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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상해임정 27년사(19)] 반공친미 노선 천명해 임정 지킨 이승만 

대통령 축출 공작 실패하자 이동휘, 총리직 사퇴하다 

김립, 대통령 권한 탈취하기 위한 임정 개조운동 추진
이동휘 사퇴의 배후도 김립… 본격적 노선투쟁 신호탄


▎1921년 1월 1일 촬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신년 기념사진. 당시 경무국장 김구(첫째줄 왼쪽 세번째), 국무총리 이동휘(둘째줄 왼쪽 여섯번째), 그 오른쪽의 이승만, 내부총장 안창호(둘째줄 왼쪽 열한번째)가 눈에 띈다. / 사진:상하이총영사관
상해에 도착한 이승만 대통령이 처음 거처한 맹연관은 영국 조계지(租界地) 안에 있었다. 영국이 일본 동맹국이었기에 맹연관은 위험했다. 그래서 임정에서는 대통령 거처를 벌링턴(Burlinton)호텔로 변경했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 7일 벌링턴 호텔로 거처를 옮겼다. 하지만 그 호텔은 개방된 곳에 자리해 신변안전을 보장하기 어려웠다. 이에 여운형은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자리한 크로푸트(J.W. Crofoot) 목사 사택을 주선했다. 상해 안식교 목사인 크로푸트의 사택은 프랑스 조계지 안에 있어 신변안전에 유리했기 때문이다. 1920년 12월 12일 이승만은 목사 사택으로 거처를 옮겼고, 1921년 5월 28일 상해를 떠나기까지 반년 여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임병직 회고록]에 의하면, 이승만과 임병직은 맹연관에서 이틀을 지낸 후 1920년 12월 7일 임정 청사로 갔다. 당시의 방문은 정식 방문이 아니었다. 대통령 집무실, 대통령 업무처리, 대통령 경호 등 현안을 논의하기 위한 임시 방문이었다. 일제의 정보보고에 의하면, 대통령 집무실은 협평리(協平里) 1호 전(前) 재무부 장소로 결정됐다. 업무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수행하고, 경호는 경무국장 김구가 담당하는 것으로 했다.

이승만, 각부 총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간부들이 1920년 3월 1일 미국 워싱턴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했다. 앞줄 가운데가 당시 임정 집정관총재였던 이승만, 그 오른쪽은 구미외교위원장을 역임한 김규식. / 사진:국가보훈부
집무실이 준비된 1920년 12월 10일 전후로 이승만은 출근하기 시작했다. 이는 1920년 12월 10일에 임시공채관리국이 이승만에게 업무보고를 했다는 [우남 이승만 문서] 7권의 기록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 업무보고는 당연히 대통령 집무실에서 진행됐을 것이다.

1921년 2월 5일자 [독립신문] 제93호 ‘대통령부(大統領府) 방문기’에 의하면, 이승만은 오전 9시에 출근하고 오후 5시에 퇴근했다. 아침은 양식, 점심은 한식으로 했는데 이는 집무실에서의 식사였다. 당시 이승만은 크로푸트 목사의 사택에서 아침을 먹지 않고 출근해 집무실에서 아침과 점심을 해결했다고 이해된다. 물론 저녁은 퇴근 후 해결했을 것이다.

이승만은 1920년 12월 13일 오후 3시부터 임정직원 전체와 상견례를 가졌다. 그 상견례는 대통령 집무실이 아니라 군무부에서 거행됐다. 국무총리 이동휘가 군무총장을 겸임하는 상황이라 이동휘 주재 상견례로 군무부에서 거행했다.

상견례에서 이승만은 메시지 4개를 전달했다. 첫째, 통합 임정을 신뢰숭봉(信賴崇奉)하고 자타(自他) 구별을 없게 할 것, 둘째 밀항으로 상해에 왔기에 이승만의 도착을 비밀로 할 것, 셋째 상해에 오래 머물지, 다른 곳으로 갈지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메시지이고 넷째가 핵심이었다.

넷째는 자신이 재정상 곤란을 직접 해결하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임정은 재정 궁핍으로 말할 수 없이 곤란했다. 직원 월급도 지급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이 직접 재정상 곤란을 해결하겠다고 공포한 메시지는 임정 직원들을 크게 고무시켰을 것이다.

상견례 전후로 이승만은 각부 총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았다. [우남 이승만 문서] 7권에 의하면, 최초의 업무보고는 1920년 12월 10일 임시공채관리국에서 진행됐다. 임정의 수많은 부서 중에서도 임시공채관리국이 제일 먼저 업무보고를 한 이유는 이승만의 주요 관심이 재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보고는 임시공채관리국의 국장 김인전이 진행했다.

두 번째 업무보고 역시 재정과 관련된 재무부에서 1920년 12월 21일 진행됐다. 보고자는 재무총장 이시영이었다. 세 번째 보고는 1920년 12월 23일 외무부에서 진행됐다. 보고자는 외무총장 대리 신익희였다. 뒤이어 1921년 1월 10일 군무부의 업무보고가 있었다.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 이동휘가 보고자였다.

업무보고 후 이승만은 임정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을 것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파악하지는 못했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보고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동휘가 모스크바에 밀파한 한형권 특사 문제와 모스크바에서 확보한 차관 문제는 보고받지 못했다.

그런데 김립에 뒤이어 모스크바 차관을 관리한 김철수의 [지운 김철수]에는 “돈 갖다 놓고 김립이가 첫 번에 일 시작한 것이 상해임시정부 개조운동이여. 그때 임시정부를 기성국가의 훌륭한 내각 모냥으로 하는게 아니고 실력적으로 혁명운동의 총 지휘본부로 만들자! 그 말이 옳지. 아, 뭣하러 대신노릇하고 지내고 그러잖케? 그렁게 말도 전부 뭐, 대신 모냥으로 말고 집행위원회로 해서 혁명정부를 조직하자고 허는 의견이 돌았단 말이여”라는 내용이 있다.

이승만 고립시키는 집행위원제 추진한 김립


▎임시정부 환국 환영식장의 이승만과 김구. / 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에 따르면 모스크바 차관을 갖고 돌아온 김립은 제일 먼저 임정 개조운동을 벌였는데, 그 핵심은 대통령제를 집행위원회제로 개조하자는 것이었다. 집행위원회에 대해 [지운 김철수]에서는 “아! 어떻게 허는고 허니, 김규식은 모스크바에 주재해서 외교담당이고, 이동휘는 시베리아·만주를 왔다 갔다 하면서 군사지휘로 그것 담당하고, 안창호는 북미에 가서 북미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 사회에서 독립운동을 실제로 허라. 이승만이는 하와이 있어 가지고 독립운동을 실제로 해라. 신채호는 북경에 있어, 남형우·신채호는 북경에 있어서 독립운동을 허지. 신규식이는 광동에 있어서 운동을 해라. 북만에는 김동삼이 이 사람들 운동을 실제 했고… 다 이렇게 지대를 나누었어. 다 나누어서 시방 상해임시정부 총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다 나누어서 운동을 허고 (중략) 각처에 있는 이들이 1년에 한 번씩 만나서 회의를, 긴급한 일이 있으면 만나서 회의를, 의견을 들어가지고 거기서 허자. 이렇게 짜 가는데”라고 했다.

요컨대 개조의 핵심은 임정의 대통령과 국무총리, 각부 총장을 없애고 그들을 동등한 집행위원으로 만들어 각처에서 활동하게 하다가 1년에 한 번씩 또는 긴급할 때에 임시로 상해에 모여 의견을 조율하는 체제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개조하면 우선 이승만과 이동휘가 벌이는 권력암투가 해소될 수 있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 자리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만을 제외한 이동휘와 각부 총장이 찬성할 가능성이 높았다. 실제 안창호를 비롯한 많은 총장들이 집행위원회에 호의적이었다. 김립은 그것을 노리고 집행위원회를 제안했을 것이다.

그런데 집행위원회를 시행하면 상해임정 자체가 없어진다는 문제점이 발생한다. 그 대안을 [지운 김철수]에서는 “상해에는 각처 연락총본부를 상해에다가 두어, 그리 가지고 상해 연락총본부를 김립이가 허고 아까 윤현진이, 김철이 인제 이 사람들이 총 그 연락부를 맡어”라고 했다. 요컨대 상해에는 기왕의 임시정부 대신 연락총본부를 두고, 그 총본부는 김립을 비롯한 젊은 차장들이 관장하자는 것이었다. 그런 제안은 당연히 젊은 차장들이 찬성할 가능성이 높았다. 따라서 김립의 집행위원회와 연락총본부는 각부 총장과 젊은 차장들을 유인하는 대신 이승만을 확실히 고립시키려는 제안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김립의 집행위원회는 코민테른 전권위원 제도를 본뜬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각 지역에 전권위원을 파견해 현지 문제를 해결하게 하고, 모스크바에는 코민테른 중심으로서 집행위원회를 두었다. 따라서 김립이 제안한 상해 연락총본부는 코민테른의 집행위원회에 해당하고, 각처 집행위원은 코민테른의 각처 전권위원에 해당한다. 특히 중요한 점은 김립 자신이 상해 연락총본부를 장악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되면 김립은 연락총본부를 매개로 각처 집행위원도 장악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김립은 이승만으로부터 실권을 탈취하기 위해 집행위원회와 상해 연락총본부를 제안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김립, 횡령자금으로 임정 요인들을 포섭하다


▎1921년 구미위원부 요원들. 앞쪽 왼쪽부터 이승만, 여비서 메이본, 법률고문 돌프, 뒷줄 왼쪽부터 서재필, 정한경. / 사진: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김립의 집행위원회와 상해 연락총본부가 추구하려는 국가체제는 공산주의 체제였다. 예컨대 한인사회당 전권위원 박진순은 코민테른 제2차 대회 중인 1920년 7월 28일 연설에서 “당은 전 세계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와 더불어 궁극의 목표, 공산주의 건설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예속된 조선을 세계연방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의 일부로 전화시키는 주력부대의 하나가 될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그 공언은 김립의 생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김립의 집행위원회와 상해 연락총본부는 이승만을 축출하고 상해임정을 소련 산하 공산주의 체제로 개조하려는 한인사회당의 운동이기도 했다. 그런 한인사회당의 노선은 당연히 반미친공이었다.

[지운 김철수]에서는 이동휘를 “그는 돈을 모른다. 돈이라고는 만지지 않으려 한다. 알려고도 아니한다”고 평가했다. 이는 모스크바 차관을 비롯한 모든 자금에 대해 이동휘는 간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는데, 그것은 곧 모스크바 차관을 김립이 독단적으로 운영했다는 의미와 같다. “이제 40만원 받아 왔는디(중략) 김립이 마음대로 해. 고것이 좀 잘못됐어”라는 [지운 김철수]의 언급은 바로 그 점을 지적한 것이었다.

한편 [지운 김철수]에는 “날마다 상해에 그 큰 선수공사, 요녕공사 그런데 가서 요리 집에 가서 회의를 허는디, 김립이가 돈을 가지고 씨인게 냄새가 벌써 난단 말이여. 그러게 다름 사람들은 다 말을 듣는디, 신익희하고 이시영이, 이동녕은 한 번도 출석을 안했다. 이시영이허고가 틀어. 애초에 도둑놈의 돈 쓰지 않겠다 헌 사람. 안창호는 그냥 그 자리에 와 희의허러. 안창호는 좀 더 너그럽거든. 그렇게 ‘돈이 이것이 어디서 나왔는가 이상시러운 돈이다’ 허도, 회의하는디 안창호는 와. 꼭 그래서 회의를 허는디 그게 임시정부 개조론”이라는 내용이 있다.

이에 의하면, 김립은 횡령자금으로 임정 요인들을 대접·포섭했다. 이동휘 역시 그랬다. 훗날 이동휘는 당시 임정 요인들을 대접하기 위해 100원 정도 썼다고 회상했는데 김립 역시 그 정도 썼을 것이다. 출장비로 사용된 횡령자금만도 1만1500원이나 됐다. 당시 서울에서 상해까지 10원이면 충분했으니 이는 엄청난 거금이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김립은 한인사회당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국내·만주·극동·일본·중국 등에도 횡령자금을 뿌렸다. 우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친구 허헌을 통해 국내로 5000원을 보냈다는 사실이다. 또한 북간도의 국민회 회장 구춘선에게 100원, 한인사회당 산하 만주비서국에 5400원 등 만주에 5500원, 아무르주의 한인사회당 빨치산 지휘부에 2만9900원, 치타의 한인부에 1만9000원, 일본공산주의자들에게 2만9000원, 중국공산주의자들에게 1만500원 등을 뿌렸다. 위의 것만 합해도 11만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그렇게 많은 돈을 김립은 마치 개인 돈처럼 공식적인 논의나 절차 없이 독단적으로 운영했다.

한편 김립과 이동휘에게 대접받은 임정 요인들은 개조론에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으로 갈렸다. 반대 측은 [지운 김철수]의 언급대로 신익희, 이시영, 이동녕 등 기호계열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찬성 측은 공산주의계열은 물론 평안도계열의 민족주의자 안창호였다. 당시 안창호는 공산주의에 경도됐기 때문이 아니라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하고 나아가 김립과 이동휘가 쓰는 자금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했다.

일제의 정보보고에 의하면, 이승만은 상해 도착 후 숙소에서 주요 한국인들은 물론 주요 외국인들과도 회견을 거듭했다. 임정의 내막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오영섭 교수의 ‘이승만의 상해 체류 활동’에 의하면, 이승만이 숙소에서 만난 주요 한국인 중에는 원로 독립운동가 김가진이 있었다. 그는 이승만에게 “임정 인사들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아야 합니다. 이곳에서 너무 많은 일을 이루려 하면 안 됩니다. 조용히 상황전개를 살피시기 바랍니다”라고 조언했다. 그 조언을 비롯해 다양한 정보를 통해 이승만은 김립과 이동휘가 모스크바 차관을 무기로 임정 개조운동을 벌이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1920년 12월 28일 오후 7시에 있었던 대한거류민단 환영회에서 이승만이 한 연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승만, 반공친미 천명하며 이동휘와 대립각

환영회 전말은 1921년 1월 1일자 [독립신문] 제89호의 ‘이승만의 환영회’에 자세히 기록됐다. 하지만 독립신문에는 이승만의 격려사만 실려 있고 반공친미 노선은 실리지 않았다. 당시 반공친미 노선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승만의 반공친미 노선은 일제의 정보보고에 실려 있다. [한국민족운동사료]에 의하면, 이승만은 환영회 연설에서 “독립운동에 대해 노국(露國) 과격파의 원조를 빌리려고 하는 자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국 과격파의 원조를 빌리려고 하는 자’는 당연히 한인사회당과 동조자들이었다. [임병직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이승만은 공산당 원조를 찬성하는 자들에 대해 “그것은 조국을 다시 공산주의 국가의 노예를 만들자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공산주의 자체에 대해서도 “민주주의에 반대되는 사상” 또는 “공산주의 사회는 노예생활을 말하는 것”이라 비판했다. 이승만은 환영에서도 그런 논리로 공산주의를 언급했을 것이다.

소련 공산체제가 붕괴한 현 시점에서 이승만의 공산주의 비판은 설득력을 가진다. 하지만 공산주의를 민족과 계급의 ‘해방 사상’으로 신봉하던 당시 공산주의자들 또는 좌경화된 청년들은 공산주의를 민족과 계급의 ‘노예 사상’이라 비난하는 이승만에게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승만은 임정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비판했다. 공산주의 비난에 뒤이어 이승만은 ‘오로지 미국의 성의 있는 원조에 신뢰할 것’이라는 의견을 천명했다. 그렇게 천명된 이승만의 반공친미 노선은 한인사회당의 반미친공 노선과 정반대였다. 두 노선의 타협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거의 불가능했다.

이동휘, 모스크바 차관문제 추궁당하자 사퇴

환영회 이후 이승만과 이동휘는 노골적으로 노선투쟁을 벌였다. 예컨대 1921년 1월 1일 임정 신년축하식 석상에서 이동휘는 “금년은 완전한 독립으로 한성으로 돌아갈 해가 되리라”고 했다.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그들의 원조를 받아 무력투쟁을 벌이면 올해 안에 독립을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즉, 임정은 새로운 반미친공 노선을 결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자 이승만은 “우리의 목적이 명일이나 금년 내로 아니 달(達)할지라도 낙심하지는 맙시다. 우리의 성공은 대주재(大主宰) 하나님께 위임하고 우리는 적을 파멸시킬 실력만 예비합시다”라고 했다. 단기간에 완전독립은 불가능하니 실력 양성에 주력하자는 의미였다. 요컨대 임정은 새로운 반미친공 노선이 아니라 기왕의 반공친미 노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승만과 이동휘의 노선투쟁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정점을 찍었다. 1921년 국무회의는 1월 3일 처음 개최됐다. 그 국무회의에서 이동휘는 이승만에게 위임통치청원을 해명하라고 요구했다. 그것은 이동휘가 임정에 부임한 이래 이승만을 축출하려 할 때마다 제기했던 주장이었다. 이동휘의 해명 요구에 이승만은 이미 지난 일이고 당시 상황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응수했다.

두 번째 국무회의에서 이동휘는 대통령의 행정 결재권을 국무총리에게 이관하라고 요구했다. 그 또한 이동휘가 이승만을 축출하려 할 때마다 제기했던 주장이었다. 그 주장에 이승만은 임정의 안정을 위해 현상 유지가 중요하다고 응수했다. 마지막 세 번째 국무회의에서 이동휘는 위원회제를 제안했다. 그에 대해 이승만은 위원회제는 한성정부의 정신이 아니므로 수용할 수 없다고 응수했다.,지운 김철수.에 의하면, 이동휘가 “국무회의를 하다가 의자로 이승만을 친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세 번째 국무회의에서 그랬을 것이다. 의자로 이승만을 치기까지 했다는 것은 국무총리를 그만둘 결심이었다는 뜻이다. 1921년 1월 24일 이동휘는 자신의 임정 쇄신안을 이승만이 무시했다는 명분으로 총리직을 사퇴했다.

그런데 이동휘 사퇴와 관련해 ,백범일지.에는 “이 사건(모스크바 차관사건-필자 주-)으로 인해 임시정부에서 이동휘에게 죄를 물으니 이씨는 총리의 직을 사직하고 러시아로 도주했다”고 언급돼 있다. 그 기록에 의하면 이동휘가 사퇴한 진짜 이유는 모스크바 차관문제였다. 분명 이승만이 이동휘에게 모스크바 차관문제를 추궁했을 것이다.

그래서 궁색해진 이동휘는 사퇴하고 도주했던 것이다. 그렇게 만든 배후는 김립이 확실하다. 세 차례의 국무회의에서 이동휘가 요구한 위임통치청원 해명, 국무총리에게 행정 결재권 이관, 위원회제도 시행은 물론 임시 모면을 위한 사퇴와 도주 등은 김립이 즐겨 쓰던 공작 방식이었다. 따라서 이동휘가 사퇴했다고 해서 김립과 한인사회당이 임정을 포기했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도리어 기왕의 임정을 파괴하고 임정을 새로 개조해 장악하려는 공작이 본격화됐다. 이동휘의 사퇴는 임정 분란의 끝이 아니라 본격적인 노선투쟁의 신호탄이었다.

※ 신명호 - 강원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부경대 사학과 교수와 박물관장직을 맡고 있다. 조선시대사 전반에 걸쳐 다양한 주제의 대중적 역사서를 다수 집필했다. 저서로 [한국사를 읽는 12가지 코드], [고종과 메이지의 시대] 등이 있다.

202310호 (2023.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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