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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률의 노래하는 한국사(27)] 포크송 전성시대와 바보들의 행진 

통기타·청바지·생맥주… 자유와 낭만 꿈꾼 70년대 청년문화 

통기타 반주로 함께 노래하며 청년문화 일구고 기성세대에 저항
1970년대 중반 인기 절정, 가요계 정화·대마초 파동으로 내리막


▎1975년 4월 서울 외곽 교외선 기차 안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춤추는 청년들. 1970년대 청년문화의 단면이다. / 사진:서울시시사편찬위원회
"모닥불 피워놓고 마주 앉아서 /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박인희, ‘모닥불’, 1972)

1970년대 어느 해변 모래사장. 모닥불을 피워놓고 청춘남녀 여럿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운다. 자기소개가 끝나고 어색함이 차츰 가시면, 예능 담당이 통기타를 집어 들고 분위기를 띄운다. 손뼉을 치며 같이 부를 수 있는 포크송이 이럴 때는 알맞다.

“조개 껍질 묶어 그녀의 목에 걸고 / 불가에 마주 앉아 밤새 속삭이네 / 저 멀리 달그림자

시원한 파도소리 / 여름밤은 깊어만 가고 잠은 오질 않네”(윤형주, ‘라라라’, 1972)

통기타 화성에 1970년대풍의 낭만이 춤춘다. 불빛 어른거리는 눈동자엔 젊음의 열정이 타오르고, 홍조 띤 뺨에는 기분 좋은 설렘이 번진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밤의 감성을 파고드는 서정 가요가 가만히 새어 나온다. 별빛이 아롱지는 아름다운 추억의 밤이다.

“검은 빛 바다 위를 밤배 저 밤배 /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둘다섯, ‘밤배’, 1974)

통기타와 포크송의 유행


▎2015에 개봉한 영화 [쎄시봉] 포스터. 1968년 2월 명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송창식과 윤형주가 트윈폴리오를 결성해 큰 인기를 얻었다. / 사진:CJENM
1970년대 청년문화의 단면을 묘사해 보았다. 이 시기 젊은이들의 삶 속에는 포크송이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나라 포크송은 미국 모던 포크(Modern Folk)의 영향을 받아 1960년대 후반에 등장했다. 미국에서는 밥 딜런, 조앤 바에즈 등이 비판적 사회의식을 담은 포크송을 부르며 1960년대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이와 달리 한국에선 포크송이 상업적인 공연, 음반, 방송을 아우르며 1970년대 청년문화의 한 축이 됐다.

통기타(Acoustic Guitar)는 포크송의 정체성을 이루는 악기다. 모던 포크뿐만 아니라 팝, 록, 블루스, 칸초네, 동요 등 다른 장르의 노래들도 통기타 반주로 ‘어쿠스틱하게’ 부르면 포크송으로 받아들여졌다(그래서 한국 통기타 교본에는 ‘포크송 전집’ 같은 제목이 붙곤 했다). 통기타의 화성(和聲)은 말하거나 속삭이는 듯한 포크송 창법과 잘 어울렸다. 화음의 연결로 노래를 감싸주며 작은 목소리도 섬세하게 전달해준다.

통기타 한 대만 있으면 합창도 거뜬했다. 이 악기가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된 것도 ‘함께 부르는’ 노래 문화와 관련이 깊다. 1965년 YMCA(기독교청년회)에서 ‘싱얼롱 Y’라는 노래모임을 만들었다. 토요일 오후마다 종로의 서울YMCA회관 강당에서 통기타 반주에 맞춰 같이 노래 부르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대학생 수백 명이 주최 측에서 나눠준 악보를 보며 팝송, 건전가요, 가곡, 민요, 찬송가 등을 배우고 따라 불렀다.

대학부에 이어 고등부와 성인부도 생겼다. 통기타를 배우려는 청년(청소년)들이 늘어났다. 기타 학원이 곳곳에 들어서고, 교본은 불티나게 팔렸다. 기타 솜씨를 갈고 닦은 참가자들은 모임 무대에 올랐다. 아마추어의 풋풋한 연주와 노래가 호응을 얻었다. ‘싱얼롱 Y’ 모임은 성황을 이루며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유행을 포착한 방송사들이 이런 프로그램을 잇달아 내놓았다. 통기타 음악이 시대를 강타한 것이다.

통기타 붐을 등에 업고 ‘한국적 포크송’의 전형이 만들어진 것은 1968년이었다. 그해 2월 명동의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송창식과 윤형주가 트윈폴리오를 결성했다. 두 사람은 통기타를 연주하며 해외팝송과 번안곡들을 감미롭게 불렀다. 트윈폴리오는 곧바로 TV 음악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면서 여고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9월에는 미국에서 귀국한 한대수가 세시봉 무대에 올라 모던 포크의 진수를 선보였다. 히피의 자유로운 영혼이 깃든 그의 자작곡들은 통기타 세대를 문화 충격에 빠뜨렸다.

세시봉발(發) 트윈폴리오의 인기와 한대수의 충격파는 포크송에 대한 대중적 인식을 형성했다. 미국 모던 포크 등의 영향을 받은 통기타 음악이자 참신한 대중가요로 자리 잡은 것이다.

풀잎마다 맺힌 아침이슬처럼


▎영화 [바보들의 행진](1975)에서 주인공 병태와 영철이 경찰의 장발 단속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 사진:한국영상자료원
“헤어지자 보내온 그녀의 편지 속에 / 곱게 접어 함께 부친 하얀 손수건 / 고향을 떠나올 때 언덕에 홀로 서서 / 눈물로 흔들어 주던 하얀 손수건 / 그때의 눈물 자위 사라져 버리고 / 흐르는 내 눈물이 그 위를 적시네”(트윈폴리오, ‘하얀 손수건’, 1969)

트윈폴리오는 1969년 12월 드라마센터 공연을 마치고 해체를 선언했다. TBC(동양방송)와 MBC(문화방송)에서는 그들의 고별 공연을 TV로 여러 차례 방송했다. 시청자와 팬들의 아쉬움이 자라서 트윈폴리오의 노래는 1970년대에 더욱 큰 사랑을 받았다.

‘하얀 손수건’은 그리스 가수 나나 무스쿠리의 원곡을 감각적으로 번안해 부른 노래다. 과거 연인이 눈물을 닦았을 하얀 손수건에 지금 자기 눈물을 적신다는 가사는 투명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드러낸다. 트로트처럼 이별의 아픔을 처절하게 표출하지 않고, 담담하게 연인을 회상하면서 슬픔을 관조했다. 이런 태도는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서유석, 김도향, 박인희,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최영희 등 포크송 1세대 중에는 대학생들이 많았다. 기존의 트로트 가수들은 대개 먹고살기 위한 직업으로 노래를 불렀는데, 이들은 처지가 달랐다. 서울의 명문대학을 다니던 당대의 엘리트들은 가수 말고도 좋은 직업을 선택할 수 있었다. 통기타를 치고 노래 부르는 건 아마추어로서 도전하고 즐기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음악적 역량이 떨어지진 않았다. 뛰어난 싱어송라이터들이 나타났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 진주보다도 고운 아침이슬처럼 / 내 맘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배운다 /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 / 한낮의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 일지라 / 나 이제 가노라 저 거친 광야에 / 서러움 모두 버리고 나 이제 가노라”(김민기, ‘아침이슬’, 1971)

김민기는 한국 포크송을 최고 수준으로 높였다. ‘아침이슬’은 곡의 음악적 구성이 탄탄하고, 가사의 이미지 전개가 아름답다. 이 노래는 1971년 9월 대학생 양희은의 [고운 노래 모음] 1집에 실려 세상에 나왔다. 서울대생 김민기는 1970년에 문을 연 YWCA(여자기독교청년회) 문화공간 ‘청개구리홀’에서 당시 재수 중이던 양희은과 어울렸다. 그녀의 맑은 목소리와 또렷한 발성은 ‘아침이슬’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노래는 청년세대의 가슴을 파고들며 뜨거운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국민 애창곡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1970년대 대학생들은 포크송을 기성세대 문화에 대항하는 신세대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그들은 한국전쟁 이후에 태어난 전후 세대였다. 일제 강점의 어두운 역사도 겪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아픈 기억을 끌어안고 사는 기성세대에 반기를 들었다. 트로트는 어둡고 굴곡지고 고통스러운 과거에 사로잡힌 기성세대의 촌스러운 음악이라고 해 멸시했다. 반면 포크송은 밝고 건전하고 희망찬 미래를 그려나가는 청년세대의 세련된 음악으로 추켜세웠다.

“장막을 걷어라 /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더 보자 / 창문을 열어라 /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번 또 느껴보자 /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세 /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 줘 /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한대수, ‘행복의 나라로’, 1972)

기성세대에 반기 든 청년문화


▎1970년대를 풍미한 ‘1세대 포크 가수’ 양병집은 구전되는 서사민요를 현대적으로 되살린 곡 ‘타복네’로 큰 인기를 얻었다. / 사진:연합뉴스
통기타와 포크송을 필두로 청년문화가 확산됐다. 대학생은 물론 중·고생도 새로운 문화, 새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여기에는 미국식 자유주의, 소비문화, 대중예술 등에 대한 선망과 동경도 깔려 있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부유한 나라였으며 한국의 동맹국이었다. 이전 세대가 어두운 역사 속에서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면, 1970년대 청년·청소년들은 번쩍번쩍 빛나는 미국 문화에 끌렸다.

청년문화는 원래 1960년대 미국의 사회운동과 대중예술에서 나온 말이다. 젊은이들이 모던 포크, 우드스톡 페스티벌 등을 통해 창조적인 저항정신을 드러냈다. 이와 달리 1970년대 한국의 청년문화는 저항정신보다 미국적인 기호가 두드러졌다. 청바지를 입은 대학생들은 저녁에 명동이나 종로로 나가 통기타 음악과 생맥주를 즐겼다. 고고장을 찾아 밤새 춤추다가 야간 통행금지가 풀리면 집에 돌아가는 젊은이들도 있었다. 남자는 장발, 여자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했다. 해외팝송에 심취한 중·고생들은 심야 라디오 방송에 귀를 쫑긋 세웠다.

이러한 청년문화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일부 지식인들은 유신 체제로 무력감과 패배주의에 빠진 젊은 세대가 도피 수단으로 퇴폐적인 외래문화에 몰두한다고 비판했다.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소수 엘리트의 사고방식으로 대중의 문화를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소설가 최인호는 다음과 같은 의견을 밝혔다.

“문화는 생활 그 자체이지 선택된 개념이 아니다. 그들을 욕하기 전에 한번 가서 밤을 새워 보라.”(허수, ‘1970년대 청년문화론’, [논쟁으로 본 한국사회 100년], 역사비평사)

청년문화의 한복판에 선 통기타 가수들은 1970년대 대중가요계에 화려하게 진입했다. 참신한 감각을 지닌 싱어송라이터들은 상업적인 방송·음반·공연에 힘입어 히트곡들을 쏟아냈다. 특히 듀엣의 인기가 대단했다. 1세대 혼성 듀오 뚜아에무아는 1971년 TBC 가요대상 중창단 부문 대상을 수상했고, 라나에로스포는 ‘사랑해’를 발표해 큰 사랑을 받았다. 남성 듀오 4월과 5월, 어니언스, 둘다섯도 각기 명곡을 내놓으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말없이 건네주고 달아난 차가운 손 / 가슴 속 울려주는 눈물 젖은 편지 / 하이얀 종이 위에 곱게 써 내려간 / 너의 진실 알아내곤 난 그만 울어버렸네 / 멍뚫린 내 가슴에 서러움이 물 흐르면 / 떠나버린 너에게 사랑 노래 보낸다”(어니언스, ‘편지’, 1973)

포크송은 다른 장르와 융합하며 대중적 기반을 넓혀나갔다. 서유석의 ‘진주낭군’과 양병집의 ‘타복네’는 구전되는 서사민요에 곡을 붙여 현대적으로 되살렸다. 뚜아에무아에서 솔로로 나선 박인희는 시인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세련된 반주와 함께 서정적으로 낭송했다. 록은 포크와 궁합이 잘 맞는 장르였다. 이장희의 포크록 ‘그건 너’는 인기 폭발이었다.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밤에 / 어이해 나 홀로 잠 못 이루나 / 넘기는 책 속에 수많은 글들이 / 어이해 한 자도 보이질 않나 /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이장희, ‘그건 너’, 1973)

포크송 전성시대를 열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을 선포하고 전국에 비상계엄을 내렸다. / 사진:국사편찬위원회
이장호 감독, 최인호 원작의 영화 [별들의 고향]과 이장희의 OST도 궁합이 잘 맞았다. [별들의 고향]은 1974년 개봉해 최고 인기작으로 떠올랐다. 주인공인 호스티스 우경아가 “제 입은 작은 술잔이에요”라며 몸을 기댈 때 노래가 흘러나온다. ‘한 잔의 추억’과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는 경제 성장의 그늘에 웅크린 외로운 인간 군상을 다독였다.

“나 그대에게 드릴 말 있네 / 오늘 밤 문득 드릴 말 있네 /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 터질 것 같은 이내 사랑을 / 그댈 위해서라면 나는 못할 게 없네 / 별을 따다가 그대 두 손에 가득 드리리”(이장희,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1974)

이듬해 개봉한 영화 [바보들의 행진]도 원작은 최인호의 소설이었다. 하길종 감독은 미팅, 음주, 무기한 휴강, 입대 등 당시 대학가 풍속도와 젊은이들의 불안과 좌절을 파격적인 영상 기법으로 그려냈다. 영화 전체에 흐르는 송창식의 OST는 강렬한 메시지로 큰 공감을 얻었다. 특히 장발 단속 장면에 은유적으로 쓰인 ‘왜 불러’가 화제를 낳았다. 송창식은 이 OST로 1975년 MBC 10대가수가요제 대상을 거머쥔다.

“왜 불러 왜 불러 /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 왜 불러 왜 불러 / 토라질 땐 무정하더니 / 왜 왜 왜 / 자꾸자꾸 불러 설레게 해”(송창식, ‘왜 불러’, 1975)

1970년대 중반 포크송의 인기는 절정에 올랐다.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낭만적인 태도로 순수한 이상을 추구하는 포크송의 분위기가 시대의 갈망과 맞아떨어졌으리란 추론도 가능하다. 유신정권은 1974년부터 긴급조치를 연달아 발동해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억눌렀다. 그 갑갑한 현실 속에서 청년들은 몸부림쳤다.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다. 그리하여 바보처럼 꿈의 세계로 달려갔는지도 모른다.

“간밤에 꾸었던 꿈의 세계는 / 아침에 일어나면 잊혀지지만 / 그래도 생각나는 내 꿈 하나는 / 조그만 예쁜 고래 한 마리 / 자 떠나자 동해바다로 /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송창식, ‘고래사냥’, 1975)

‘고래사냥’은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서 극중 영철의 주제가로 쓰였다. 술만 마시면 예쁜 고래를 잡으러 가겠다고 노래 부르던 영철. 그는 실연 후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동해바다로 간다. 그리고 해안 벼랑에서 푸른 바닷속으로 몸을 던진다. 고래사냥, 거대한 기성 권력에 저항하는 청춘의 이상을 펼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시대였다.

가요계 정화와 대마초 파동


▎1979년 뒤늦게 첫 음반을 낸 조동진은 ‘행복한 사람’으로 큰 호응을 얻었고, 이후 음악 활동을 활발히 하며 ‘포크계 대부’로 불렸다. / 사진:연합뉴스
1975년 5월에 나온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는 탄압의 ‘끝판왕’이었다. 가요계도 정화하겠다며 6월부터 대중가요 222곡의 공연 활동을 금지했다. ‘아침이슬’, ‘그건 너’, ‘왜 불러’, ‘고래사냥’ 등 불후의 명곡들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금지 사유는 가사 퇴폐, 창법 저속, 불신 조장, 시의 부적절 등이었는데 ‘아침이슬’은 사유조차 없었다. 발표 당시에 ‘건전가요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한 노래였지만, 대학가 집회에서 즐겨 부르자 금지했다. 진짜 이유는 이것이었다. 권력이 자유를 억압하는 시대에, 자유를 꿈꾸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그해 12월에는 느닷없이 대마초 파동이 터졌다. 이장희, 윤형주, 신중현, 김추자, 김세환, 김정호, 임창제(어니언스) 등 유명 가수들이 대마초 흡연 혐의로 구속되거나 조사를 받았다. 아직 ‘대마관리법’이 제정되기 전의 일이었다. 처벌 법규가 없어 일부 연예인들이 공공연히 대마초를 피우던 시절이었다. 유신정권은 단속부터 먼저 한 다음 이듬해 대마초는 ‘망국의 연기’라며 강력한 처벌 법규를 만들었다. 단속된 연예인만 137명에 이르렀다. 그중 54명은 정부 통고로 연예협회에서 제명됐다. 방송이고 공연이고 음반이고 전부 금지였다.

대마초 파동과 가요계 정화로 포크송 전성시대를 연 가수들이 몰락했다. 대중가요의 중심부까지 장악했던 통기타 음악도 변방으로 밀려났다. 가요계에서 내리막길을 탄 포크송은 트로트 작법 등을 도입하며 정체성을 잃고 변질돼 갔다. 그 와중에 순수성을 지킨 뮤지션들도 있었다. 1세대 싱어송라이터 이정선이 포크 그룹 ‘해바라기’를 결성해 활동을 이어 나갔고, 1979년 뒤늦게 첫 음반을 낸 조동진은 ‘행복한 사람’으로 큰 호응을 얻었다. 그리고 1970년대가 저물 때 정태춘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어둠에 잠긴 한국 포크송의 등불이 켜졌다.

“소리 없이 어둠이 내리고 / 길손처럼 또 밤이 찾아오면 / 창가에 촛불 밝혀두리라 / 외로움을 태우리라 / 나를 버리신 내 님 생각에 / 오늘도 잠 못 이뤄 지새우며 / 촛불만 하염없이 태우노라 / 이 밤이 다 가도록”(정태춘, ‘촛불’, 1978)

※ 권경률 - 역사 칼럼니스트이자 작가. 서강대에서 역사를 공부했다. 새로운 해석과 기발한 상상력으로 한국사에 숨결을 불어넣는다. 유튜브·페이스북에 ‘역사채널권경률’을 열어 독자들과 역사 하는 재미를 나누고 있다. [모함의 나라](2022), [조선을 새롭게 하라](2017), [사랑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이는가](2023) 등을 썼다.

202406호 (2024.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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