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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만에 JTBC 안방극장 다시 찾다 

3대가 함께 사는 드라마 ‘무자식 상팔자’에서 구심점 역할…김수현 작가와도 30년 인연 

허정연 이코노미스트 기자



10월 11일 오전 11시 서울시 중구 순화동 JTBC 사옥. ‘무자식 상팔자’라고 쓴 빨간 표지의 대본을 손에 든 배우 이순재(77)가 종종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전 8시부터 3시간 넘게 이어진 ‘무자식 상팔자’ 대본 리딩을 마친 직후였다.

“시선을 뗄 수 없는 드라마가 될 겁니다.”노배우의 눈이 반짝였다. 이순재는 10월 27일 첫 방송을 앞둔 JTBC 주말특별기획 ‘무자식 상팔자’에서 집안의 중심축을 이루는 조부, 안호식 역을 맡았다. 세 아들과 며느리, 손주들까지 3대가 사는 가정을 이끈다. 이순재가 한 가정의 아버지로 분하는 일은 이제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1991년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에서 가부장적인 아버지 역을 맡아 인기를 끌었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80세 아버지를 선보이는가 하면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는 야동을 즐겨 보는 할아버지로 등장해 웃음을 주기도 했다. 이외에도 크고 작은 작품에서 아버지 역할을 했지만 그 캐릭터는 각양각색이었다.


“배우는 늘 백지 상태여야”

“배우는 새로운 역할을 맡을 때마다 늘 백지 상태여야해요. 그 백지를 채워가는 건 배우의 역할이고. 같은 아버지 역할이라고 해도 사람마다 갖는 특징이 다르잖아요. 극중 리얼리티에 생명력을 주려면 내가 가진 재료에 극중 인물을 넣고 새로움을 만들어야 해요.” 그가 이번에 맡은 또 다른 아버지, 안호식 역은 재래시장에서 40년간 해장국집을 하며 세 아들을 키운 아버지다. 가정에 충실하지만 중년의 아들들이 잘못할 때면 호통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노인 증세가 심한 양반이에요. 노인들의 가장 큰 특징이 잔소리가 많은 거거든. 한 이야기 또 하고, 한번 이야기를 시작하면 끝도 없어서 식구들을 곤욕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아들 셋을 제대로 가르쳤다는 자부심이 있는 노인이에요. 부인을 사랑하지만 잔소리가 심한 자신을 피하는 모습에 서운해하기도 하고.(웃음)” 이순재가 그 상황이 생각난 듯 껄껄 웃으며 말을 이었다.

“대가족 이야기에요. 대가족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모와 자식 간, 부부 간, 형제 간, 동서 간 문제가 총체적으로 녹아 있어요. 가족 관계 속에서 서로 애정이 있고, 오해도 있고 또 화해도 하면서 살잖아요. 드라마는 이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상의 재미를 느끼게 해줘요. 부부 간의 갈등만 하더라도 정말로 사소한 일로 빚어지는 일시적인 갈등이 어떻게 생기고, 또 풀리는지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어서 나도 연기하면서 감탄하곤 하죠.”

그는 “‘김수현 드라마’의 장점은 설정과 인물이 모두 픽션이지만 모든 것이 현실에 근거해 재현된다는 점”이라며 “김 작가와 이제껏 여러 작품을 함께 했지만 ‘무자식 상팔자’는 그 어느 작품보다 뛰어나다”고 귀띔했다. “김 작가는 쪽대본을 절대 안 내보내요. 벌써 방송이 시작되기도 전에 작품의 절반 이상을 내놓을 정도죠. 그렇기 때문에 배우들이 그 작품에 익숙해져서 좋은 연기를 펼칠 수 있는 겁니다.

김 작가의 작품에는 드라마가 갖춰야 할 요인, 즉 재미와 감동에 계도적인 역할까지 모두 갖췄어요. 특히 제가 맡은 역이 젊은이들이 가진 가치관이라든가 시대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 많죠. 오늘 연습했던 대본에서도 제가 손주 며느리의 스커트 길이를 갖고 뭐라고 하는 장면이 있었어요. 젊은 세대들이 잘못하는 점에 대해선 신랄하게 비평도 하고, 그러면서도 한쪽으로는 사고가 개방돼 있는 캐릭터라 재미있게 연기하고 있습니다.”

이순재는 최근 드라마 스토리가 여론에 의해 일관성없이 끌려가는 세태에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드라마를 하다 보면 앞뒤가 안 맞고 전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일이 종종 있다”면서 “그에 반해 이 양반(김수현) 작품은 개연성이 있어 캐릭터를 어떻게 하면 더 살릴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한다”고 말했다.

TBC 개국에 맞춰 전속배우로

“모든 배우들이 공감하는 부분이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는 단순히 스토리텔링만 하는 게 아니라 한 장면, 장면에 나오는 상황이 모두 의미 있는 설정이라는 점이에요. 그렇다 보니 시청자나 여론의 반응에 따라 작품의 방향이 바뀌는 일은 있을 수가 없죠. 시장 논리에 따라 주가가 변동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주가를 주도하는 양반이라고 해야 하나. 조금도 시청자에게 아부하지 않으면서 시청자를 열광시킬 수 있는 작가에요.”

이순재는 유독 김수현 작가와의 인연이 깊다. 둘이 처음으로 함께 호흡을 맞춘 건 1979년 동양방송(TBC)에서 방영한 멜로 드라마 ‘고독한 관계’에서였다. 당시 한진희, 김민자 등과 함께 드라마에 출연한 이순재는 “ ‘찐한’ 멜로물이었다”며 과거를 회상했다. 1980년 TBC에서 연이어 방송한 ‘잃어버린 겨울’, ‘아롱이 다롱이’를 시작으로 이순재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는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엄마가 뿔났다’ 등이 모두 김수현 작가의 작품이다. 그 중 ‘사랑이 뭐길래’는 국내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높은 인기를 끌어 7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중국 한류의 원조 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당시에 경쟁 방송국에서 하던 이야기가 드라마 방송 시간만 되면 사람들이 채널을 ‘사랑이 뭐길래’로 다 돌리니 시청률이 떨어지는 게 전국 아파트가 우르르 다 무너지는 것 같다고 했어요. 한 마디로 경쟁사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단 거지. 지금 생각해도 참 대단한 작품이에요.” 그러나 정작 그가 김수현 작가의 작품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건 1980년 TBC에서 방영한 홈코미디 ‘아롱이 다롱이’다.

“내가 요즘도 김 작가 보고 ‘아롱이 다롱이’같은 드라마 한번 더 하자고 말해요. 딸 셋, 아들 하나 둔 집안 이야기인데 시트콤 이상으로 웃겼어요. 똑 같은 자식이라도 이런 놈도 있고, 저런 놈도 있다고 해서 제목이 ‘아롱이 다롱이’인데 당시 내 아내는 사미자씨가 맡았어요. 아들 역할은 이덕화, 그 애인 역으로 차화연, 딸은 이미숙이었지. 지금은 다들 중년 배우가 됐지만 당시에는 이제 막 시작하는 젊은 스타들이어서 분위기가 아주 좋았어요. 곽영호 PD가 연출했는데 우리가 녹화하다가 너무 웃겨서 계속 NG 내니까 곽 PD가 그만 웃으라고 화를 낼 정도로 재미있었어요.(웃음)”

김수현 작가와 인연만큼이나 TBC와 인연도 깊다. 대학 졸업 후 주로 연극 무대에 섰던 이순재는 1964년 TBC 개국에 맞춰 전속 배우로 17년간 활동하면서 탤런트로 이름을 알렸다. 1978년에 현재 KBS 별관이 된 TBC 여의도 사옥에서 첫 번째 녹화를 한 것도 바로 이순재다. 당시 오픈 녹화를 한 작품이 김수현 작가와 처음 만난 작품 ‘고독한 관계’이니 각별한 인연은 말할 것도 없다. 1년 후 언론 통폐합으로 TBC가 문을 닫는 순간에도 함께한 그에게는 JTBC로 돌아온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활동 초기에는 이 건물(현 JTBC 사옥)에서도 녹화를 했어요. 5층인가 6층에 스튜디오가 있었는데 어느새 50여 년이 흘러 여기서 다시 녹화를 하니 옛 생각이 참 많이 나요. 전속 배우로 활동하면서 한 달에 서른 한 작품에 출연한 적도 있어요. 월급은 쥐꼬리만큼 주면서 막 써먹더라고.(웃음) 그때는 배우에 대한 대우도 안 좋고, 제작환경이 열악해서 드라마만 해서는 먹고 살기 어려웠죠. 영화·드라마·연극을 종횡 무진하느라 집에 들어가는 날이 한 달에 10일이 안될 정도로 바빴어요. 1960~70년대 그렇게 활동한 데 비하면 지금은 신선놀음이지 뭐. 우리가 너무 일찍 태어나서 고생을 참 많이 했어요.”

노련한 형사 역할 욕심나

지금은 아버지 역할이 누구보다 친숙한 배우지만 젊은 시절 다양한 배역을 소화한 곳도 TBC였다. 특히 우리나라 드라마 최초의 형사수사물인 ‘형사수첩’에서 그는 범인 역할만 33번을 맡았다. 이후 ‘특별 수사반’에서 형사로 나오고 나서야 범인 역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단다.

“당시 연출이 전부 내 친구였어요. 배우들이 범인 역할 하기 싫다고 다 도망갔다며 고민을 하더라고. 그럼 내가 도와주겠다고 한 게 화근이 돼서 서른 번 넘게 범인 역할을 한 거에요. 덕분에 악역은 원 없이 해봤어요. 지금까지 역할이란 역할은 다 해봤는데 근래에 와서 욕심이 나는 게 미스터리 수사물이에요. 외국 영화에서 보면 백발의 노련한 형사가 등장하잖아요. 국내에서도 그런 역할 있으면 한번 해보고 싶어요.”

연기에 대한 그의 열정은 여든에 가까운 나이에도 식을 줄 몰랐다. 그는 “대사가 암기될 때까지 연기할 것”이라며 “현장에서 4~5번 NG를 내면 물러날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 때는 아직 먼 일인 듯했다. 그는 요즘도 ‘대사가 많기로 소문난’ 김수현 작가의 대본을 한달음에 외운다. 이순재는 “김수현 작가의 대사를 초보들은 어려워하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외우기가 수월하다”면서 “대사에 중복되는 부분이 없고 심리적인 흐름을 그대로 표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무자식 상팔자’는 오랜만에 온 가족이 함께 웃으며 볼 수 있는 홈드라마”라며 “대가족이 한 울타리에 살면서 푸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그 속에서 가족 간의 행복을 찾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드라마 속 제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요즘 어떤 노인은 추석이나 설날에도 자식 얼굴 한번 못 보는 일이 예사인데 난 아침 저녁으로 새끼 보는 복이 보통 복이 아니다, 이게 최고의 복이라고요. ‘무자식 상팔자’라는 제목처럼 가끔 속 썩이는 자식들이 다 없으면 얼마나 편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식이 있음으



‘무자식 상팔자’는


쉽지 않은 가족이 온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JTBC 주말특별기획 ‘무자식 상팔자’의 티저 영상이 10월 4일 공개됐다. 30초와 50초 두 가지 버전으로 구성된 티저 영상 속에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는 ‘무상(무자식 상팔자) 가족’의 모습이 맛보기로 담겨있다. 짧은 티저 영상만으로 생동감 넘치는 ‘가족 에너지’가 전달돼 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을 고조시키고 있다.

'무자식 상팔자'가 그려내는 다양한 부부상이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순재, 서우림은 티격태격하면서도 깊은 정이 엿보이는 노년 부부의 모습을 선보이는가 하면, 유동근, 김해숙은 무심한 듯 애정을 피워내는 친숙한 중년 부부의 모습을 표현했다. 극 중 유일하게 자식이 없는 윤다훈과 견미리 부부는 다정다감한 사이를 전면에 내세우며 최고의 닭살 부부로 활약할 것을 예고했다.

팽팽한 ‘며느리 삼파전’을 펼칠 김해숙, 임예진, 견미리의 관계 또한 시선을 모았다. 막내며느리 견미리가 애교 넘치는 콧소리로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내자, 둘째 며느리 임예진이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불편함을 드러냈다. 이에 맏며느리 김해숙이 “둘 다 입 다물고 그만 끝내”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세 사람의 만만치 않은 갈등 구조를 엿볼 수 있었다.

김수현 작가 특유의 맛깔나는 대사는 티저 영상을 접하는 이들의 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유동근은 “삽 들고 봉기하신 거잖아요”라며 재치 넘치게 상황을 묘사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김수현 작가가 이번에는 또 어떤 촌철살인 대사로 시청자들을 웃고 울게 만들지 호기심을 자아내고 있다.

제작사 측은 “무자식 상팔자에서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16명의 주요 배역들 모두의 이야기가 균형감있게 펼쳐지면서 다양한 세대에게 공감을 선사할 것”이라며 “김수현 작가가 치밀한 구성력과 탄탄한 필력으로 펼쳐내는 생생한 이야기가 안방극장을 강력하게 흡입할 전망”이라고 전했다. JTBC 주말특별기획 무자식 상팔자는 10월 27일 토요일 8시 50분 대망의 첫 방송을 앞두고 있다.

무자식 상팔자는 방영을 앞두고 ‘버스 사냥’ 이벤트를 펼치고 있다. 시내버스 벽면에 붙은 ‘무자식 상팔자’ 광고를 사진으로 찍어 SNS로 응모하면 추첨을 통해 아이패드2, 에스프레소 머신 등 상품이 주어진다. 직접 사진을 찍지 않고 남이 찍은 사진을 공유(페이스북)하거나 리트윗(트위터)하기만 해도 영화 예매권 등 상품을 받을 수 있다. 자세한 내용은 JTBC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1159호 (201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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