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경기 회복 vs 재정 파탄 기로에 서다 

아베노믹스 어디로 

증시·부동산·소비 심리 들썩 … 엔저만으로 경제 체질 개선 어려워



‘엔저로 일본산 화장품, 주방용품 등 가격 인하 기대가 증가하고 있으며 우리 기업에 대한 가격 인하 압력도 가중되고 있다(중국).’ ‘환율 변동으로 한·일 간 기계류 가격 차이가 기존 10~20%에서 5~10% 수준으로 감소했고, 일본 자동차 판매가 증가세다(미국).’ ‘가격에 민감한 소비재 시장 등에서 일본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향상되고 있다(EU).’


화색 도는 일본 경제

코트라(KOTRA) 해외 무역관들이 최근 코트라 본사에 보고한 각국 시장 모니터링 내용이다. 우리 정부 인식도 이와 같다. 기획재정부 산업경제과 윤성욱 과장은 “일부 해외 시장에서 엔저에 따른 일본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이 회복될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는 이미 엔저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자동차업계에 따르면, 올 1~2월 도요타는 미국 시장에서 32만4000대를 팔았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4% 늘었다. 반면 현대자동차는 9만6000대를 팔아 2% 증가하는 데 그쳤다. 3월에도 미국 시장에서 현대·기아차는 판매가 줄었고, 일본 빅3(도요타·혼다·닛산)는 모두 판매가 늘었다.

엔화를 무차별 살포해 일본 경제를 살리겠다는 아베 신조 총리의 노림수는 일단 효과를 봤다. 지난 20년간 연 평균 경제성장률이 1%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오랜 디플레이션에 시달린 일본 경제는 요즘 모처럼 화색이 돈다. 일본 중의원 선거 전날인 지난해 12월 13일 9737포인트였던 닛케이지수는 4월 10일 1만3192포인트로 30% 넘게 급등했다.

경상수지도 큰 폭의 흑자를 봤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2월 일본의 경상수지는 6374억엔 흑자를 봤다. 시장의 예상을 뛰어넘은 수치다. 기획재정부와 코트라에 따르면 올해 일본 기업의 경상이익은 전년 대비 26% 정도 증가할 전망이다. 특히 철강업·전기전자·정밀기기·기계·자동차 산업이 엔저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의 경제활동 심리도 좋아졌다. 지난 2월 일본 경기선행지수는 97.5로 2007년 10월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3월 경기실사조사에 따르면 체감경기 정도를 나타내는 현황판단지수는 5개월 연속 올랐다. 도산 기업 수도 21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일본 시장동향 조사 기관인 도쿄 상공리서치에 따르면 일본 내 3월 도산 기업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20% 줄었다. 일본을 장기불황에 빠뜨렸던 부동산 시장도 꿈틀댄다. 집값이 오를 수 있다는 기대 심리가 높아지면서다.

일본 주요 기업들이 앞다퉈 회사채를 발행하고 있는 것도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닛산자동차는 약 1000억엔(약 1조15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 최대 통신회사인 NTT도 비슷한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검토 중이다.

일본 기업들의 최근 이런 움직임은 회사채를 발행할 때 기준이 되는 장기 금리가 하락하면서 자금 조달이 쉬워진 때문이다. 조달된 자금이 설비 투자에 투입되면, 향후 일본 기업 경쟁력은 더 높아질 수 있다. 주요 경제 전망 기관들도 잇따라 일본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상향 조정했다.

엔저에 따른 일본 경제 훈풍은 이제 시작이라는 분석도 많다. LG경제연구원 이혜림 선임연구위원은 “올해 초 나타난 수출 회복은 엔저에 따른 수출 효과가 아직 포함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엔화 가치가 하락하면 일본 제품의 수출 단가가 떨어져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는데, 현 시점에서는 계약 통화 기준으로 단가 하락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연구위원은 “과거 환율 변동 시기에 약 5~6개월의 시차를 두고 가격 조정이 이뤄졌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엔저’만으론 일본 경제를 살리기 어렵다는 분석도 많다. ‘1달러=100엔 시대’는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미국의 압력으로 엔화 가치가 절반 가까이 절상된 1985년 플라자 합의 이후 2012년까지 28년간 연평균 엔·달러 환율이 1달러당 100엔 미만인 해는 1994년과 2008~2012년뿐이었다. 다시 말해 최근의 엔저 쇼크는 지난 5년간 고착된 엔고 현상이 깨지는 것에서 오는 일시적인 충격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최근 ‘엔화 가치가 계속 내려가 달러당 100엔이 되도 일본 경제 문제 해결에 만병통치약이 될 수는 없다’고 지적한 배경이다. WSJ는 ‘5년 전에도 엔·달러 환율이 100엔에 달했음에도 일본경제는 살아나지 못했다’며 ‘당시 엔화 가치 하락이 일본의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혁신적인 전환점이 되지 않았다’고 평했다.

이와 관련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는 최근 일본 언론과 인터뷰에서 “조금씩 돈을 푸는 기존 정책은 효과가 없었다”고 인정하며 “이번 대규모 양적 완화 효과는 충분히 지속력이 있다”고 자신했다. “자산 거품과 자금 이탈 우려도 시기상조”라고 일축했다.

세계 주요국은 자국 이익에 따라 엔저에 대해 엇갈린 반응을 보인다. 미국은 엔저를 용인한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재닛 옐런 부의장은 최근 “일본의 양적 완화 정책이 성공한다면 세계 경제를 자극해 미국에도 혜택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일본 엔저를 미국 경기 회복에 활용하겠다는 속내를 보인 것이다.

이와 달리 중국·독일·한국 등 수출이 많은 나라는 엔저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볼프강 쇼이블레 독일 재무장관은 최근 “중앙은행의 정책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국제 금융시장에 유동성 과잉을 가져올 수 있다”고 비판했다. 일부 경제 전문가들은 엔저가 계속돼 통제 불가능한 상황이 될 경우, 유로 강세를 부추겨 미국과 유럽이 경기 침체 국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6중고 중 하나 해결됐을 뿐

일각에선 아베 신조의 무모한 정책이 재정 파탄이라는 파국으로 끝날 것으로 우려한다. 일본은 나라 빚이 산더미처럼 쌓인 나라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공공 부채가 250%에 달한다. 또한 일본 경제는 단순히 엔고 때문에 오랜 불황에 허덕인 게 아니다. 흔히 일본 경제는 6중고에 빠져 있다고 한다. 엔고, 높은 법인세, 과중한 인건비, 엄격한 환경규제, 자유무역협정 체결 지연, 전력 수급 불안이다.

최근 엔저 현상은 6중고 중 한가지가 조정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런 상황에서 엔화 가치를 급격히 내려 수출을 늘린다고 일본 경제가 살아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때문에 최근 월가에서는 ‘엔화가 끝없이 떨어져 결국 휴지조각이 되고 일본 경제가 파탄 날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일본 국민이 아베노믹스를 계속 지지할 것인가도 변수다. 아베노믹스가 성공하려면 수출이 늘고 임금이 증가해 소비가 늘어야 한다. 그래야 엔저에 따른 에너지 가격 증가와 수입 물가 인상을 상쇄할 수 있다. 아베 총리가 최근 요네쿠라 히로마사 게이단렌(한국의 전경련) 회장 등 경제 3단체장을 만난 자리에서 “근로자의 임금을 올리라”고 압박한 배경이다.

하지만 일본 재계 반응은 미온적이다. 니혼게이자 신문은 게이단렌의 타카하시 히로유키 노동정책 부장의 말을 인용해 “기업이 기본급을 올리기 위해서는 장기적인 기업 이익이 확보돼야 한다”며 “최근 엔저 현상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가는 확실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1184호 (2013.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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