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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면 몰라요? 손님 없어요 

2차 엔저의 역습 

박성민 이코노미스트 기자 조득진·함승민 이코노미스트 기자
서울 명동 매장·환전상 찬바람 우후죽순 비즈니스호텔 먹구름



엔저(엔화 가치 하락)의 역습에 곳곳에서 한숨 소리가 나온다. 지난해 6월 100엔당 1510원대까지 오른 원화 대비 엔화 가치는 9월부터 하락세를 보이더니 최근 1130원대로 떨어졌다. 일본인 관광객은 눈에 띄게 줄었다. 자동차·전자·철강 등 분야에서 일본 기업과 경쟁하는 한국 기업의 수출 전선에 적신호가 켜졌다. ‘잃어버린 20년’을 만회하려는 일본이 돈을 확 풀자 경제적으로 지리적으로 일본과 밀접한 한국은 졸지에 곤경에 처했다 <관계기사 58~59쪽>.

비 내린 후 기온이 뚝 떨어진 4월 11일 저녁 서울 명동의 중심 거리. 싸늘한 날씨 탓인지 퇴근 시간인데 거리는 한산했다. 중심 거리에 줄지은 10여개의 중저가 화장품 매장 안에도 손님은 드물었다. 계산대 앞에 선 점원은 하릴없이 매장 밖만 내다본다. 지난 여름만 해도 일본인·중국인·한국인이 뒤섞여 발 디딜 틈이 없던 명동의 모습이 아니다.

그 중 한 화장품 매장에 들어가 봤다. 조선족 점원이 중국어로 인사를 하더니 이내 한국인임을 눈치 채고 다시 어색한 억양의 우리말을 건넸다. “원래 이 시간에 이렇게 손님이 없느냐”고 묻자 그는 “주말 빼고는 대부분 손님이 없다”고 답했다. 옆 매장도 상황은 비슷했다. 매장 매니저는 “절반 정도는 윈도쇼핑을 하는 내국인이고, 중국인 관광객은 가끔 보이고 일본인은 거의 없다”며 “사실 국적을 불문하고 요즘엔 손님 자체가 눈에 띄게 줄었다”고 말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명동 거리는 일본인 관광객과 이들을 호객하는 이들로 북적였다. 이곳이 한국 땅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일본어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어가 먼저 들린다. 매장의 홍보 문구도 중국어가 대부분이다. 소형 스피커를 차고 환영한다는 뜻의 ‘이랏샤이마세(いらっしゃいませ)’를 외치는 매장도 10곳 중 2곳 정도다. 매장 안의 상황도 달라졌다. 중국에서 인기 있는 한국 배우 사진을 붙이고, 중국어로 설명된 화장품 제품이 매장의 중심에 놓여있다. 일본어 문구가 달린 제품은 가장자리로 밀려났다.

화장품 매장 매니저들은 일본인 관광객 감소가 매출에 치명타라고 말했다. 한 매장 매니저는 “한창 장사가 잘 될 때 점원을 일곱 명까지 두었는데 최근 세 명을 줄였다”고 씁쓸레했다. 점원의 급여는 구사하는 언어에 따라 달라진다. 중국어와 일본어를 모두 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은 대우를 받고, 다음이 일본어, 그 뒤가 중국어다. 이 매장은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일본어가 가능한 점원이 절반을 넘었다. 하지만 현재 일본어가 가능한 점원은 한 명뿐이다. 나머지는 조선족과 중국인 유학생이다.


환전상도 엔화 보유에 부담 느껴

지난해 가을부터 시작된 일본인 여행객 감소로 전체 관광시장이 급격히 위축됐다. 지난해 3월 36만명을 넘은 일본인 관광객 수는 10월부터 내림세를 보이더니 올 1월엔 20만6000명으로 줄었다. 같은 기간 전체 방한 관광객 중 차지하는 비중도 40.1%에서 27.4%로 떨어졌다. 독도 영유권 문제가 불거진데다 지난 12월 중순 일본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이 압승하면서 엔저 흐름이 지속되고 한·일 관계가 경색된 영향까지 받았다는 분석이다.

일본인 관광객의 발길이 준 것은 환전상도 마찬가지다. 명동의 중심 도로 사이의 골목엔 환전상이 많다. 하지만 환전상이 있는 골목은 더 썰렁한 분위기였다. 환전상 서너 곳 중 한 곳은 아예 문을 닫고 장사를 하지 않았다. 나머지 환전상들은 매장을 개조해 커피매장을 겸하거나 음료수·껌·담배 등을 함께 팔았다.

한 환전상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반갑게 맞던 주인에게 취재 중임을 밝히자 이내 목소리에 날이 섰다. “보면 몰라요? 손님 없어요. 엔화 떨어져 일본인 없는 건 둘째 치고 요새는 중국인들도 잘 안 와요. 귀찮게 하지 마세요.”

이웃한 다른 환전상 주인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동안 환전하는 일본인 관광객은 못 본 것 같다. 더구나 요즘은 엔화 가져와도 웬만하면 안 바꿔준다. 괜히 엔화 가지고 있다가 더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나. 오히려 한국인 손님이 최근엔 많다. 일본 여행을 가려는 사람이 시중 은행에 비해 환율이 유리하다는 소문을 듣고 오는 것이다.”


설명을 들으며 한참을 환전상 주변에 머물렀지만 돈을 바꾸는 외국인 관광객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환전상 근처를 기웃거리자 한 사내가 다가와 명함을 건넸다. “엔화나 달러 싸게 드릴게요.” 한때 ‘한국의 신주쿠’라 불렸던 명동이 엔저로 썰렁한 거리가 됐다. 엔저가 지속되면 신주쿠가 ‘일본의 명동’이 될 판이다.

일본인만 받던 호텔 중국인 유치 나서

서울 명동과 충무로 일대에서 호황을 누린 비즈니스호텔도 최근엔 울상이다. 각 호텔마다 쉬쉬하지만 객실의 절반 정도는 빈방이라는게 호텔업계의 이야기다. 특히 일본인 관광객 위주로 투숙객을 유치하던 호텔은 타격이 심하다. 한 비즈니스호텔 지배인의 설명이다.

“명동 일대 비즈니스호텔은 합리적인 가격과 깔끔한 인테리어 덕에 일본인 관광객이 선호하는 숙소였다. 상대적으로 흡연과 음주가 심한 중국인 관광객을 피해 일부러 ‘일본인 관광객 전용 호텔’을 표방하는 호텔도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엔 이 호텔들도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나섰다. 오지 않는 일본인 관광객을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거 아니냐.”

서울 도심의 비즈니스호텔은 최근 2년 동안 급격히 늘었다. 최근 3년 동안 방한 관광객 수가 해마다 두 자릿수 증가하면서 문화체육관광부에서도 관련 규제를 완화하며 지원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는 ‘관광숙박산업 활성화 방안’을 통해 2015년까지 호텔 객실 3만8000실을 확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호텔 신축에 너도나도 뛰어들면서 곧 호텔 공급과잉 사태가 올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

호텔업계에서는 이번 엔저 현상으로 그런 사태가 빨리 벌어지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머큐어앰배서더소도베의 김창석 총지배인은 “관광 수요는 유행이나 기후, 정치·경제적 상황 등에 쉽게 영향을 받는데 호텔은 일반 건축물보다 투자비용이 많이 든다”며 “관광 수요가 갑자기 줄어들면 자칫 투자비를 회수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관광 수요를 결정하는 것 중 중요한 것이 환율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엔저로 일본인 관광객이 줄고 공급 과잉 우려가 불거지면서 일부 도심을 제외하곤 비즈니스호텔 투자 움직임이 눈에 띄게 위축됐다. 특히 몸집을 키우기 위해 수익률 확약까지 하던 호텔 운영사들이 공급 과잉을 우려해 몸을 사린다.

한 부동산개발업체 관계자는 “1년 전만 해도 호텔 운영사들이 호텔사업 부지·물건 확보에 열을 올렸지만 최근에는 공급 과잉이라고 판단해 선별적으로 접근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기업이 만든 비즈니스호텔이 대거 문을 여는 내년부터 영업이 안돼서 망하는 비즈니스호텔이 상당수 시장에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엔저 흐름을 타고 새로운 사업 아이템도 등장했다. 에르메스·샤넬·루이뷔통·프라다 등 해외 럭셔리 브랜드 중고 제품이 일본에서 한국으로 흘러 들었다. 일본은 세계 2위 규모의 럭셔리 브랜드 시장으로 루이뷔통이나 샤넬 등이 아시아 진출 거점으로 삼는 곳이다. 하지만 불황이 장기화하자 사용하던 럭셔리 브랜드 제품을 시중에 내놓는 경우가 늘었다. 그동안 홍콩·대만 등지에만 있던 일본 럭셔리 브랜드 중고품 매장이 최근 한국에도 속속 상륙했다.

‘브랜드오프 도쿄’는 지난해 11월 서울 논현동에 매장을 열면서 한국에 진출했다. 브랜드오프 도쿄의 테라사키 나오야 한국점장은 “개장 시기에 엔 약세가 시작되면서 매장이 자리 잡는데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엔저가 시작되면서 일본에서 중고 제품을 싸게 살 수 있었고, 또 다양한 제품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는 “저렴하게 들여온 중고품은 국내 판매가를 결정할 때 여유가 생겨 가격 경쟁력도 확보할 수 있다”며 “덕분에 엔저 이후 일본 중고품매장 시장의 매출은 꾸준히 증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테라사키 점장은 “엔저 효과를 계속 확신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엔저가 지속될 것으로 보이자 일본에서 럭셔리 브랜드 업체들이 일제히 가격을 12%가량 올렸기 때문이다. 브랜드오프 도쿄의 경매가 데이터를 확인한 결과 같은 모델 가방의 가격은 엔저 전 6200엔(약 7만원)에서 7500엔(약 8만5000원)으로 올랐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 중고품 업체 입장에서는 원가가 올라간 셈이다. 앞으로는 환율 효과가 크지 않다는 설명이다.

냉탕 온탕을 오가기는 여행업계도 마찬가지다. 엔저의 영향으로 지난해 말부터 일본 여행은 호황을 맞았다. 큐슈·오사카·훗카이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주요 관광지 항공권과 여행상품의 재고가 빠르게 재고가 소진되는 추세다. 한 여행사 일본사업부 관계자는 “올해 4월 일본 관광상품 판매가 전년 대비 70~80% 증가했다”며 “지진 이후 어려웠던 일본 여행 시장이 엔저 덕에 회복세”라고 말했다.

일본 정부관광국이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월 관광·업무 등 목적으로 일본을 방문한 한국인수는 23만4400명으로 지난해 2월(16만 9206명)에 비해 38.5% 증가했다. 엔저가 본격 가동된 1월에도 일본을 찾은 한국인수는 지난해 같은 달(17만3397명) 대비 35.2% 늘어난 23만4500명을 기록했다. 한국인 관광객의 급증세에 힘입어 지난달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수는 전년 같은 달 대비 33.1% 증가한 72만9500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2월 입국 외국인 수로는 역대 최다다.

이 때문에 여행사는 부서마다 명암이 교차한다. 아웃바운

1184호 (201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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