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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욱의 평양리포트] 2024 갑진년, 1950년 경인년만큼 위험한가? 

“평양과 모스크바, 6·25 이후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호기” 

북한, 외교의 만조기(滿潮期) 맞아… 3월 푸틴 방북 이후 북·러 밀월 계속될 것
김정은, 모스크바·베이징 한 묶음으로 엮어 한·미·일 vs 북·중·러 신냉전 구도 획책


▎2월 9일 국방성을 방문해 육성 연설하는 김정은. / 사진:연합뉴스
새해 들어 김정은의 광기(狂氣)에 찬 발언으로 한반도에 긴장감이 높아졌다. 대중 강연 때마다 혹시 전쟁이 나는 것 아니냐는 질문도 심심찮게 나온다. 여기에 더해 미국 미들베리 국제연구소의 로버트 칼린 연구원과 지그프리드 해커 교수는 “한반도 상황이 1950년 6월 초반 이후 그 어느 때보다 위험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1994년 1차 북핵 위기 당시 미 국무부 북핵 특사로 활동했던 로버트 갈루치 조지타운대 명예교수도 “2024년 동북아시아에서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을 염두에 둬야 한다”고 경고했다. 이들 전문가의 공통점은 과거 북한과 협상했던 경험이 있으며 바이든 정부가 북한과의 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반면 2007년 이후 10년 동안 평양에서 근무한 세퍼 전 독일 대사는 “1950년 이후 한반도 전쟁 위기가 가장 심각하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북한의 강경 태도는 오래된 협상 패턴”이라고 지적했다. 전쟁 위기론과 협상 패턴론이 대립하고 있다. 과연 2024년 갑진년(甲辰年)은 1950년 경인년(庚寅年) 만큼, 혹은 더 위험한가를 따져보자.

준비 없이 맞은 북한의 기습 남침

우선 남북한의 군사력부터 비교해보자. 1950년 3월 31일부터 4주간 김일성은 박헌영·홍명희 등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으로부터 최종 남침 계획을 승인받았다. 모스크바 러시아 연방대통령 문서보관소에는 김일성이 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에게 남침 승인을 집요하게 요청하는 48통의 전보가 보관돼 있다([다시 본 한국전쟁], 1999). 당시 최강의 소련제 T-34 탱크 242대의 지원도 확약받았다. 북한군은 자체 보유한 7.62㎜ 자주포, 야포 726문, 함정 110정, 전투기 211대와 함께 각종 장비를 지원받아 기갑전력을 증강했다. 만주에서 국공(國共)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족 병력 4만여 명 등 총 20만 명의 병력이 전차를 앞세워 전면 남침을 감행했다.

당시 상당수의 조선족이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참여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진 3년간의 국공내전에 참전한 조선족들은 모두 6만 3000명에 달했다. 조선족 병사들은 조선의용군이라는 이름하에 국공내전에 참여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 국공내전이 끝난 후 중국 공산당의 조선족 부대들은 북한군의 정규 부대로 개편됐다. 중국 인민해방군 제166사는 북한군 6사단으로 개편됐다. 조선족이자 전쟁 초기 호남평야 점령에 공을 세웠던 정성인·방호산은 6사단장이었다. 조선족 부대는 6·25전쟁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실제로 남침의 최전선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반면 남한은 북한의 공격을 방어할 전력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 해방 후 미국의 대한(對韓) 군사원조정책(1948~1950)에서 국군의 기능은 ‘국내 치안유지’였다. 오히려 북한에 대한 공격 억제 정책에 따라 현대전의 핵심 무기인 전차를 단 1대도 보유하지 못했다. 당시 남북한의 전력은 완전 비대칭이었다. 병력은 모든 자원을 다 끌어모아도 10만 명이 안 됐다. 미국이 원조한 M8 그레이하운드 장갑차 27대와 M2/M3 하프트랙 병력수송용 장갑차 24대가 기갑연대에 배치돼 있을 뿐이었다. 남침 사흘 만에 북한군 주력 105전차부대가 서울을 점령했다. 무기와 병력 면에서 중과부적이었고 불가항력이었다. 김일성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으로 군량미를 확보하면서 1948년부터 남침을 단계적으로 준비했다. 1949년부터는 모스크바를 뻔질나게 드나들며 스탈린의 재가를 채근했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의 애치슨 선언으로 남침은 시간문제였다. 스탈린에게 미군 참전 시 마오쩌둥의 참전 약속 확보만이 최종 변수로 남았다. 김일성은 5월 25일 베이징 방문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의 참전 등 지원을 보장받았다. 평양에 대한 중·소의 완벽한 백업이 형성됐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시작한 당시 서울 정국은 아수라장이었다. 일부는 서울에서 평양의 김일성과 연락하며 남한 정국을 흔들었다. 남로당 괴수 박헌영은 무장봉기와 테러를 선동했다. 신생민주주의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혼란이었다. 해방 후 정국 혼란 속에서 국군도 여전히 체계가 잡히지 않은 신생 군대였다. 남침 후 4개월이 지나서야 전차의 필요성을 절감한 국군은 미군으로부터 M36 잭슨 경전차 6대를 교육용으로 인수받아 전차부대를 창설했다. M36은 2차대전 당시 사실상 경전차 취급을 받았으나 국군 입장에서는 소중한 존재로 이후 200여 대가 한국에 들어왔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남북한의 군사력은 균형을 이루어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적의 ‘닥치고 공격’에 속절없이 방어선이 무너졌다. 미군의 군사교리에 따라 군령체계를 구축하고 반격할 각종 부대를 창설했다. 실전 경험이 있는 군대와 맞부딪치며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대한민국 군대는 미군으로부터 현대적인 군사 전술을 피를 흘려가며 습득해갔다. 1951년 6월 정전협정 체결까지 전황은 38도선을 중심으로 한 고지전의 연속이었다.

북한군의 핵 공격 방어해야 하는 과제


▎1953년 7월 정전협정에 서명하는 김일성.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 중령 페렌 바크는 “한국전쟁은 힘을 시험한 전쟁이 아니라 의지를 시험한 전쟁이었다”고 회고했다([이런 전쟁], 1963). 그는 공산주의자들이 우세한 군사력으로 남한을 적화시키려는 야망이 강했다고 평가했다. 미국을 비롯한 자유주의 세계가 지상군을 파견해 즉각 대응한 것은 대한민국을 수호하려는 신의 축복이었다. 특히 그는 전장에서 조직적인 훈련을 받지 못하고 기강이 부족한 한국군과 미군의 피해가 적지 않았다고 한탄하고, 군은 내일 축구 시합에 나가는 선수들처럼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6·25전쟁의 교훈은 정국 혼란에 따른 국론 분열, 남침에 대비하지 않는 부실한 군사력 및 모호한 국제정세에 대한 외교력 부재 등이었다. 특히 ‘허약함은 침략을 부른다’는 명제에 따라 이승만 대통령이 정전협정의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그나마 한국전쟁이 후손들에게 남긴 유일한 보상이었다.

전쟁 발발 후 70년이 지나면서 남북한 간에 다양한 변화가 일어났다. 2024년 세계 군사력 평가 순위에서 한국은 5위에 올랐다. 반면 북한은 36위를 기록했다. 전쟁 수행 능력에서 남한의 경제력은 북한의 물자동원 능력을 압도한다. 국방예산 항목에서 한국은 약 53조원으로 11위, 북한은 4.6조원으로 58위다. 여기까지는 남한의 군사력이 북한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국의 군사력평가 전문 민간업체인 글로벌파이어파워(GFP) 평가는 북한의 핵무기를 포함하지 않고 있다. 재래식 무기에서는 남한이 앞서지만 핵무기를 포함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핵무기의 비대칭성은 재래식 무기를 무력화시킨다. 한·미동맹의 확장억제 전략으로 북한군의 핵 공격을 방어해야 하는 과제는 우리 안보가 미국의 대통령 선거 결과에 상관없이 직면해야 하는 도전이다. 2월 5일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이 한국 독자 핵무장에 찬성한다는 민간학술단체의 여론조사 결과는 최근 북핵 위협에 대한 국민들의 실질적인 체감을 반영한다. 최종현 학술원이 발표한 제2차 북핵 위기와 안보 상황 인식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반도 주변 여러 상황을 고려했을 때 한국의 독자적 핵 개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응답자 72.8%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이 가운데 핵무장이 매우 필요하다는 응답은 21.4%, 필요한 편이라는 응답은 51.4%였다. 국민들은 북핵 위협이 실존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또한 1500만여 명이 거주하는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이 비무장지대에서 매우 근접해 있다는 것도 심각한 안보 취약 요인이다.

최근 김정은 위원장은 묘향산에서 북한 지도부에게 지방경제의 고난과 기본적인 물자 부족 등을 강하게 질책했다. 군수산업에 주력하고 인민경제를 경시한 결과인데 누가 누구를 질책한단 말인가? 김정은은 1월 28일 정치국 확대 회의에서 인민복지 증진을 위한 ‘지방발전 20×10 정책’을 발표했다. 그는 “이 정책은 이상과 선전이 아닌 실제 계획성을 띤 거대한 변혁적 노선”이라며 이행을 강력히 주문했다. 매년 20개 군에 현대적인 지방공업공장을 건설해 10년 안에 전국 인민의 초보적인 물질문화 생활수준을 한 단계 발전시키겠다는 내용이다. 도별로 해마다 2개 군에 지방공장을 건설하라면서 인민군을 순차적으로 동원하는 계획을 지시했다. 그러면서 집행이 부진할 경우 담당자들에게 책임을 묻겠다는 경고도 잊지 않았다.

“김정은 정권의 균열은 지방에서 발화될 것”

공산주의 국가는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다. 특히 수도는 극소수의 통치 권력만 거주할 수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 시대 모스크바는 당원 800만 명만이 살 수 있었다. 마오쩌둥 시대 베이징은 진성 공산당원만 거주할 수 있었다. 모스크바로 이동하는 유일한 방법은 모스크바 시민과 결혼하는 길이다. 수천 명의 외지인이 거주를 위해 모스크바·레닌그라드 시민과 위장 결혼을 했다. 이러한 전통은 평양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2500만 명의 주민 가운데 200만여 명의 핵심 계층 노동당원만이 평양에 거주할 수 있다. 지방 거주자가 평양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는 경우 거주를 이전할 수 있지만 매우 예외적이다.

과거 남북 당국 간 협상차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두 개의 북한’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김일성은 6·25전쟁 이후 평양을 북한의 쇼윈도 도시로 건설했다. 지하 100m의 방공호 지하철을 건설하고 시가지 중앙에 대형 광장을 만들면서 대로변에는 고층 아파트를 신축해 도시 전체를 전시장으로 꾸몄다. 인민들이 규모에 압도돼 면종복배할 수 없도록 거대하게 설계했다. 평양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왕궁이 됐다. 평양의 특권층들만이 이용 가능한 대형 병원·놀이장 등으로 외국 관광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평양만 벗어나면 바로 ‘다른 나라’가 나타난다. 멀리 들판에는 식량 부족으로 ‘쌀은 공산주의다’라는 붉은색 대형 입간판이 세워져 있다. 궁색한 빈곤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협동농장과 검은 연기를 내뿜는 허름한 공장이 평양 외곽부터 초라하게 서 있다. 도로는 90%가 비포장이고 철도는 지난해 함경남도 열차 사고 때처럼 헐떡거리며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오르고 있다.

북한 경제에서 중앙인 평양과 지방인 비평양의 격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흉내 내서 평양을 전시장으로 만들어놓고 지방은 자력갱생을 강조해왔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지방의 생명선이었던 북·중 국경이 3년간 봉쇄되고 그나마 먹고사는 데 숨통을 열어줬던 장마당도 제대로 작동되지 않아 지방 인민들의 삶은 1995~1998년 고난의 행군 수준과 다르지 않게 됐다. 김정은은 러시아에 탄약과 무기를 넘겨주고 식량이나 인민 소비품을 받는 대신 첨단 우주항공 기술 및 핵추진잠수함 등 군사력 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다. 북한 인구 2500만 명 중에서 평양 주민과 핵심 당원 200만 명을 제외한 90%의 인민들이 영위하는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삶은 점차 임계점에 도달하고 있다.

김정은이 직접 10개년 계획을 지시했지만 중앙에서 예산과 원부자재를 지원하지 않는데 시범 공장을 건설하라고 하면 지방 관료들은 죽지 않기 위해 돌려막기로 공장을 완공한다. 하지만 예산 전용으로 기존 사업은 중단 또는 위축되는 풍선 효과가 발생한다. 지방 인민들의 비루한 삶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각종 미사일 발사에만 주력한다면 평양과 비평양의 격차는 심화될 수밖에 없으며 선군 정책 기조를 변경하지 않으면 지방의 삶은 10년은커녕 20년이 지나도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마침내 김정은 정권의 균열은 지방에서 발화될 것이다.

북한은 1946년 토지개혁의 결과로 6·25 남침 직전 식량 생산량이 해방 당시와 비교해서 2배에 이르는 240만 톤에 달했다. 전쟁 수행 능력이 구비됐던 백호의 해였던 1950년과 기초 생활물자도 제대로 공급되지 못하는 청룡의 2024년은 상황이 다르다.

김정은, 남측 상대로 전쟁형 통일전선전술 구사


▎북한 잠수함 김군옥영웅함 앞에 선 김정은. / 사진:조선중앙통신
다만 작금의 국내 정치 분열은 해방 정국 당시에 못지않게 우려스럽다. 남침을 감행한 북한의 최고지도자를 야권에서 ‘우리…’로 표현하고,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을 ‘북풍음모론’으로 몬다. 어떤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통일전쟁론 세미나’를 개최하는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안보에서 국민의 분열은 국가의 방어 능력을 극대화하지 못한다. 김정은은 남한 영토의 점령·수복 및 회복의 헌법 명기를 선언했다.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처럼 기습 공격에 그치지 않고 우도 등 서해 취약 도서를 일시적으로 점령하는 비상사태가 전개될 수 있다. 서해지도를 펼쳐 놓고 꼼꼼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갑진년 시작과 함께 김정은의 기괴한 행태가 시작됐다. 고체연료에 의한 극초음속 중거리미사일(IRBM) 발사 등 군사적 도발과 함께 제1 적대국 선언, 남한 영토 점령·평정 및 수복 등의 헌법 명기 등을 거론했다. 특히 김정은 위원장은 통일·화해·동족·삼천리 금수강산·자주·평화통일 및 민족대단결 등 과거 평양에서 ‘우리민족끼리’를 강조할 때 단골로 끄집어냈던 감성적 표현과 용어의 삭제를 지시했다.

이들 용어는 과거 북측이 남북 협상에서 남측의 협력을 구하거나 지원을 받고자 할 때마다 전가의 보도처럼 끄집어내던 단골 화술이었다. 북한은 대남 적화통일 방침을 포기한 적이 없기 때문에 북한과의 협상은 항상 난관이었다. 평양에서 남측 인사를 상대로 어린이와 여성들이 부르던 ‘반갑습니다’라는 북측 노래는 남측 진보 세력을 회유하는 감성형 통일전선전술이었다. 평양 협상에서는 면전에서 대놓고 ‘민족대단결로 미제를 축출하자’는 이상한 선동도 들어야 했다. 뜬금없는 통미봉남(通美封南) 전략으로 남측을 배제하고 무시했다. 군사용 전용 우려에도 불구하고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논리로 인민들을 위해 한 해 최대 30만 톤까지 쌀을 지원했다. 햇볕을 강하게 쐬면 외투를 벗을 것이라는 동화 같은 이솝우화를 끄집어내며 ‘사랑의 불시착’ 드라마가 현실에서 실현되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북한은 6차례의 핵실험으로 전 세계에서 9번째 핵무기 보유국이 됐고 남한 영토의 완정(完整)으로 응답했다. 1월 들어 북한의 군사 도발은 급가속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이후 미 본토와 괌 기지, 한국 등을 겨냥하는 고체연료 대륙간탄도 미사일(ICBM), 고체연료 극초음속 중거리탄도미사일(IRBM), 핵어뢰 등을 연쇄적으로 발사했다. 또 1월 24일 서해, 28일 동해에 이어 30일 등 연속 3차례에 걸쳐 서해로 전술핵 탑재가 가능할 것으로 추정되는 순항미사일(SLCM)을 쏘았다. 온갖 종류의 미사일 고도화와 핵추진잠수함 개발로 한·미 양국을 위협해 협상력을 높이거나 기습적으로 도발하려는 전술이다.

평양 군부는 디젤엔진을 사용한 전술핵잠수함 개발에 이어 핵추진 전략핵잠수함 건조에 속도를 내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1월 29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핵추진잠수함 건조 사업의 집행 방안에 대한 중요한 결론을 내렸다”고 보도했다. 2021년 핵추진잠수함 개발 방침을 공개한 후 3년 만에 구체적인 건조 방안·일정 등을 확정해 본격 건조에 나선다는 예고다. 3월 중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북한을 방문할 예정이어서 우크라이나 전쟁에 필요한 대규모 무기 제공을 대가로 러시아의 핵추진잠수함용 소형 원자로 기술 등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다.

김정은이 남측을 상대로 전쟁형 통일전선전술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남북관계의 주도권 회복 전략이다. 전통적으로 서울이 진보 정부에서 보수 정부로 전환되면 평양은 갑(甲)의 주도권 상실에 따른 좌절감으로 2010년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과 같은 군사 도발을 자행했다. 둘째, 투표권은 없지만 4월 남한 총선 및 11월 미국 대선 개입 전략이다. “전쟁이냐 평화냐”의 논쟁으로 남남 갈라치기를 유도하고 미국과 강 대 강 구도를 형성해 트럼프 당선에 유리한 국제정세를 조성한다. 셋째, 성난 민심의 전환 전략이다. 지속적인 경제난에 따른 내부 불만 단속을 위해 3대 악법인 반동사상문화배격법(2020), 청년교양보장법(2021), 평양문화어보호법(2023)을 제정하는 등 한류 문화 유입에 극도로 반감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강력한 지원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우크라이나 전쟁 등으로 미국의 전력이 분산된 국제안보의 공백을 활용하는 전략이다. 유엔 대북제재는 물 건너갔고 북한 외교의 만조기(滿潮期)로 강공이 가능하다는 판단이다. 3월 이후 푸틴의 방북으로 북·러의 밀월은 계속될 것이다. 6·25전쟁 이후 평양과 모스크바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호기를 맞고 있다.

지난해 100세로 서거한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된 1973년 파리평화회담은 월맹이 미군을 철수시켜 베트남을 공산화한 전형적인 평화형 통일전선전술이었다. 북한은 2국가론을 내세우며 전쟁형 통일전선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스마트한 군사와 외교전략 정교하게 추진해야

북한이 전쟁형 통일을 선언했지만 우리는 평화통일을 포기할 수 없다. 통일의 원칙과 가치를 재정립하면서 새로운 통일방안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올해는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채택된 지 30주년이 되는 해다. 1994년 발표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다양한 시도와 성과에도 불구하고 북핵이라는 엄중한 현실 속에서 수명을 다했다. 껍데기만 남은 민족끼리 개념보다는 휴머니즘 가치와 자유주의 이념을 공유하는 새로운 통일 비전이 마련돼야 한다. 올 한 해 북측의 노이즈 마케팅을 예의주시해야 하지만 새로운 시대정신에 맞는 통일방안을 마련하는 일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전쟁은 억지가 최우선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전략이 상책이다. 적은 공격으로 얻는 것보다는 잃는 것이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공격을 주저할 수밖에 없다. 다만 ‘싸울 수밖에 없다면 이겨야 한다’는 것이 클라우제비츠 전쟁론의 핵심이다. 김정은은 외교의 만조기(滿潮期)를 맞아 모스크바와 베이징을 한 묶음으로 엮어서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냉전 구도를 형성하고자 한다. 스마트한 군사와 외교전략을 동시에 정교하게 추진한다면 2024년 적은 속칭 ‘치명적 타격’은 물론 국지적 도발도 함부로 감행하지 못할 것이다.

※ 남성욱 - 고려대 통일융합연구원장.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고려대 북한학연구소장을 지냈다. 2013년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사무처장을 지낸 뒤 후학 양성과 북한 문제 연구에 전념해오고 있다. [김정은의 핵과 경제](2022, 박영사), [북한 여성과 코스메틱](2017, 한울아카데미), [한반도 상생프로젝트](2009, 나남) 등 북한 문제에 관한 다수의 책을 펴냈다.

202403호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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