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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9)] '춘향전' 통해 그려보는 19세기 조선 감옥 

한겨울에 문살조차 없고 벽에는 구멍 숭숭 

면회는 자유로웠지만 겨울 추위· 여름 해충에 죄수들 고충
먹을 것 부족해 가족들이 옥바라지하다 가산 탕진하기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에서 춘향이 신문을 당하는 장면. 죄인을 의자 모양 형틀에 앉혀 묶어놓고 형장으로 정강이를 때리면서 자백을 받아내는 형문을 재현했다. / 사진:한국영상자료원
조선시대 각종 범죄에 대한 재판 기록이 적지 않게 남아 있다. 어떤 범죄가 어떻게 발생했는지 알아볼 수 있는 자료도 많은 편이다. 최근 전주대 연구팀이 300여 년에 걸쳐 중대 국사범의 재판 내용을 모아놓은 [추안급국안]의 번역을 완료했는데, 요즘 책으로 90권이나 되는 방대한 양이다. 이밖에도 정조 임금이 판결한 살인 사건 1100여 건에 관한 기록인 [심리록]이나 다산 정약용의 [흠흠신서]도 형사 사건의 수사 내용과 재판 과정을 알아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렇게 범죄 사실에 관한 내용과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 상당히 남아 있는데, 대부분 정치적 사건이나 살인과 같은 큰 범죄에 대한 기록이다. 이런 사건에 비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일반 범죄에 관한 기록은 쉽게 보기 어렵다. 특히 죄수가 판결을 받기까지 생활하는 감옥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1878년 약 5개월 동안 서울에서 감옥살이를 한 프랑스인 신부 리델(1830~1884) 주교가 쓴 수기 [나의 서울 감옥 생활 1878(살림출판사]이 최근 번역됐다. 이 책에는 당시 서울 포도청 감옥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 있다. 포도청 감옥의 평면도를 비롯해 사형을 집행하는 구체적 방법이나 포졸의 난폭함 등을 자세히 적었다. 리델 주교의 이 기록은 19세기 말 서울 감옥의 실상을 아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내국인의 기록으로는 김구나 이승만 같은 저명한 인물이 남긴 자료도 있다. 이들이 남긴 회고록 등에는 자신의 감옥 생활에 대한 내용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조선 감옥의 실상을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기록은 조선이 이미 개방의 물결을 타고, 이전과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던 시기의 자료들이다.

19세기 조선 서민의 일상을 볼 수 있는 자료로는 소설을 빼놓을 수 없다. 변사또의 수청 요구를 거절한 춘향은 관장의 명령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재판을 받고, 여기에 관청에서 발악하며 관장을 능욕했다는 죄가 더해져 감옥살이를 한다. 춘향은 3년동안 형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로 남원의 감옥에 갇혔다가 암행어사가 다시 재판을 해 풀려나게 된다. [춘향전]의 후반은 춘향의 감옥살이와 관련된 내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읽어보면 19세기 조선 감옥의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

변사또 수청 거절해 3년 동안 옥에 갇힌 춘향


▎정약용의 애민정신을 기리는 다산문화제에서 곤장 체험 행사가 열리고 있다. 일반적으로 춘향이 당한 고문을 곤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춘향이 소설에서 받은 고문은 ‘형문’이다. / 사진:남양주시
남원에 부임한 변사또가 처음 시작한 공식 업무는 기생점고였다. 수많은 다른 일을 제쳐두고, 춘향을 불러 수청들이기 위해 먼저 기생명부와 실제 인원을 확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 기생명부에 춘향 이름이 없었다. 춘향이 다른 사람을 기생으로 대신 넣고 자신은 빠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대신 넣는 것은 합법이었지만, 변사또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춘향을 잡아다가 수청을 강요한다.

춘향이 변사또의 수청 요구를 거절하자 변사또는 춘향의 말 중 몇 마디를 트집 잡아 그를 죄인으로 만든다. 변사또가 제시한 춘향의 죄목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관청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관청에 와서 발악을 하며 사또를 능욕한 것이다. 명령을 거역했다는 첫째 죄는 기생점고에 나오지 않은 것과 수청을 거절한 것이고, 사또를 모욕했다는 둘째 죄는 변사또가 두 임금을 섬길 사람이라고 했다는 춘향의 발언이다.

변사또가 지적한 춘향의 말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남편을 바꾸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남편을 바꾸지 않으려는 것을 죄라고 하며, 남원부사라는 권력으로 나를 겁탈하려하니, 사또는 두 임금을 섬길 사람이다”라는 것이었다. 춘향이 자신에게 두 임금을 섬길 사람이라고 말했으니, 이것은 자신을 역적이라고 말한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춘향이 관장을 모욕했다는 것이 변사또 논리다. 춘향은 이렇게 수청을 들라는 사또의 요구를 거절하는 과정에서 한 말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춘향의 재판은 이렇게 시작된다.

조선시대에 고문은 죄인의 자백을 받기 위한 합법적 방법이었다. 춘향도 자신의 죄를 자백하기 전 먼저 고문을 당한다. 그런데 이 재판에서 춘향이 자백할 것이 없으니 변사또의 수청을 들겠다고 말하지 않는 한 재판이 끝날 길이 없었다. 춘향이 계속 고문을 당하면서 감옥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일반적으로 춘향이 당한 고문을 곤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묘사한 것을 보면 형틀에 엎어놓고, 길고 넓적한 곤장으로 엉덩이를 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춘향이 소설에서 받은 고문은 ‘형문’이다. 죄인을 의자 모양 형틀에 앉혀 묶어놓고 길이 1m, 폭 2.5㎝, 두께 0.6㎝의 형장으로 정강이를 때리면서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다.

형장으로 치는 매는 매우 혹독한 것이었으므로, 한 번에 30대 이상을 칠 수 없도록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소설에서도 춘향은 30대의 형장을 맞았다. 따라서 형장을 30대 이상 칠 수 없다는 것은 당시 일반인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임을 알 수 있다. 춘향은 형장을 맞은 후 칼을 쓴 채 감옥에 갇히게 된다.

혹독한 매질 ‘형문’… 춘향도 형장 30대 맞아


▎조선시대 죄인의 조사·판결서를 모은 〈추안급국안〉 표지. 〈추안급국안〉처럼 큰 범죄에 대한 기록은 많은 반면, 사소하다고 할 수 있는 일반 범죄에 관한 기록은 쉽게 보기 어렵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형장이나 곤장을 치는 일은 각 관아 하인들이 맡았는데, 이들을 집장사령이라고 부른다. 집장사령은 대체로 천민이다. 양반인 사또와 중인인 아전의 명령을 받아 일을 하는 관청에서 최하위 계층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그러나 사람을 때리는 일에는 전문가였으므로, 스스로 자신의 업무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춘향전]에서 집장사령들이 저희끼리 이야기하는 대목을 보면 이들의 자부심이 무엇인지 잘 드러난다. 먼저 이들 중 한 사람의 말을 들어보기로 한다.

“내 자랑 같다마는 한마디 해보겠다. 한다하는 도둑 잡는 포교의 우두머리, 병방의 군관, 육방의 아전, 관아의 여러 관속들에게 평소에는 내가 설설 기는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속으로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앙심을 잔뜩 품고 있다가, 혹시 붙잡혀 와서 내가 매를 칠 기회가 오면, 엄지손가락을 잔뜩 눌러서 때려 속으로 곯게 엉덩이를 치는 방법이 있다.”

이 집장사령의 말을 통해 곤장이나 형장을 칠 때 집장사령이 어떻게 매를 치느냐에 따라 그 강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관가에 가 매 맞을 일이 없는 사람에게는 집장사령이 그렇게 두려운 존재가 아니지만, 언제 관가에 가 매를 맞을지 모르는 일반 백성에게는 이들 집장사령이 무서운 존재였음은 분명하다. [춘향전]에서 이들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심술이 동풍 안개 속에 수숫잎 꼬이듯”하다고 했는데, 이 말은 심술이 사납고 성질이 순하지 않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이들 집장사령의 매질에 대해 언급했다. 사또가 엄하게 다스리라고 해도 매를 살살 때리는 것은 집장사령이 뇌물을 받은 것이고, 사또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갑자기 맹렬하게 때리는 것은 개인적 원한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집장사령의 이러한 행태는 당대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집장사령의 대화에는 자신들이 지방 관청에서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말하는 내용도 있다.

중국 시인 두보가 지은 [팔진도(八陣圖)]는 두보가 제갈공명의 팔진도 유적을 보고 지은 시다. 이 시에는 제갈공명이 쌓아놓은 돌을 보고 읊은 ‘강류석부전(江流石不轉)’이라는 구절이 있는데, “강물은 흘러도 돌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구절이, 사또는 임기제로 바뀌지만 아전들은 대대로 세습해 바뀌지 않으므로, 지방 관청 일을 중앙에서 내려간 사또보다 지역 토박이인 아전들이 좌지우지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런데 [춘향전]에서 집장사령들이 “강류석부전이라. 우리네는 바뀌지 않지”라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이는 아전만이 아니라 군노나 사령 같은 하급직도 지방의 행정을 장악하는 데 한몫을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19세기 조선의 감옥이 어떤 모양이었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근래 전문 연구자들의(임재표, 심재우, 이은석) 연구를 통해 사진이나 발굴 자료가 알려지고, 당대 풍속화가의 그림을 통해서도 감옥의 모양을 추정해볼 수 있게 됐다. 아울러 이런저런 회고록 내용도 19세기 후반 조선 감옥의 모양을 재현해 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19세기 조선 사람 눈에 비친 감옥 모습을 [춘향전]만큼 구체적으로 묘사해 놓은 자료는 없는 것 같다.

춘향이 관장을 능욕했다는 죄명으로 형장을 맞고 기절하자, 변사또는 감옥을 지키는 옥사쟁이를 불러 춘향을 감옥에 가두라고 명령한다. 옥사쟁이는 두꺼운 널빤지로 만든 칼을 춘향 목에 씌우고, 감옥으로 데려간다. 관청 문을 나서자 밖에 있던 춘향의 어머니 월매가 춘향을 붙잡고 넋두리를 한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재미있는 내용은 춘향이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매를 맞았다는 말을 들은 남원의 왈짜가 구름같이 몰려왔다는 것이다.

형장 치는 집장사령 등 하급직들의 폐습


▎최근 전주대 연구팀이 300여 년에 걸쳐 중대 국사범의 재판 내용을 모아놓은 〈추안급국안〉의 번역을 완료했다. / 사진:연합뉴스
조선시대 왈짜는 요즈음 깡패나 불량배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들은 기생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기생이 형장을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됐다는 얘기를 들은 왈짜들은 모두 몰려와 시끄럽게 떠들고 놀면서 춘향을 메고 감옥까지 간다. 옥사쟁이가 이들에게 조용히 해달라고 부탁하자, 기생이 감옥에 갇히면 왈짜가 와서 떠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감옥살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감옥 건물에 온돌이 있다고 해도 제대로 불을 때지 않기 때문에 겨울이면 몹시 춥다. [춘향전]에서 감옥을 묘사한 대목을 보면 “문살도 제대로 없고, 벽에도 구멍이 숭숭 뚫렸다”라고 했다. 그러니 겨울이면 바람이 들어오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눈보라까지 들이친다. 또 여름에는 “벼룩과 빈대가 등을 뜯고, 모기가 물어서” 죄수는 괴로운 나날을 지낼 수밖에 없다.

감옥에 갇힌 춘향을 외부인이 면회하는 장면이 소설 속에 여러 차례 나타나는데, 어머니 월매는 수시로 춘향에게 먹을 것을 전해주고, 빨래한 옷도 전한다. 월매는 자려다가도 춘향이 생각이 나면 감옥에 가 그를 만나곤 했다.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거지 행세로 춘향을 면회할 때, 옥문 틈으로 손을 잡을 수 있었지만, 입을 맞추기는 어려웠다. 옥문 창살 틈이 좁아 얼굴을 맞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죄수가 자신이 갇혀있는 감방 밖으로 나와 면회객을 만날 수는 없지만, [춘향전]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방 감옥에서 면회는 상당히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춘향이 점치는 대목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춘향이 간밤에 꾼 이상한 꿈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마침 옥 밖으로 점쟁이가 “점치라”고 소리치며 지나간다. 춘향이 옥사쟁이에게 그 점쟁이를 불러달라고 하자 옥사쟁이가 바로 점쟁이를 불러주고, 점쟁이는 춘향이 “곧 풀려날 것”이라고 꿈풀이를 해준다.

어떤 사람이 감옥에 갇히면, 죄수 자신은 물론 그 가족도 커다란 고통을 겪지 않을 수 없다. 조선시대 감옥에 갇힌 죄수의 음식은 국가에서 대어주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기록에서 옥바라지하는 데 가산을 탕진했다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타난다. 특히 장기간 감옥에 갇혀 있게 되면 그동안 들어가는 경비가 너무 많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

조선시대 옥바라지의 구체적 내용을 [춘향전]에서 볼 수 있는데, 월매가 딸 춘향의 옥바라지하는 모습을 통해 몇 가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우선 감옥에 갇혀있는 기간이 문제다. 춘향이 감옥살이를 한 기간은 햇수로 3년이다. 이는 춘향이 이도령에게 부친 편지에서 “헤어진 지 올해가 3년”이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다. 춘향은 이도령의 아버지가 서울로 영전해 가면서 이도령과 헤어졌고, 며칠 후 새로 부임한 변사또가 자신의 수청 요구를 거절한 춘향을 감옥에 집어넣었다. 춘향은 변사또가 남원을 다스리는 기간 내내 감옥에 갇혀 있어야 했다.

3년 이상 장기 복역한 ‘구수(久囚)’도 많아

춘향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에도 수시로 불려나가 매를 맞고, 또 수청을 들라는 압박을 받으니 “온갖 병이 생겨나서, 죽을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춘향의 마음을 안 월매는 어떻게 해서라도 딸을 살리려고 한다. 매 맞은 자리에 난 상처를 치료하느라 약을 지어서 먹여야 했고, 제대로 먹지 않는 춘향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해가야 하며, 이도령이 그리워 난 상사병에 효험이 있을까 해 무당을 찾아가 굿을 해보기도 한다.

월매는 3년 동안 딸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가산을 탕진하게 된다. 암행어사가 된 이도령이 거지로 변장해 월매의 집을 찾아가니 화려하던 과거 모습은 찾아볼 길이 없는 폐가가 돼있었다. 월매는 이도령의 거지꼴을 보고는 낙담해 그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는데, “옥바라지하느라 집안 가구나 물건은 모두 팔았고, 빚을 갚느라 집도 팔아서 이제는 거지가 됐다”고 말한다.

조선시대 재판의 문제 중 하나는 판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장기간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 많았는데, 춘향이 3년간 갇혀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을 통치하는 기준이 된 최고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재판에 소요되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 사형에 해당되는 죄는 30일, 귀양에 해당되는 죄는 20일, 매를 맞는 것으로 끝나는 작은 죄는 10일 이내에 재판을 끝내야 한다. 부득이 시한을 넘길 경우에는 반드시 그 사유를 갖춰 임금에게 보고하도록 돼있었다. 그러나 이 원칙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판결을 하지 않고 5년이나 10년씩 감옥에 갇혀 있는 오래된 죄인이 많았다. 이를 ‘구수(久囚)’라고 한다.

춘향도 구수가 돼 3년을 갇혀 있었다. 변사또 수청을 거절한 것이 관장의 명령을 거역한 것이 되고, 계속되는 수청 강요에 자신의 요구를 말한 것은 관청에서 발악이 되며, 사또의 부당한 요구를 지적한 말은 관장을 능욕한 죄가 된 것이다. [춘향전]은 허구의 소설이지만, 이 소설에는 당대 사람들이 생각하던 진실이 들어 있다. 이런 소설적 진실은 19세기 조선사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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