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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 | 말 많고 탈 많은 ‘용산 화상경마장’ 가보니 - 학교 정문 코 앞에 웬 도박장 

학부모·주민·교사 등 1년째 천막농성 … “법적으로 문제 없다” 마사회는 강행 


▎용산 화상경마장 입점 예정지 인근 학교·학생·교사·학부모 등이 이전 예정 건물 앞에서 이전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7월의 첫날, 서울 용산구의 한낮 기온은 섭씨 30도를 웃돌았다. 그늘을 징검다리 삼아 햇살을 피하며 걸어봐도 금세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서울 한강로 3가의 용산 마권장외발매소(이하 용산 화상경마장) 앞에 자리잡은 ‘용산 화상경마장 입점 저지 주민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농성 천막 안에 들어서자 마치 찜질방에 들어온 듯 더운 기운이 훅 몰려왔다.

예닐곱명의 중년 여성들이 둘러앉아 달달거리는 낡은 선풍기에 의지해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성심여중·고교를 비롯해 인근 학교에 다니는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다.

“아유~ 차라리 밖이 더 시원하네.” “어서 들어와. 고생했어. 이제부턴 내가 나갔다 올게요.”


“용산에 멋진 건물 들어서는 줄 알았는데…”

건물 앞에서 ‘화상경마장 입점 반대’ 피켓을 들고 1시간 넘게 땡볕에서 1인 시위를 펼친 허경숙(45)씨가 천막 안으로 들어오자 다른 엄마들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내어준다. 사업을 하는 허씨는 회사에선 어엿한 사장님이지만 점심시간을 아껴 나와 천막 농성을 돕는다.

용산구 주민·학부모·교사 등으로 구성된 대책위는 오전·오후·저녁·야간으로 나눠 순번을 정해 천막을 지킨다. 이들이 한국마사회의 화상경마장 입점을 막기 위해 처음 대책위를 결성한 것은 지난해 5월.

어느새 1년이 훌쩍 지났다. 담요와 커피포트, 전기장판 등 천막 한 켠에 빼곡히 쌓인 철 지난 살림살이들이 이들의 지루한 공방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책위의 열악한 환경과는 대조적으로 새로 지은 화상경마장 빌딩은 주변 어떤 건물보다 화려한 위용을 자랑했다. 지상 18층, 지하 7층에 이르는 25층의 건물은 마사회가 1200억원을 들여 지었다.

마사회는 용산역 인근에 위치한 기존 화상경마장을 용산 전자상가 근처로 확장·이전해 지난해 9월 1일부터 영업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이는 2010년부터 추진돼왔는데 주민들은 건물 완공을 4개월 앞둔 지난해 5월에서야 이전 사실을 알게 됐다는 입장이다.

성심여중·고의 학부모인 정방 대책위 공동대표는 “건물이 지어질 때만 해도 주민들은 ‘용산에도 이렇게 멋진 건물이 생기는 구나’ 싶어 좋아했다”며 “우리 아이들의 학교 코앞에 도박장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고 말했다. 학부모와 교사들이 전면에 나선 이유는 입점 예정 지역이 학교와 아파트 단지에서 지척이기 때문이다. 특히 성심여중·고에서는 직선거리로 불과 233m 떨어져 있다.

학교보건법은 학교경계선에서 반경 200m를 학교정화구역으로 정해 경마장·성인용품점 등 사행성 시설의 입주를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용산 경마장 이전 예정지는 불과 30여m 차이로 해당 규정을 적용 받지 않았다. 입점 예정지와 성심여중·고는 원효대교 고가도로를 중심으로 왕복 6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있어 얼핏 먼 거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횡단보도 한번에 건널 수 있어 학교 정문 앞까지 5분이면 충분했다. 인근에 위치한 원효초등학교와 아파트단지와의 직선거리도 500여m에 불과하다.

두 딸을 모두 성심여중·고에 보내는 허경숙 씨는 “돈 잃고 마음 좋은 사람 없다고 도박꾼들이 활개칠 생각을 할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며 “경마장이 생기면 자연스레 전당포와 사채업자, 술집도 덩달아 생길 텐데 잠재적인 위험을 안고 있는 시설이 생기는 걸 어떤 부모가 보고만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 신당동에서 사는 또 다른 학부모는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이 걸리는데 경마장 건물이 들어선 후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혼자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는 게 무섭다고 데리러 오라고 한다”며 “좋은 학교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모교이기도 해서 나처럼 멀리서 일부러 이 학교에 보내는 부모들이 많은데 솔직히 이런 게 들어설 줄 알았으면 여기 안 보냈다”고 말했다.

입점 5개월 앞두고 소식 접해

마사회가 농림축산식품부(이하 농식품부)로부터 경마장 이전 승인을 받은 시점은 2010년 3월. 이후 용산구청 도시계획위원회와 건축위원회 심의를 거쳐 2012년 9월 건축물 사용승인서가 교부됐으나, 주민들은 이 같은 사실을 이전 5개월을 앞둔 지난해 4월에서야 알게 됐다.

김율옥 성심여고 교장은 “구의원 제보를 통해 4월에서야 이전 계획을 알게 됐다”며 “그 전까지 농식품부와 마사회, 용산구청 등 어떤 기관도 이전에 대해 알려준 적 없다”고 말했다. 김 교장은 자신이 직접 대책위 공동대표를 맡으며 이전 승인 자체를 취소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처럼 관계기관들은 주민들에게 동의를 얻기는커녕 간략한 공지조차 없이 경마장 이전을 추진했으나 절차상 문제는 없다. 농식품부가 2009년 3월 ‘마사회 장외발매소 개설 승인절차 및 요건에 관한 지침’을 개정하면서 ‘동일 지역내 마권 장외발매소 이전 시 지방자치단체와 지역사회 동의 없이 가능하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용산구 내에서 위치만 이전한 터라 주민들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것이다.

용산구청은 ‘도시계획위 심의(2010년 5월)→건축위 심의(2010년 6월 중순)→건축 허가(2010년 6월 말)→설계 변경에 대한 건축허가서 교부(2011년 9월)→건축물 사용승인서 교부(2012년 9월)’ 등 관련 절차를 진행하면서 단 한 번도 해당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박장규 전 구청장은 임기 만료일 전날(2010년 6월 30일) 건축 허가를 내주기도 했다. 용산구청이 의도적으로 경마장 이전 계획을 숨기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용산구청은 지난해 농식품부에 이전 승인 취소 요청을, 마사회 용산지사에는 이전을 자진철회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농식품부·마사회·용산구청 이전 계획 은폐 의혹 제기

그러나 농식품부와 마사회는 경마장 이전 승인 취소 및 이전 백지화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농식품부 측은 “마사회가 이전을 신청하면서 민원 발생 때 지역 여론을 적극적으로 수렴해 해소하겠다고 명시한 만큼 마사회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본다”는 입장을 전했다. 마사회 역시 농식품부 장관의 허가와 용산구청으로부터 준공 허가 건물사용 승인까지 받아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입장이다.

오히려 지난해 9월 개장 예정이던 것을 언제까지나 미뤄둘 수는 없다며 6월 28~29일 시범 개장을 강행했다. 마사회 측은 “본래 18개층 규모에 1500명 수용이 목표였으나 13∼15층에 400명 규모로 줄여 시범 운영을 시작했다”며 “공청회 등 협의절차를 거쳤지만 주민들이 양보하지 않아 더 시간 끌기는 무의미하다고 판단했고, 시범운영을 통해 주민들의 우려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틀 간의 시범 개장은 주민들의 불신만 더 키웠다. 기습 개장 소식을 들은 주민 100여명은 6월 28일 오전 6시부터 화상경마장 건물을 둘러싸고 입구를 가로막은 채 마사회 측과 대치했다. 개장 소식을 듣고 찾아온 고객들은 안으로 들어가려다 주민들과 충돌을 빚기도 했다. 첫날 16명, 이튿날 150여명의 고객이 입장했다. 이 과정에서 성심여고 교감은 허리를 크게 다쳐 병원에 입원했고, 주민과 학부모 다수가 이용객들을 막아서다 찰과상을 입는 등 폭력 사태로 번졌다.

김율옥 교장은 “그날 마사회가 영등포구·도봉구 등지의 화상경마장 손님들까지 버스로 실어와서 우리와 대치 상황을 만들었다”며 “수용 규모를 줄이고, 일부 층만 운영한다고 하는데 규모와 관계없이 화상경마장은 그 자체로 썩은 생선”이라고 비판했다. 이날 농성에 참여한 이원영 대책위 공동대표 역시 “시범 개장 때 온 이용객들을 직접 눈으로 보니 경마장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고 말했다.

“술냄새가 진동하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내뱉는 사람들을 보며 아이들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현재 두 아들을 인근 초등학교에 보내고 있는데 이 아이들이 도박꾼들을 보며 무엇을 보고 배우겠습니까?”

농성의 여파로 목소리가 잔뜩 쉰 이 대표는 “너무 지친다. 이곳이 정말 우리나라가 맞긴 한거냐”고 반문했다. 이날 이용객들을 막아선 주민과 학부모, 교사 15명은 업무방해죄로 경찰 조사를 받기도 했다. 이에 대책위는 7월 2일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용산 화상경마장의 강제·기습 개장 시도를 규탄한다”고 외쳤다. 이어 용산 화상경마장 시설 철수를 요구하는 시민 5만명의 서명을 모아 청와대 민원실에 제출했다. 마사회는 3~4개월 시범운영을 한 뒤 의견 수렴절차를 거쳐 운영 여부를 최종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1245호 (2014.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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