경기동부연합의 중심 한국외대 용인캠퍼스를 졸업했다. 김 대표는 1993년 이른바 ‘남매간첩단’ 사건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다가 20년이 지난 후 재심에서 일부 혐의에 대해 무죄를 받았다. 그는 최근 이 할머니가 마음을 바꾼 이유가 ‘후손에게 목돈을 물려주고 싶은 생각에서 비롯된 게 아니냐’는 의견을 자신이 운영하는 신문 홈페이지에 올리기도 했다.

익명의 연구자는 “활동가들은 운동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야만 자신이 추구하는 이념의 대중적 지지기반을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방향에 대한 이견 때문에 위안부 운동이 한때 난관에 봉착한 적도 있다.

1997년에 정대협이 위안부 피해자들의 위로금 수령을 방해한 일이다. 당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보상 사업을 위해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설립했다. 그러자 생활이 궁핍했던 일부 피해자들이 보상금을 받으려 하자 정대협 활동가가 “더러운 돈을 받으면 화냥년 된다”며 못 받게 했다는 사례가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으로 남아 있다. 여성학자인 김정란 박사(여성학)가 2004년 이화여대 대학원에 제출한 박사 논문(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전개와 문제인식에 대한 연구: 정대협의 활동을 중심으로, 2004) 중 위안부 피해자인 석복순 할머니가 증언한 대목이다.

‘지금 정대협에서는 (일본에) 1억5000(만원)을 요구한다, 천년 세월이란 말이여 이게. 우리는 나이 먹고 자꾸 죽어간다. 아무 데고 마저 주는 돈 받아서 쓰고 죽겠다, 다수가 이거야. 그냥 딴 뜻은 없는 것 같다. 할머니들 요구가 무리도 아니고. 거기서 인제 또 정대협에서 (국민기금을) 주지 말라고 일본에 소문을 퍼뜨려 놨더라고. (그러니) 보상을 주나? 안 주지. 아무 거고 몇천만 원이나 주면 주는 대로 할머니들 타 먹게 내버려 두지. 할매들은 다 죽어가잖아. 그런데 모금을 받지 말라, 그것 받으면 더러운 돈이다, 화냥년이다, 이런 귀 거슬리는 소리만 하더라고.(석복순, 증언집 5권)’[위 논문 130쪽]

김정란 박사는 “생존자들이 국민기금을 수령하면 위안부 운동은 파국을 맞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2004년에는 위안부 피해자 단체인 ‘무궁화자매회’와 정대협이 갈등을 빚기도 했다. 무궁화자매회는 수요집회가 시작된 1992년에 위안부 피해자들의 친목단체로 결성됐다. 무궁화자매회 소속 위안부 피해자 33명은 정대협을 향해 “위안부 피해자들을 데리고 앵벌이 하는 단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이들은 이후 수요집회 불참을 선언한 것은 물론 정대협의 횡령 의혹을 처음 제기하기도 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화해·치유재단이 설립된 뒤 정의연이 피해자들의 보상금 수령을 막는 대신 전개한 ‘100만 모금 운동’은 1997년 아시아평화국민기금 수령 거부 당시와 판박이처럼 닮았다. 당시 정대협은 피해자들의 기금 수령을 막는 대신 두 차례에 걸쳐 ‘정신대 할머니 지키기’란 명목으로 시민 모금을 전개했다. 이미 국민기금을 수령한 피해자는 성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 같은 태도는 일본제국주의의 회유에 굴복한 ‘내부의 배신자’로 낙인을 찍은 거나 다름없었다. 이는 자신들과 같은 이념 지향을 갖고 동참하는 피해자에 한해 돕는다는 선언인 셈이었다. 정대협을 계승 발전한 정의연의 태도도 20여 년 전 당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특히 여성학자들은 당시 정대협이 아시아평화국민기금을 수령한 피해 할머니들에게 입에 담기 어려운 성폭력적 비하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

입 열기 꺼리는 중간자들


▎1997년 2월 강덕경 할머니의 노제가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렸다. 당시 정대협은 일본이 조성한 민간기금에 반대하며 자체 국민 기금을 모아 할머니들에게 지급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여성학자는 이렇게 지적했다. “성적인 치욕과 폭력을 경험한 피해자들에게 트라우마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혐오적 표현을 사용하며 기금 수령을 못 하게 한 것은 심각한 2차 가해다. 그런 막말이 일본의 형식적인 사과보다 정당하다고 할 수 있을까.”

학자들은 피해 할머니와 활동가 사이에서 보다 객관적으로 사안을 판단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취재 과정에서 자문을 구한 연구자들은 하나같이 실명을 밝히기를 꺼렸다. 익명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마지못해 자기 의견을 밝혔다.

이유는 단순했다. 잘못 말했다간 ‘따돌림’당하기에 십상이란 것이다. 한때 정대협 활동에 참여했던 한 여성학자는 “이 바닥(여성운동계)이 워낙 좁아서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누군지 금방 드러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입바른 소리를 했다가 결국 사법처벌까지 받게 된 박유하씨를 보면서 문제의식을 가진 연구자들은 더더욱 입을 조심하게 됐다”고 했다.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본군 위안부를 ‘매춘부’로 표현해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기소돼 2심에서 벌금 1000만원을 선고받고 대법원 확정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박 교수가 문제의 책에서 비판한 근본적인 내용은 위안부 운동의 방식에 관해서였다. 그는 일본의 법적 책임을 고집하는 운동 방식이 효과적이지 않다고 주장했다. 일부 표현이 문제가 됐지만, 전체적으로는 일본을 두둔한다기보다 진정성 있는 사죄를 끌어낼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하는 내용이다.

학자로서 제기할 수 있는 학문적 견해로 볼 여지도 충분하지만, 위안부 운동의 주류 활동가들은 박 교수를 ‘친일 어용학자’로 낙인찍었다. 익명의 여성학자는 “박 교수의 주장은 [반일종족주의]를 쓴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와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주도권을 쥐고 있는 활동가 그룹은 작은 비판조차 전혀 용납하지 않았다”고 했다.

일각에선 정의연이 화해·치유재단을 반대한 것도 자신들이 쥔 기득권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 아니냐고 보고 있다. 정의연이 2016~2019년 4년간 여성가족부와 교육부, 서울시 등에서 받은 국고보조금은 13억여원에 달했다. 올해도 6억여원이 각종 사업 보조금으로 책정됐다. 국가가 개입해 설립하는 화해·치유재단이 운영될 경우 정의연의 활동 범위는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다. 상당수 위안부 관련 사업들이 화해·치유재단을 통해 진행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령인 피해 할머니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나면 정의연이 존재해야 할 명분은 더욱 작아진다.

극우와 진보로 갈라진 진흙탕 싸움


▎저서 [제국의 위안부]에서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박유하 세종대 교수. 2심에서 벌금형을 선고받고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30년 한국 위안부 운동은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논쟁이 격화된 5월 13일에 이 할머니가 낸 입장문은 위안부 운동의 세대교체와 방향 전환을 촉구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다. 이 할머니는 “한·일 양국의 미래 관계를 구축해나갈 학생들 간 교류와 공동행동 등 활동이 좀 더 확대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지난 30여 년간 진실을 밝히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나타났던 사업 방식의 오류나 잘못을 극복하기 위한 과정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다만 “그동안의 성과에 대한 폄훼와 소모적인 논쟁은 지양되어야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논쟁의 양상은 할머니의 바람과 다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이 할머니의 문제 제기를 진보 진영과 여권에 대한 공격의 빌미로 이용한다. 수요집회가 열린 5월 13일 일본대사관 앞 주변에는 극우 단체들이 윤 당선인 사퇴와 수요집회 중단을 요구하는 맞불 시위를 벌였다. 미래통합당은 이번 논쟁을 정의연과 윤 당선인의 도덕성 문제로 몰아가고 있다.

이에 맞서는 정의연과 여권의 대응도 이념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윤 당선인은 정의연과 자신에 대한 비판을 “보수 언론과 미래통합당이 만든 모략극”이라고 규정하고 “탈탈 털린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생각난다”고 응수했다. 더불어민주당도 “친일·반인권·반평화 세력이 역사의 진실을 바로 세우려는 운동을 폄하하려는 부당한 공세에 불과하다”며 윤 당선인을 엄호했다. 5월 14일 국회에서 열린 기자회견에는 강창일·김상희·남인순·홍익표·송갑석·정춘숙·제윤경 의원과 고민정·양향자·이수진·임오경 당선인이 함께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단체행동에 나서면서 논쟁은 정치적 공방으로 흐를 공산이 커졌다. 이 할머니가 바라던 것과 동떨어진 방향이다.

양극단에서 외치는 고함은 중간에서 만나려는 이들의 귀를 마비시키고 만다. 중간이 사라진 테이블은 더는 토론의 장이 아니라 살기 위해 상대를 죽여야 하는 싸움터에 불과할 뿐이다. 그 싸움터에서 정작 위안부 피해자의 눈물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다.

역사는 명분을 필요로 한다. 당사자에게 필요한 건 실리다. 명분과 실리가 조화를 이룰 접점을 찾는 건 지혜로운 연대로 가능하다. 한쪽을 고집할 때 연대의 고리에 생기는 균열은 돌이킬 수 없게 된다. 중요한 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정란 박사가 자신의 논문에서 강조한 대목은 16년이 지난 오늘 다시 곱씹어볼 만하다.

“생존자들의 남은 생이 길지 않다는 것은 무시되어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이용되어서도 안 되는 중요한 사실이다. 실제로 생존자들의 수는 점차 줄고 있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006호 (2020.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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