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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노태우 前 대통령 장남의 5·18 묘지 참배 이유 

“걸을 수만 있다면 아버지가 직접 가셨을 것” 

노재헌씨 지난해 두 차례 이어 5월에도 광주 사죄 방문
“1988년 취임 당일 어머니 참배 때 아버지도 함께한 셈”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인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은 “5·18이 역사적으로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데 힘을 보태겠다”고 강조했다. 월간중앙과의 인터뷰 도중 잠시 상념에 잠긴 노 원장.
노태우 전 대통령의 아들 노재헌(55)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의 광주행 발걸음이 잦아지고 있다. 지난해 8월 23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한 노 원장은 12월 6일에는 광주 오월어머니집을 연락 없이 방문했다. 그는 “아버지를 대신해 사죄한다”면서 “아버지께서 직접 광주의 비극에 대해 유감을 표현해야 하는데 병석에 계셔 여의치 않다”며 고개를 숙였다.

그로부터 다섯 달여 뒤인 5월 29일 노 원장은 다시 광주로 내려가 5·18 민주묘지를 참배했다. 그는 5·18 민주묘지 제단 앞까지 이동한 뒤 아버지 이름으로 된 조화를 헌화하고 분향했다. 노 원장의 부친 노태우(88) 전 대통령은 1988년부터 1993년까지 재임한 13대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신군부의 주역으로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유혈 진압과 학살 책임 당사자로 꼽혀왔다. 그는 5월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 과정에서 자위권 발동 결정과 헬기 지원 등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당시 수경사령관으로 1980년 5월 21일 계엄군의 자위권 발동 결정 회의에 전두환 전 대통령 등과 함께 참석한 게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은 1995년 5·18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전 전 대통령 등 신군부 핵심 인사 18명과 함께 구속돼 재판을 받았다. 법원은 12·12 쿠데타와 5·18 진압을 군사반란과 내란 행위로 판단했고 전 전 대통령 무기징역, 노 전 대통령 징역 17년형 등 핵심 관련자들에게 중형을 선고했다.

그런 노 전 대통령의 장남이 채 1년도 안 된 사이 광주를 세 차례나 방문해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고, 5·18 단체를 찾아 고개를 숙인 것이다. 월간중앙은 수차례 설득 끝에 노 원장과 만나 그의 5·18 민주묘지 참배에 얽힌 사연과 이유 등에 대해 들어봤다. 노 원장은 “5·18 민주묘지 참배와 관련한 인터뷰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올해 5·18 40주년인데, 얼마 전 5·18 민주묘지에 다녀왔습니다. 어떤 이유에서 작년에 이어 올해도 참배했는지.

“5·18에 대한 실상을 제대로 접하게 된 건 대학교에 들어 간 1984년입니다. 그 전에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고, 아버지가 포함된 이른바 ‘신군부’와 관련돼 있다’는 정도만 피상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대학에 다니면서 5·18에 관한 수많은 대자보와 사진 등을 접하면서 엄청난 충격과 함께 가치관에 큰 혼란이 빚어졌습니다. 그 혼란과 번민이 대학 생활 내내 제 어깨를 짓눌렀고, 그 무게는 4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5·18 이후 정치적·사회적 변화가 일면서 잘 모르고 있던 부분들도 하나둘 알게 됐습니다. 또 폭도들이 일으킨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으로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을 지켜보며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벼워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짐을 벗어버리기 어려웠습니다. 아버지는 5·18에 직간접적으로 관련돼 있기도 하지만, 5·18 이후 민주화 과정에도 일정 부분 참여했습니다. 어쨌든 아버지는 1995년 5·18 등과 관련해서 사법 처리 대상이 됐고 처벌을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2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과정에서 5·18과 관련해서, 또 아버지와 관련해서 제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평소 역사에 관한 책임을 강조하신 분이기에 아들로서 5·18과 관련해 아버지의 뜻을 잘 전달하는 게 무엇일지 오랜 시간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10여 년 전부터 거동이 불가능할 만큼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행동에 옮기는 걸 미루면 안 되겠다고 마음먹게 됐습니다. 어느 날 문득 ‘무조건 가서 참배하고 사죄부터 하자’는 생각이 떠올랐고, 작년 8월 광주로 내려간 것입니다.”

노 원장은 지난해 8월 23일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찾아 사죄했다. 5·18을 야기한 신군부 인사 직계가족 가운데 첫 번째 공개적인 참배였다. 노 원장은 5·18 민주묘지 신묘역에서 헌화·분향한 뒤 윤상원·박관현 열사와 전재수 유공자, 행방불명자 등 5곳의 묘역을 찾았다. 5·18 당시 윤상원 열사는 시민군 대변인, 박관현 열사는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5·18을 상징하는 인물들이다. 전재수 유공자는 당시 11세의 나이로 희생됐다.

“아버지의 오랜 생각으로, 아버지와 충분한 교감”


▎노태우 전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가 노 전 대통령 취임 당일인 1988년 2월 25일 광주광역시 북구 망월동 구묘역의 이한열 열사 묘역에서 참배하고 있다.
노 원장은 5·18 민주의 문(門) 방명록에 ‘삼가 옷깃을 여미며 5·18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분들 영령의 명복을 빕니다. 진심으로 희생자와 유족분들에게 사죄드리며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가슴 깊이 새기겠습니다’는 글을 남겼다. 방명록 문구와 관련해 노 원장은 “아버지의 오랜 생각으로, 아버지와 충분한 교감을 통해 전달받은 메시지였다”고 설명했다. 2002년 전립선암 판정을 받은 노 전 대통령은 2005년에는 소뇌 위축증이라는 희소병이 발병하면서 사실상 거동이 불가능해졌다. 2011년에는 폐렴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기관지에 침을 삽입하면서 말을 하지 못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아버지의 일인데 아들이 굳이 이렇게까지 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많은 분이 제 아버지가 5·18 특별법이 제정돼서 처벌받은 사실은 기억합니다. 일각에서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광주를 깎아내리는 듯한 발언까지 한 사람의 아들이 사죄한다고 하니 의아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평소 5·18에 대해 너무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6·29 선언의 씨앗은 5·18이라는 확고한 소신도 가지고 계셨고요. 또 5·18 보상 관련 법률이 제정되는 데 아버지의 건의나 소신이 받아들여진 측면도 있다고 저희 가족은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이후 정치적 상황이 변하면서 아버지가 광주에 대한 가해자로만 인식됐던 것 같습니다. 자식으로서 대신 사죄하는 것도 5·18에 대한 아버지의 일관된 생각의 연장선장이라고 봐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어떤 분들은 ‘노태우 전 대통령 사후(死後) 국립묘지에 모시려고 저러는 것 아니냐’고도 하던데….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국립묘지를 영예롭게 생각하겠지만, 저희 가족은 국립묘지를 고집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버지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고요.”

2011년 출간된 노태우 전 대통령 회고록에 ‘5·18의 원인은 유언비어’라는 대목이 있어 논란이 일었다. 이에 대해 노 원장은 “(직접 쓴 게 아니기 때문에) 회고록을 마지막으로 정리할 때 아버지의 진심이나 의도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측면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며 “다시 출판하게 될 기회가 있다면 개정할 생각”이라고 밝혔다.

“노태우는 6·29 선언 이전과 이후 두 명이 존재”


▎노재헌 동아시아 문화센터 원장이 5월 29일 5·18 구묘역의 이한열 열사 묘소에서 참배하고 있다.
5·18 민주묘지에 첫발을 들여놓았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형언하기 어려운 뭉클함이 가슴 깊은 곳에서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솔직히 ‘일단 참배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내려갔기 때문에 어떻게 참배해야 하고, 또 어디를 들러야 할지 잘 몰랐습니다. 누군가 ‘너는 안 돼’라며 막아서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기도 했습니다. 처음 묘지에 들어섰을 때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열사들의 묘지를 참배하면서 ‘이런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 발전과 함께 민주화를 이룰 수 있게 됐구나’라는 감사함도 느끼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민주묘지를 방문할 때 죄송함과 감사함이 교차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전직 대통령의 아들로서 5·18을 역사적으로 어떻게 평가하나요?

“역사의 평가는 역사가 내릴 겁니다. 다만 저는 역사의 평가가 제대로 내려지기 위한 일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뜻, 아버지가 5·18을 바라보셨던 시각을 겸손하게 전달하는 게 제 몫인 것 같아요. 아들로서 사죄와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고, 5·18이 역사적으로 제대로 자리매김하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려 할 뿐입니다.”

사죄 방문은 언제까지 하실 생각인지.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가 ‘사과는 피해자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해야 한다’고 했듯이 저 역시 (피해자와 유가족들이) ‘이제 됐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무릎 꿇을 겁니다.”

일본의 대표적인 진보 정치인인 하토야마 전 총리는 2019년 12월 부산 남구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을 방문했다. 그는 방명록에 ‘식민지 시대에 많은 고통을 준 쪽의 무한한 책임으로 마음으로부터 사죄합니다.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라고 적었다. 하토야마 전 총리는 2015년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을 찾았고, 2018년 경남 합천 원폭 피해자를 방문해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평소 5·18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시나요?

“‘5·18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라는 게 아버지의 확고한 생각입니다. 상처는 치유돼야 하고 5·18 정신은 민주화운동의 정신으로 계승돼야 한다고도 강조하셨습니다. 또 본인이 책임질 부분은 책임지고 역할을 할 부분은 역할을 하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주신다면.

“12·12부터 6·29까지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6·29 이후부터는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제부터 새로운 길을 가겠으니 국민 뜻대로 써주십시오’라고 밝힌 게 6·29 선언 아닙니까? 노태우라는 사람은 6·29 이전과 이후 두 명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6·29에 5·18이 담겨 있다는 겁니다. (아버지는) 6·29를 통해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대한민국을 위해 노력했다고 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6·29 전까지였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6·29 이후 시간이 있었으니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노 전 대통령의 건강은 어떠신지요?

“말씀과 거동을 못하신 지 꽤 오래됐습니다. 아버지의 거동과 언어 표현이 자유롭다면 제가 지금처럼 할 필요는 없겠죠. 그럴 수 없으니까 100%는 아닐지라도 제가 나서서 사죄의 뜻을 전하는 겁니다. 자식으로서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의 진심을 전달하고 사죄하는 게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노 전 대통령 ‘네가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구나’ 흡족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빨간 재킷)이 2019년 12월 24일 화순전남대병원을 방문해 어린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나눠주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아들의 이런 행보를 아버지는 아시나요?

“알고 계실 겁니다. 중요한 일들은 언제나 말씀드리는데 반응(표정)을 통해서 아버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요. ‘네가 할 일을 묵묵히 하고 있구나’ 정도의 반응은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신군부와 그 직계비속 중 민주묘지 참배는 노 원장이 처음이죠?

“정확히 누가 처음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희 가족 중에는 어머니가 가장 먼저 다녀오셨죠. 저는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추징금 완납도 저희가 할 도리를 한 것으로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노 전 대통령 측은 재직 당시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 관한 법률상 뇌물 등)로 1997년 대법원으로부터 추징금 2628억9600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2013년 이를 완납했다.

김옥숙 여사는 1988년에 민주묘지를 참배했죠?

“나중에 들어서 알게 된 일로, 월간중앙 1992년 (10월호에) 처음 보도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5·18때까지는 군에 몸담고 계시다가 이후 전역해서 정부·정치 쪽에 관여하셨고, 1988년 대통령에 취임하셨습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1980년과 1987년은 너무 달랐을 것 같습니다. 1980년에는 군인으로서 대한민국을 바라보셨을 테고, 1987년에는 민간인으로서, 정치인으로서 대한민국을 바라보셨을 겁니다. 6·29 선언의 직접적인 계기는 6월 항쟁과 이한열 열사의 죽음이었지만, 보다 근본적인 계기는 5·18이었다고 생각합니다. 6·29의 핵심은 ‘국민 뜻에 따르겠다’는 거고, 5·18 정신은 ‘국민 뜻에 따라달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통령이 되기 훨씬 전부터 아버지는 ‘다시는 이 같은 비극이 되풀이돼선 안 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6·29 선언 이후 아버지는 김대중씨 사면복권을 언급했는데, 그건 5·18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출발점이었습니다. 6공화국 출범 당일 어머니의 광주 방문, 그리고 국회 5·18 청문회 개최 등도 5·18 문제 해결을 위한 아버지의 노력이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 원장은 “1988년 2월 25일 대통령 취임식 당일에 수행원 몇 사람만 데리고 어머니가 참배하신 데 아버지의 뜻이 잘 담겨 있는 것 아니겠냐”며 “그날 이미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광주에 다녀오신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는 설명을 곁들였다.

김옥숙 여사의 건강도 안 좋으시다고 들었는데.

“연세(85세)가 있으신 데다 아버지 병간호를 하시는 과정에서 본인 건강까지 나빠졌어요. 지금은 두 분이 거의 비슷한 상태인 것 같아서 자식으로서 마음이 참 무겁습니다.”

“정치 참여? 가능성 1%도 안 돼”

누나인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과는 자주 소통하시는지.

“물론입니다. 특별히 누나는 광주와 인연이 많습니다. 작년에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에서 미디어 아트 관련 큰 행사를 직접 기획·연출해서 진행했습니다. 누나의 큰딸 사돈도 광주 분이고요. 언젠가 누나와 함께 5·18 민주묘지에 참배하러 갈 생각입니다. 곧 그럴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노태우 전 대통령 일가의 행보를 보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 측과의 차별화를 말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굳이 차별화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분들은 그분들의 생각과 입장이 있을 테니까요. 역사적으로 서로 역할·시기·사명이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입장에도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6월 24일 동아시아문화센터 주최로 ‘오늘의 관점에서 본 노태우 정부의 북방정책과 대북정책의 평가’ 세미나를 개최했죠?

“역사를 잘 정리하는 게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6공화국 임기 동안의 북방정책과 남북관계를 제대로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입니다. 이런 행사를 자주 마련해서 역사를 차분하게 고찰하다 보면 현재와 미래에 대한 답을 찾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난 4·15 총선 과정에서 노 원장의 출마설 그리고 특정 정당 입당설이 들렸습니다. 향후 계획이 궁금합니다.

“이따금 ‘정치할 거냐’ ‘정치를 하기 위해 일련의 행동(광주 방문 등)을 한 것이냐’고 물어오곤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제가 대한민국의 현실 정치에 참여할 생각이나 가능성은 1%도 없다는 겁니다. 다만 저 자신이 대한민국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던 사람이니까 대한민국과 우리 사회를 위해 어떻게든 기여해야겠다는 마음은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중국과 관련된 문화 교류 사업입니다. 제가 한·중 수교 20주년을 즈음해 한중문화센터(현 동아시아문화센터)를 세운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중국은 싫고 좋음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입니다.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하고 그에 필요한 노력을 하는 게 저의 첫째 소임입니다. 또 하나는 다음 세대의 젊은 리더들이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입니다. 리더들이 배출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그들이 리더십을 키우는 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다는 게 작은 소망입니다.”

노 원장은 공익 법인 두 개를 이끌고 있다. 하나는 한·중·일 문화 교류 사업을 하는 동아시아문화센터 또 하나는 장애인 음악가를 지원하는 ‘뷰티플 마인드(이사장 김성환 전 외교부 장관, 상임이사 노재헌 동아시아문화센터 원장)’다. 노 원장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한·중·일 문화 교류 사업과 후진 양성에 더 매진할 것”이라면서 “나라와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며 말끝에 힘을 실었다.

[박스기사] 노태우 정권 당시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일지

▶ 정권 관계자 동향

- (1988년 2월 25일 취임 직후) 김옥숙 여사 망월동 5·18 묘역 방문, 이한열 열사 묘역 등 참배

▶ 5·18 보상법 제정

- (1988년 4월 1일) 광주 민주화운동 치유대책 발표: 5·18 광주항쟁의 의미를 민주화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규정하고 종합적 보상 방안 발표

- (1988년 11월 26일) 노태우 대통령 특별담화문 발표: 광주민주화운동 등 피해자에 대한 보상 및 명예회복 실시

- (1990년 8월 6일) 광주 민주화운동 보상 등에 관한 법률 제정: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자 또는 상이를 입은 자와 그 유족에 대해 국가가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그에 따라 관련자와 그 유족에게 실질적인 보상을 함으로써 생활 안정과 복지 향상 도모

▶ 관련자 보상 실시

- 1차 보상(1990년): 신청 2693명, 보상 인원 2219명, 보상액 6400만원(평균)

- 글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사진 김현동 기자 kim.hd@joongang.co.kr / 녹취 정리 심민규 인턴기자

202008호 (2020.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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