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CEO 에세이 - 유럽 어딜 가나 벼룩시장 

 

안규문 밀레코리아 대표



산책하기 좋은 계절 가을이다. 날씨 좋은 주말에는 집보다 밖에서 시간을 자주 보낸다. 가끔 재래시장에 들러 시장 상인들의 활력과 서민적인 체취로 에너지를 충전한다.

격주로 한 번씩 열리는 동네 벼룩시장에 들러 세월의 흔적도 구경한다. 시끌벅적한 재래시장에서 상인들과 구수한 대화를 주고받노라면 시간가는 줄 모른다. 특히 다양한 볼거리가 넘쳐나는 벼룩시장에서 싼 값에 좋은 물건을 고르면 기분도 좋아진다.

9월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보낸 시간이 많았다.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유럽 최대 국제 가전박람회 일정 때문에 가을의 시작부터 출장을 떠났다. 그게 밀레 본사 법인장회의까지 이어지면서 총 2주간 독일에 머물렀다. 요즘 유럽은 절약이 화두다. 밀레도 전 제품에 에너지 절약 기능을 추가해 박람회에서 제품을 전시했다.

수퍼마켓이나 벼룩시장에서도 유럽인들이 근검 절약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볼 수 있다. 특히 유럽인들의 근검 절약하는 삶을 짧은 시간이나마 확인할 수 있는 독일의 벼룩시장은 규모도 크지만 활발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유럽의 경기 침체로 벼룩시장은 이제 현지인들의 생활 필수 장터로 변해가고 있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유럽인의 중고품 애용은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다.

유럽의 벼룩시장은 종교개혁 이후 확산된 근검 절약정신에 바탕을 두고 있다. 19세기 본격적으로 활성화한 벼룩시장은 프랑스어 ‘Puce’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Puce’는 ‘벼룩’이라는 뜻 외에 ‘암갈색’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암갈색의 오래된 가구나 골동품을 파는 데서 ‘벼룩 혹은 암갈색의 시장’이라고 부르게 됐다. 이것이 ‘벼룩’의 의미가 강해져 벼룩시장이 됐다.

유럽 도시 곳곳에서는 주말마다 벼룩시장이 열린다. 유럽연합(EU)의 통계청 유로스타트 자료에 따르면 27개 EU 회원국의 2009년 중고품 소매 매출은 81억 유로(약 11조7000억원)에 달했다. 중고품 관련 기업은 6만5700개사, 종사 인구는 12만명으로 추산된다. 프랑스 파리의 3대 벼룩시장인 방브, 생 투앙, 몽트뢰이 시장은 이미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자리 잡았다.

필자가 머문 베를린은 마우어공원의 벼룩시장이 유명하다. 이곳은 유럽인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상인까지 모이는 곳이다. 5유로면 값진 기념품을 구입할 수 있는 곳이다. 벼룩시장은 독일어로 ‘Flohmarkt’이라고 불린다. 독일어로 ‘장벽’이라는 뜻을 가진 마우어(Mauer) 공원은 독일의 분단 시기에 베를린 장벽이 세워진 곳이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공원으로 조성되면서, 자연스럽게 주변 사람들이 물건을 사고파는 장소로 변했다.

매주 일요일에 문을 여는 마우어 벼룩시장에는 옷·신발·액세서리는 물론 레코드판, 옛날 신문, 사진·엽서·가구 등 없는 것이 없다. 주말이지만 벼룩시장은 세계 각국의 많은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유럽인들은 중고라도 손을 봐서 고쳐 쓰면 새 것과 다름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검소한 생활자세는 유럽을 선진국으로 만든 원동력이다.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올해 쓸데 없이 낭비한 건 없는지, 더 아낄 건 없는지 다시 한번 돌아볼 때다.

1208호 (2013.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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