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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중앙 특별기획시리즈] 다시 기업가정신이다 | 한국 경제의 개척자들(21) 이회림 OCI그룹 창업주 

번뜩이는 기지로 화학산업 일군 ‘마지막 개성상인’ 

14세부터 상점서 익힌 근면·정직·신용이 OCI 원동력
무차입, 한우물 경영… ‘기업 윤리’ 강조한 애국 경영인


▎동양화학주식회사 인천 소다회 공장 준공식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설명 중인 이회림 창업주. / 사진:OCI홀딩스㈜
OCI 그룹 창업자 이회림(李會林, 1917~2007)은 일제강점기 개성시 만월동에서 전주이씨 이영주의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회림의 부친은 중국과 백삼을 거래하던 개성 상인이었으나 그가 13세 되던 해에 사망했다. 38세에 홀로된 그의 모친은 어린 5남매를 키웠다.

이회림은 14세이던 1930년 송도보통학교 졸업 후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잡화도매상인 손창선상점의 점원이 됐다. 도매상에 취직하면 첫 3년 동안에는 월급이 없는 대신 개성상인으로서의 덕목을 수련받는 게 관례였다. 3년이 지나면 주인이 점원의 됨됨이를 평가해 적립금 100원(圓)을 지급하는데,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면 한 푼도 못 받고 쫓겨나기도 했다. 서양 중세시대 길드의 도제(徒弟)처럼 철저한 직업훈련을 받는 방식이었다.

이회림은 입사 한 달도 안 된 시점에 상점에서 숙식을 제안받았다. 상점 내에서의 숙식은 보통 수년이 지나야 한다는 점에서 파격이었다. 손창선 어른은 이회림에게 근면·정직·신용으로 점원 직분에 충실하면 반드시 성공한다며 격려했다. 이회림은 자전거와 연결한 손수레에 무거운 짐을 실어나르며 거상(巨商)의 꿈을 키웠다. 그는 입사 1년도 안 된 시점에 주문과 수금을 하러 개성 시내는 물론 황해도와 경기도 거래처를 다녔다. 그러나 이회림이 입사 4년 차 되던 1933년 손창선상점은 돌연 폐업했다. 불경기와 흉년, 손창선의 지병이 겹친 탓이었다.

이회림은 18세이던 1934년 박화실과 결혼했다. 개성 고려동 밀양박씨의 둘째 딸로, 정화여학교를 졸업한 인재였다. 아울러 이회림은 같은 해 강형근상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강형근상점은 개성의 일류포목상으로 중·일전쟁(1937년) 당시 전쟁물자인 면화류의 소비가 늘면서 급성장했다. 21세 청년 이회림은 강형근상점 서울 북창동 지점 판매책임자로 발탁됐다. 이때도 대단히 파격적인 인사로 평가받았다.

통째로 사라진 인견사 되찾아 재기

이후 이회림은 1937년 개성 남대문 근처에서 자본금 200원으로 포목상인 건복(建福)상회를 창업했으나, 1942년 기업정비령으로 폐업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 18일에는 서울 종로3가 1번지 광성지물포의 일부 공간(10여 평)을 빌려 포목도매상인 이합(二合)상회를 개설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이정호(李廷鎬)가 그의 친형 이정림(李廷林, 1913~1990)한테 돈을 빌려 동업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이회림이 형님으로 모셨던 이정림은 송도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16세에 밀가루, 설탕, 고무신을 취급하는 송래상회의 점원으로 들어가 사업 경험이 풍부했다. 이회림과 이정호는 이정림에게서 융통 받은 23만원(圓)으로 경남 마산에서 포목 100여 필을 구입, 서울에서 5일 만에 전부 매각했다. 당시 5배의 이익을 얻은 이회림과 이정호는 차용금 23만 원을 상환했다. 이후 이합상회는 승승장구했다. 창업 3년 만인 1948년에는 순익 1억 원으로 세 들어 살던 건물을 통째로 매입했다.

이회림은 1949년 이정림·정호 형제와 무역업체인 개풍상사를 설립했다. 개풍상사는 강원도 묵호에서 수집한 건오징어 90톤을 홍콩에서 인견사 110 상자로 맞바꿨으나, 북한지방의 저질 인견사가 남한에 범람해 가격이 폭락했다. 인견사 110상자를 서울역 앞의 조일조(朝日組) 창고에 보관, 값이 오르기를 기다리던 중 6·25전쟁(1950~53년)이 발발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할 당시 보관 중이던 인견사가 통째로 사라졌다. 일대 위기였다.

대한탄광 인수하고 동업 청산


▎이회림 OCI그룹 창업주는 14세이던 1930년 송도보통학교 졸업 후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잡화도매상인 손창선상점의 점원이 됐다. 1923년 송암의 할머니 회갑을 맞아 찍은 가족사진. 아랫줄 오른쪽이 이회림 창업주, 그 뒤 어머니, 맨 뒷줄 오른쪽 두 번째가 아버지. / 사진:OCI홀딩스㈜
1950년 9·28 서울수복과 함께 이회림은 인견사를 찾으러 서울 구석구석을 누볐다. 수색 작업 3일 차에 접어든 이회림은 귀갓길에 잠시 쉬기 위해 종로 낙원동 어느 점포 앞에 멈춰섰다. 그러던 중 길 건너 허름한 창고에서 인견사 박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확인 결과 자신이 찾던 인견사 박스들임을 알아챘다. 이후 개풍상사는 부산 피란시절 동광동 3번지에 100여 평의 점포를 마련해 사업을 이어갔다. 전시특수를 누리는 등 사업은 호황이었다. 전쟁 중이던 1952~53년 개풍상사는 수출실적 전국 1~2위를 기록하는 등 국내 최대 규모의 무역업체로 성장했다. 휴전 이후인 1953년 10월 그는 종로3가로 복귀했다. 개풍상사가 호황을 누리던 1955년 10월 이회림은 경영난의 대한탄광을 이정림, 이정호와 함께 손홍준으로부터 인수했다. 손홍준은 개성 인삼의 선구자 손봉상(孫奉祥)의 장남으로 일본 유학 후 기업가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대한탄광의 석탄은 품질이 우수했지만, 적자였다. 생산량은 목표량인 월 1만톤을 한참 밑도는 월 3000톤에 불과했다. 이회림은 적자를 해결할 자신이 있었다. 회사에서 쌀과 작업복을 선지급하고 월말에 작업량을 정산해서 임금을 정산하는 생산도급제도 제시했다.

그 결과 월 3000톤에 불과하던 채탄량은 월 1만톤 이상으로 증가했다. 이후 탄을 운송하는 삭도 설치, 근로자들의 사택과 자녀들을 위한 초등학교 설치, 송암장학회를 설립해 직원 자녀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했다. 평소 ‘인재 육성’ 철학을 갖고 있던 이회림은 훗날 사재를 털어 회림장학회를 설립, 본격적인 장학사업을 시작했다. 또, 청구물산의 청구여상을 비롯해 1979년에는 재단법인 회림육영재단을 세워 학술 문화 부문 연구를 지원했으며 1982년 인천송도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해 송도중고등학교를 운영했다. 이회림이 광업을 경영한지 4년 만에 대한탄광은 흑자로 돌아섰다. 이회림의 지도하에 대한탄광은 1957년부터 1965년까지 호황을 누렸다.

이후 이회림은 1959년 개풍상사와 호양산업의 지분을 이정림에 넘겨주고 대한탄광을 확보했다. 이회림은 대한탄광 확보로 이정림 형제와의 동업 관계도 청산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 정부는 운크라(UNKRA) 원조자금으로 충주비료, 한국유리, 문경시멘트 등 이른바 3대 기간산업을 건설했다. 개풍상사는 1300만 달러에 월산 2만톤의 문경시멘트공장을 낙찰받아 1956년에는 대한양회공업㈜을 설립했다. 대한양회공업㈜은 전후 복구사업에 따른 건축수요 급증으로 호황을 누렸다. 이후 개풍상사는 수권자본금 20억 환, 납입자 본금 10억 환의 서울은행의 설립자본금 40%를 불입, 최대주주가 됐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이정림 등이 부정축재자로 몰리면서 서울은행은 국가에 강제 헌납됐다. 이 무렵 신설업체인 쌍용양회(50만톤), 한일시멘트(50만톤), 현대시멘트(20만톤) 등이 생산을 개시해 공급과잉을 초래했다. 대한양회는 공급과잉으로 인해 경영난에 시달리다 결국 경영권을 쌍용양회에 넘겨야 했다.

최대 위기 넘긴 동양화학


▎포천 OCI연수원 석탑 앞 이회림 창업주. / 사진:OCI홀딩스㈜
이회림은 독자적으로 일반 시멘트보다 부가가치가 높은 백시멘트 제조에 착수했다. 1963년 3월 경기도 부천시 소사동에 공장을 짓기 시작한 그는 그해 10월 완공했다. 1964년 1월에는 유니온백양회공업㈜를 설립했다.

한편 1959년 8월 김승호(金承昊)는 일본인 소유의 강원도 삼척 비누공장을 불하받아 동양화학을 설립했다. 같은 해 12월 미국 DLF(개발차관기금) 차관 560만 달러의 실수요자로 지정돼 소다회(soda ash) 공장 건설을 추진한 그는 자금난에 봉착, 이회림에게 인수를 권유했다.

이회림은 개풍상사를 경영하면서 화학산업의 기초소재인 소다회의 가치를 확인했다. 소다회는 생필품과 화학공업의 필수 기초소재로 전량을 수입에 의존했다. 소다회의 국내생산은 가능했지만 막대한 선행적 투자는 물론, 사업성도 불확실해 기업가들은 소다회 생산을 ‘천재 아니면 바보가 하는 사업’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이회림은 수입대체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국내생산이 필요한 사업으로 판단했다.

이회림은 이후 1961년 5월 30일 일본 미쓰이물산 및 센트럴글라스와 기술용역을 체결하면서 공장을 인천에 짓기로 결정했다.

1965년 AID차관(560만 달러)으로 변경, 공장 건설을 본격화했다. 같은 해 7월 미국 R. B. McMulin Associates와 기술자문계약을 체결하고 주요 외자발주를 위해 세계 유수의 기계제작자들과 접촉, 360만 달러에 일본 IHI를 소다회공장 기계설비 제작사로 선정했다. 흥정을 거듭한 끝에 파격적으로 가격을 깎은 것이다. 이회림은 잔여금 170만 달러로 PVC공장을 짓기로 했다. 차관 560만 달러로 소다회공장과 PVC공장을 짓는다는 점에서 일석이조였다.

1965년 10월에는 인천 학익동과 옥련동 해안의 개펄을 매립, 80만 평의 부지를 마련했다. 이후 일산(日産) 200톤의 소다회 공장 건설에 착수했다. 국내 최초의 열병합발전소도 함께 건설했다. 소다회 공장은 전력과 증기를 많이 사용하는데, PVC공장과 전해공장은 전력 사용량이 소다회 공장보다 많다. 동양화학 인천공장에서 사용하는 전력량은 당시 인천시민이 쓰는 전체 사용량과 비슷할 정도였다.

회사 설립 10년 만인 1968년 11월 연산 6만5000톤의 소다회공장을 완공한 이회림은 생산을 개시했으나 매출은 거의 없었다. 최대수요처인 인천판유리가 소다회를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터에 일본 소다회 메이커들의 덤핑 공세를 펼쳤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나라 정부도 소다회를 수입자유화 품목에 포함시켰다. 직원들의 임금이 3개월이나 연체됐으며, 월급날이면 외상값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공장 정문 앞에 몰려들었다. 서울 소공동 동양화학 이회림 사장실에는 빚쟁이들이 상주할 정도였다.

기업 인수와 합작으로 화학사업 확장


▎OCI는 글로벌 리딩 종합화학 대기업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지난 2006년 광양 공장을 방문해 현장 직원의 손을 잡고 격려하는 이회림 창업주. / 사진:OCI홀딩스㈜
1969년 동양화학은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가 부실 차관기업 도태 방침을 확정했는데, 동양화학이 도태 기업 명단에 포함된 것이다. 정부는 실사 후에 동양화학 회생을 결정, 인천 주(主) 공장을 제외한 나머지 생산시설을 담보로 설정했다. 연대보증인 재산 공매 및 인천공장 부지 80만 평 중 60만 평 분리 매각도 지시했다.

이회림은 자신 소유의 망우리 땅 6000평과 경기도 양주군 농장 19만 평, 서울 성북동 자택까지 처분해 빚 상환에 진력했다. 1972년 8월 3일 전광석화처럼 단행된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8·3조치)은 그에게 금상첨화였다. 정부는 기업들이 보유 중인 사채 신고 및 신고된 사채에 대해 3년 거치 5년 분할상환과 이자율은 연 16.2%로 강제해서 기업들의 금리부담을 경감시켜 줬다. 동양화학도 악성 고리채이자의 부담을 덜었다.

다행히 동양화학은 이후 적자를 면하고 순탄한 성장을 지속했다. 소다회 국내수요가 점증한 데다 생산할수록 단위당 생산원가가 하락하는 장치산업의 특징 덕분이었다. 동양화학의 국내 소다회 생산 독점도 플러스 요소로 작용했다.

동양화학은 1972년 PVC공장을 한국플라스틱공업에 매각한 후부터 다각화에 착수했다. 1973년 글로벌 소다회 파동으로 소다회 가격이 치솟자 1974년 동양화학은 생산능력을 일산 200톤에서 300톤으로, 1975년에는 600톤으로 확대했다. 덕분에 국내 관련산업 피해가 축소된 것은 물론, 본격적으로 소다회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1975년에는 프랑스 롱프랑과 합작, 각종 고무제품과 농약제지사료 원료 등으로 사용되는 화이트 카본(White Carbon) 제조업체인 한불화학을 설립했다.

1976년 동양화학은 기업을 공개해 자본금을 40억원으로 늘렸다. 이후 1977년에는 한전(韓田)농약과 신상록공업을 인수해 농약사업에도 진출했다. 1978년에는 해외 플랜트 수출에 눈을 돌려 필리핀에 백시멘트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울산에는 인산칼슘공장을 준공했다. 1979년에는 미국 듀폰사에서 기술을 도입해 전북 익산공단에 과산화수소공장을 준공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기초 무기화학제품인 과산화수소를 전량 해외에서 수입했다.

이회림은 이후 1980년 5월에는 미국 다이아몬드 샴록(Diamond Shamrock)사와 합작해 가성칼륨, 탄산칼륨 등의 기초무기화학제품 제조업체인 한국카리화학를 설립했다. 1982년 4월 한국카리화학 인천공장을 준공하고 1987년 6월 다이아몬드 샴록 지분을 인수, 1994년 10월에는 재생목재 제조업체인 청구물산㈜와 합병해 1995년 8월에 (주)유니드(삼남 이화영)로 상호를 변경했다. 1981년에는 미국 일라이일리와 합작해서 농약원료 제조업체인 동양엘랑코를 설립하고 1984년 6월 서독 헤라우스사와 합작, 반도체제조 필수부품인 리드프레임과 본딩와이어 제조업체인 자본금 30억 원의 (주)헤라우스오리 엔탈하이텍을 설립했다.

1981년에는 미국 일라이일리와 합작해 농약 원료 제조업체인 동양엘랑코를 설립했다. 1985년 9월 동양화학은 서독 데구사와 합작해 자동차 엔진 및 환경, 산업설비 배기가스 정화용 촉매(Catalyst) 생산전문의 오덱㈜을 설립했다. 울산시에 공장을 둔 오덱㈜은 1987년에는 기아자동차, 1988년부터는 현대자동차에 납품했다.

부가가치 높은 신사업 발굴 모색

이후 1985년 소다회 생산능력을 연산 28만톤(일산 800톤)으로 확장, 창업 20년 만에 생산능력을 4배로 확대했다. 1986년 일본 삼양화성공업과 합작해 이양화학을 설립했으며, 1988년 2월에는 울산에 연산 2000톤 규모의 분말형 고분자 응집제 생산설비를 준공했다. 이양화학은 국내 최초의 폐수처리 전문기업이나 폐수처리 약품의 국내 수요가 거의 없어 고전하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을 계기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해 1998년에는 세계 1위의 수처리제품 업체인 프랑스 SNF과 50:50 비율로 합작, 국내 최대의 하·폐수 처리용 환경약품 제조업체로 도약했다. 결국 동양화학그룹은 무기화학제품 필수원료인 소다회, 백시멘트, 화이트카본, 가성칼리, 탄산칼륨, 농약 원자재인 TCA와 HBT 등을 독점하게 됐다. 특히 1970년대 대한민국 수출의 근간이었던 운동화의 기초원료인 화이트카본, 건설에 꼭 필요한 백시멘트 등이 효자 품목이었다.

1987년 국내 소다회 수입이 전면 개방됐다. 당시 동양화학 매출액 중 소다회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는데, 세계 소다회 매장량의 95%가 미국에 있었다. 동양화학이 생산한 인공소다회의 절반 가격에 미국 천연소다회가 수입될 경우 동양화학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게 뻔했다. 이회림이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에 주력하면서 부가가치가 높은 신사업 발굴을 모색한 이유다.

그 결과 이회림은 1991년 6월 전북 군산 소룡동 임해공단 11만6000여 평에 국내 최대 규모인 연산 2만5000톤의 TDI(toluene di isocyanate) 공장을 준공했다. 폴리우레탄수지의 원료인 TDI는 무색의 액체로 페인트스폰지신발합성피혁 등에 폭넓게 사용된다. 기화할 때 발생하는 가스는 치명적이나, TDI는 무해함에도 환경단체와 군산시민들의 맹렬한 반대로 정상가동에 이르기까지 한동안 진통을 겪어야 했다.

다행히 1992년 8월 군산 임해공단 내 7000여 평에 330억원을 들여 연산 1만5000t의 PVA(poly vinyl alchol) 생산공장을 완공했다. PVA는 당시만 해도 전량 수입에 의존했다. 그러던 중 동양화학이 국산화 개발에 성공한 것이다. 1993년에는 베트남 빈둥(Binh Dung)성에 현지법인 KOSVIDA Agrochemical을 인수합병했다. 살충제, 살균제, 제초제 등의 농약 원료를 생산할 목적으로 현지기업과 합작했는데 동양화학 설립 이래 최초의 해외생산 시도였다.

1993년 5월에는 영창건설㈜을 인수했다. 영창건설㈜은 1982년에 설립된 토건업체로, 1997년 3월 동양화학 기술부를 흡수한 이후 1999년 12월 코스닥에 상장하기에 이르렀다. 2005년 5월에는 종합건설업체인 이테크건설㈜로 상호를 변경했다. 이테크건설은 지난 2010년 베트남 탕롱시멘트 프로젝트를 3000억원에 수주하는 등 플랜트 건설업계의 다크호스로 성장했다. 1994년 1월 유리병ㆍ음료용 캔ㆍ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삼광유리공업을 인수했다. 이 회사는 1967년 6월 삼광초자공업(주)로 설립되어 1971년 5월에 삼광유리공업(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1994년 9월에는 각종 석유화학제품 및 원료 무역업체인 켐테크㈜를 설립했다. 1997년 동양화학에서 국제영업부서의 일부 조직을 이관받아 ㈜OCI상사로 상호를 변경, 1998년에는 1억 불 수출의 탑을, 2004년 2억 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지난 2008년에는 총자산 2058억원의 종합무역상사로 성장했다.

앞서 1995년에는 미국 조지아주 와이오밍에 위치한 세계 3위의 천연소다회 생산회사인 롱프랑 와이오밍의 지분 51%를 1억5000만 달러에 인수해 경영권을 확보했다. 천연 소다회가 매장된 약 3000만 평의 광산을 보유하고 있어 향후 200년간 채굴이 가능할 것으로 추정된다.

글로벌 리딩 종합화학그룹으로 성장


▎소탈한 인품에다 평생토록 근검절약했던 이회림 창업주는 청소년 시절의 도제 수련에 대해 “이때의 경험은 오늘날까지 내가 사업을 하거나 생활하는 데 밑거름이 됐다”고 밝혔다. / 사진:OCI홀딩스㈜
동양화학은 2001년 8월에 부도가 난 거평그룹에서 제철화학과 관계사인 제철유화를 인수해 상호를 동양제철화학(DCC)으로 변경했다. 과거 국내 유일의 핏치 생산업체인 제철화학은 1974년 7월에 천신일이 포항제철 코크스공장에서 부산물로 발생하는 콜타르의 정제 및 판매를 목적으로 설립했다. 이후 1977년 대우그룹 소유로, 1989년에는 포항제철에 인수돼 1994년에 ㈜포스코켐으로 변경됐으나, 1995년에 오너가 거평그룹으로 바뀐 바 있다. 이외에도 2001년 11월 군장에너지 설립을 통해 2008년 4월 전북 군산에서 집단에너지사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2020년 11월 군장에너지, 이테크건설, 삼광글라스 3사의 분할합병을 통해 친환경 종합에너지기업 SGC(차남 이복영)로 출범해 운영 중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OCI는 글로벌 리딩 종합화학 대기업집단으로 자리매김했다. 동양제철화학도 지난 2009년 OCI로 상호를 변경했다. 지난해 5월에는 지주사 OCI홀딩스를 출범하며 백년대계를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이회림은 1996년 8월에 경영권을 장남 이수영(54)에게 넘겼다. OCI그룹은 창업 이후 내실 위주로 그리고 화학 중심의 다각화로 일관했다. 국내 재벌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골프장이나 유통업, 금융계열사조차 확인되지 않아 문어발 경영과는 거리가 멀다. 기업 규모나 역사에 비해 일반에 잘 알려지지도 않았다. 중간재 생산 위주로 기업을 키운 탓이다.

또한 OCI는 국내 화학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나 경제발전에 기여한 업적이 상당했음에도 ‘사업보국’ 혹은 ‘국가와 인류에 공헌’ 등의 거창한 슬로건도 확인되지 않는다. 두드러진 기업윤리 문제는 물론 상속과정에서의 골육상쟁도 불거지지 않았다. 이윤을 좇기보다는 1960년대 경제개발기 당시 불모지였던 국가기간사업인 화학산업으로 국가경제발전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밑바탕에 있었다. 2005년 반도체용 특수가스를 생산하는 소디프신소재㈜ 인수를 비롯해 2008년 태양광용 폴리실리콘 상업 생산에 성공하는 등 오늘날 각광받고 있는 미래 첨단소재까지 그의 발자취는 이어지고 있다. 1992년 인천공장 근처에 송암미술관을 건립해 인천시민들에게 문화예술공간을 제공한 데 이어 2005년에는 평생 모아온 문화재 8400여 점과 송암미술관 일체를 인천시에 기증했다. 당시 국내에서 유례가 없는 최대 규모의 사회 환원이라고 평가받는다. 개성상인 특유의 무차입 경영, 한우물 경영, 끈끈한 가족경영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탈한 인품에다 평생토록 근검절약했던 이회림은 청소년 시절의 도제 수련에 대해 “이때의 경험은 오늘날까지 내가 사업을 하거나 생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내 경영관의 핵심이 되어 지금의 나와 OCI가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이회림은 지난 2007년 7월 18일에 91세를 일기로 천수를 다했다. 그가 ‘마지막 개성상인’으로 불리는 이유다.

※ 이한구 -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학 석사를, 한양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취득했다. 수원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강의하며 경상대학장, 금융공학대학원장을 지낸 뒤 현재 명예교수로 있다. 국내 기업사 연구의 권위자로 (사)한국경영사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저서로 [일제하 한국기업설립운동사]와 [한국재벌형성사], [대한민국기업사], [한국의 기업가정신] 등이 있다.

202409호 (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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