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지역 ‘실핏줄 금융’ 살리기 

중기 만성 자금난 해소 위해 ‘지역밀착형 금융’ 육성 절실
재무제표·담보 아닌 무형자산 평가로 대출
‘관계형 금융’으로 강소기업 키우자
삼성경제연구소(SERI) - 이코노미스트 공동기획 ‘더불어 성장하는 시장경제’ ① 

외환위기 이후 한국경제는 경제 부문 간 두드러진 성장 격차를 보여왔다. 양극화는 심해졌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성장력을 잃어가고, 사회 취약계층은 자꾸 구석으로 밀린다. 계속 두고만 볼 것인가? 이코노미스트는 삼성경제연구소와 함께 선도 부문과 취약 부문이 함께 성장하는 상생의 경제를 재건하자는 취지로 ‘더불어 성장하는 시장경제’ 시리즈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그 첫 회로 ‘관계형 금융(Relationship Banking) 을 통한 강소기업 육성’을 제안한다. 감성적으로 얘기하면 ‘실핏줄 금융을 살리자’는 것이다. 고질적인 자금난을 겪는 중소기업의 금융 지원 시스템을 마련하기 위해 관계형 금융을 통한 지역금융 육성이 필수적이라는 판단에서다.

"새마을금고나 신협은 한 번 들어가면 평생 각 지점에서 일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러면 직원들이 그 지역 사정을 훤히 알게 됩니다.

가령 어느 중소기업 A사장이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일한다, 경조사 잘 챙기고 부조를 아끼지 않는다, 허풍 떨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잘 해준다, 참 성실한 사람이다는 것을 알게 되죠.

한마디로 그 기업에 밥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알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A사장이 지역 금융회사에 돈을 빌리러 올 경우 그런 비재무적 정보가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죠. 또 요즘처럼 경제위기가 왔다고 은행들처럼 우산을 확 빼앗을 수 있겠어요?”

홍순영 중소기업연구원 부원장 얘기다. 홍 부원장은 “선진국은 대부분 지역금융이 잘 발달돼 있다”며 “우리나라처럼 모두가 대형 은행만 바라보는 곳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중소기업이 국제경쟁력을 가진 큰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관계형 금융을 통한 지역금융 육성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당장 한두 달 직원들 월급 줄 돈을 빌리러 동분서주하는 중소기업 사장이라면 대부분 고개를 끄덕일 얘기다. 관계형 금융은 기업과 금융회사 간 오랜기간 유대와 신뢰를 바탕으로 대출이 이뤄지는 형태다.

대출 조건은 재무제표나 담보만이 아니다. CEO의 자질, 지역사회의 평판, 기업의 장래성, 기업 문화, 그리고 오래 기업을 지켜봐 온 투자 심사자의 주관적 판단 등 기업의 무형자산과 비재무적 정보가 중요한 대출 요건이 되는 것이다. 독일과 일본에 잘 정착된 금융 문화이자 시스템이다. 미국이나 기타 서유럽 국가도 중소기업 대출은 대부분 지역 금융회사가 맡는다.

은행을 위한 은행

이번 경제위기는 국내 중소기업 자금 조달 시스템이 얼마나 열악한지 다시 한번 보여줬다. 지난주 이코노미스트(982호)는 정부가 운영하는 실물경제종합지원단에 자금난을 호소하는 중소기업의 사정을 보도했다. 이후 자동차 2차 협력업체 대표가 전화를 걸어왔다. 요지는 이렇다.

“최근 5년 동안 실적도 좋았고, 은행에 연체를 한 적도 없었어요. 그런데 대출 만기 연장을 해야 하는데, 느닷없이 추가 담보를 요구하더라고요. 우리 원청업체가 어렵기는 하지만, 한두 해 거래한 은행도 아닌데 우리 부사장이 새파랗게 젊은 은행 지점 차장을 찾아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보다 더 어려운 곳은 어떻겠어요.”

얘기 그대로다. 중소기업중앙회와 중소기업연구원이 지난 2월 2일부터 한 달간 전국 152개 중소기업을 현장 방문을 통해 조사한 결과 은행의 ‘3불(不) 트렌드’가 여전한 것으로 나타났다. 3불 트렌드는 ‘부도덕한 행태, 불합리한 대출 관행, 불충분한 유동성 공급’을 말한다.

은행이 정작 돈이 급한 중소기업은 외면하고, 우량 중소기업에 지점장 실적을 위해 대출을 권유한다는 식의 얘기는 새삼스럽지도 않다. 시중금리가 떨어지자 변동금리를 높은 이자의 고정금리로 일방적으로 전환하고, 대출 만기를 연장하면 추가담보나 보증인을 요구하는 행태도 달라지지 않았다.

위 조사에 따르면, 152개 중소기업 중 39%가 금융기관에서 대출신청을 거절당했다. 하루 이틀 얘기는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는 기업에 돈이 도는 패턴이 확 바뀌었다. IMF 프로그램을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충실히 이행한 결과라면 결과다. 대기업은 주식이나 회사채 등 직접금융 방식으로 돈을 조달하고 남은 잉여는 현금성 자산으로 보유하는 경향이 심화됐다.

인천 남동공단에 위치한 중소기업은행 지점을 방문한 진동수 금융위원장.

반면 중소기업은 간접금융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구조가 됐다. 돈을 빌리는 환경도 열악해져 갔다. IMF 경제위기 이후 중소기업 전담은행이던 대동·동남·동화은행이 퇴출됐다. 1997년 말 33개였던 은행은 현재 19개로 구조조정됐다. 지방은행은 6개만 살아남았다. 지역 상호저축은행은 절반이 줄었다.

새마을금고와 신용협동조합도 40% 정도 감소했다. 지역 금융회사의 축소는 당연히 지역 금융을 위축시켰다. 새마을금고와 신협의 총 대출(약 50조원)은 전체 은행의 3%에 머물러 있다. 특히 은행이 수익을 중시하고 은행에 대한 건전성 규제가 강화되면서 은행의 중소기업 대출 비율은 크게 하락했다.

정부가 채무 지급보증까지 서주면서 중소기업 의무대출 비율(시중은행 45%, 지방은행 60%)을 독려했지만 지난해 12월 현재 18개 은행 중 6개 은행이 목표에 미달했다. 그나마 나아진 것이다. 2004년을 기준으로 하면 전체 은행 중 중기 의무대출 비율을 준수한 기업은 두 곳뿐이었다. 그동안 ‘중소기업 육성책’이 쏟아졌고 7개 정부 부처가 중소기업 정책자금을 지원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는 “관계형 금융을 통한 지역금융 육성”을 시급한 과제로 제안해 왔다. 무엇보다 현장이 원한다. 씨티은행에서 8년간 근무한 뒤 글로벌 기업을 거쳐 1996년 가업을 승계한 김상래 성도GL 대표는 “외국 금융회사에서는 대출 담당자가, 예컨대 한 기업을 10년간 맡는 반면 국내에선 1년이나 2년 지나면 바뀐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좀 말이 통한다 싶으면 새 사람이 온다”며 “산업도 모르고 우리 기업도 모르는 새 담당자를 새로 가르치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랜 거래를 바탕으로 은행과 기업이 신뢰를 쌓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증언도 있다. 경기도 북양단지에 위치한 대청산업의 황교순 부사장은 “주거래은행과의 오랜 관계가 중소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크다”며 “당장 어려운 상황에 처할 경우 지점이 본점에 거래 기업의 사정을 대변해주고, 정부로부터 정책자금을 받는데 역할을 해줄 때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관계형 금융의 장점은 많다. 우선 관계형 금융은 지역 경제권 내에서 금융회사와 기업이 장기간 거래를 통해 이뤄진다. 서로 알만큼 안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경기가 침체됐다고 바로 대출을 회수하거나 금리를 올리는 일이 제한된다. 그렇다고 부실을 뻔히 알면서 눈감아줄 수도 없다. 금융회사 부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규제에 갇힌 지역금융

물론 ‘정 때문에, 검은 돈 때문에’ 냉정하고 공정한 평가가 힘든 경우도 있겠지만 지역금융을 육성하면서 감독과 공시의무를 강화하는 방법으로 제어할 수 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손해가 더 크다. 또 지역금융은 지역에서 축적된 자금을 지역기업에 제공함으로써 지역경제에 기여하고 지역 중소기업의 인큐베이터 뱅킹 역할도 할 수 있다.

관계형 금융을 통한 지역금융 육성은 금융의 다원화 차원에서도 필요하다. 국내 300만 개 중소기업의 신용과 사정은 천차만별이다. 이 기업들이 은행에만 기대는 것은 불합리하다. 예를 들어 300만 개 회사를 규모나 업력에 따라 10등급으로 나누면 3등급까지는 시중은행과 거래하고 4~5등급은 지방은행, 6~8등급은 신협·새마을금고와 거래할 수 있는 중층화된 시장이 형성돼야 한다.

이를 통해 지역금융 간 또는 지역금융과 은행 간 경쟁이 촉발되고 보다 양질의 서비스가 나올 수 있다. 물론 지역 금융회사가 지역경제와 기업에만 의존할 경우 지역경제가 어려워지면 대출금 회수가 어려워질 수 있다. 상시 부실이나 퇴출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는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다.

또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보니 여신한도에 제약이 있고, 지역 기업이 해외 자금을 조달해야 할 경우 지역 금융회사가 해외 금융 업무에 전문성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이에 대해 홍순영 부원장은 “선진국처럼 지역 금융회사가 대형 은행과 제휴하는 방식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인과 만남을 갖는 홍석우 중소기업청장.

중소기업이 대체로 생존확률이 대기업에 비해 낮고, 재무정보도 불투명한 것은 사실이다. 상대적으로 신용 위험이 크다. 대출액도 크지 않아 금융회사 입장에서는 취급비용도 많이 든다. 이는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나 마찬가지다. 선진국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발달해 온 지역 금융회사가 지역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자금 공급원 역할을 담당한다. 물론 구조조정과 퇴출도 용이하다.

우리나라는 상시 구조조정 기능이 약하고, 정부가 시혜성 자금을 하사(?)하면서 한계상황에 이른 중소기업이 퇴출당하지 않고 시장에 ‘좀비 기업’으로 남는 경우가 많다. 만약 정부가 지역금융을 육성하자는 제안에 동의한다면 시급히 고려해야 할 문제가 많다. 우선 규제 완화다. 대표적 지역 금융기관인 신용협동조합이나 새마을금고 등은 오랫동안 예대 업무에 한정돼 있었다.

자기앞수표 발행이나 국고금 수납대행 업무가 풀린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지방은행이 말만 지방은행일 뿐 사실상 시중 대형 은행과 비슷한 영업행태를 유지해 왔다. 은행이나 농·수협에 한정돼 있는 정책자금 취급 기관에 지역 금융기관을 포함시켜 공신력을 높여줘야 한다. 지방자치단체의 금고업무 취급 제한 등 차별도 폐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지역 금융회사가 대형 은행과 포괄적이고 전략인 제휴를 구축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육성방안과 함께 지역 금융회사의 감독체계를 강화해 나갈 필요도 있다(더 많은 과제는 32쪽 참조). 가지 않던 길을 가려면 용기와 과감한 결단이 필요하다. 중소기업이 성장해 중견기업을 거쳐 대기업이 되는 사례가 희박한 현재와 같은 구도에서 ‘상생의 경제’는 헛구호다. 더불어 성장하는 대한민국 경제를 위해 ‘실핏줄 금융’부터 살리는 것은 사고의 전환이 아닌 실행의 문제다.

용어설명
관계형 금융(Relationship Banking) 오랜 거래 관계와 현장 탐방 등을 통해 획득한 비재무 정보를 토대로 하는 여신 관리를 가리킨다. 일본이나 독일에선 보편화한 금융기법이지만, 미·영국식 금융 기법을 추종해 온 국내 시중은행들에서는 아직 생소하다. 최근 경남은행이 관계형 금융을 주도하고 나서 눈길을 끌고 있는 정도다.


983호 (2009.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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