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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agement | 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 <서울 1964년 겨울>의 ‘사후 확신 편향’ 

‘나는 알고 있었다’라고 믿는 결과론 … 미래 예측은 신의 영역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없는 사람에게 겨울밤은 언제나 쓸쓸하다. ‘없다’는 것은 ‘돈’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다. 어쨌든 텅 빈 마음은 더 허전하고, 발끝에서 아려오는 추위는 더 따갑다.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은 소외돼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경제적으로는 1962년부터 진행된 경제개발계획으로 도시화와 산업화가 막 시작됐을 때다. 사람들은 농촌에서 ‘욕망의 집결지’인 서울로 몰려들었다. 돈이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돈을 벌기 위해 스스로 도구가 되기를 자처하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는 박정희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소통이 제약되고 경직된 분위기가 퍼져나가던 시기다.

이런 1964년 겨울 어느 밤. 선술집에서 세 사람이 우연히 만났다. 나는 시골 출신의 스물 다섯 청년이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했다 떨어지고, 군대를 다녀온 뒤 지금은 구청 병사계에서 일하고 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안(安)씨 성을 가진 대학원생은 부잣집 장남이다. 마지막으로 가난뱅이임이 분명한 서른 대여섯 살짜리 사내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느낀 것,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얘기한다. 질문의 첫 소재는 ‘파리’다. 나는 묻는다. “안형, 파리를 사랑하십니까?” 안이 답한다. “아니요, 아직까진. 김형은 파리를 사랑하세요?” 이번에는 안이 나에게 묻는다. “김형,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십니까?” 나는 답한다. “사랑하구 말고요.”

그의 자살을 예측했다고 말하지만…

어차피 소외되고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이다. 서로에 대해 궁금할 것은 별로 없다. 그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맞장구를 쳐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고독은 자신을 이해 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스며든다. 나와 안형, 두 사람, 뭔가 죽이 맞다. 평화시장 앞 가로등 중 동쪽에서 여덟 번째 등은 불이 켜져 있지 않다는 것, 화신백화점 6층 창 중에는 3개에서만 불빛이 나오고 있다는 것, 서대문 버스 정류장에 있는 32명 중 17명이 여자고, 어린애가 5명, 젊은이가 21명, 노인이 6명이라는 것, 단성사 옆 첫 번째 쓰레기통에는 초콜릿 포장지 두 장이 있다는 것….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이어간다. 사물에 자기만의 의미를 붙이고, 이를 통해 자기 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한다. 심지어 영보빌딩 안 화장실 문의 손잡이 밑에 약 2㎝가량의 손톱자국도 남겼다. 이러면 화장실 문마저도 자기 소유가 될 것 같다. 신이 난 두 사람, 한 잔씩만 더 하고 헤어지려 하는데, 제3의 인물이 힘없는 목소리로 끼어든다. “미안하지만 제가 함께 가도 괜찮을 까요?” 가난뱅이임이 분명한 그 남자다.

패거리는 세 사람으로 늘어났다. 마지못해 동행을 허락했지만 유쾌한 예감은 들지 않는다. 알고 보니 이 남자 서적 외판원이다. 그의 아내가 이날 낮에 숨졌다고 한다. 이 남자는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아 4000원을 챙겼다. 나와 안형은 이 남자의 ‘소비여행’에 동행한다. 먼저 중국집에서 1000원을 썼다. 안형과 나의 넥타이를 사는데 600원을 썼다. 귤 사느라 300원을 썼다. 화재가 난 곳까지 택시를 타고 가면서 30원을 썼다. 그리고 남은 돈은 불 속에 던져버렸다. 이제 돈은 없다. 이 남자는 나와 안형에게 이날 밤을 함께 지내 줄 것을 부탁한다. 마지못해 세 사람은 여관에 묵기로 한다. 나는 이 남자를 생각해 같은 방에 들것을 제안한다. 그런데 안형이 거절한다. “난 아주 피곤합니다”라며. 그러고는 각기 다른 방을 쓰잖다. 안형은 왜 거절했을까.

이유를 아는 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안형이 말한다. “그 양반 역시 죽어버렸습니다”라고. 나는 짐작도 못한 일이다. 안형은 “난 그가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 남자가 자살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각자 다른 방을 쓰자고 한 것일까. 그랬다면 그 남자의 자살을 방조한 꼴이 된다.

행동경제학으로 보자면 안형의 단언은 ‘사후 확신 편향’에 빠졌을 수도 있다. 사후 확신 편향이란 ‘나는 알고 있었다’라고 믿는 현상이다. 이런 편향에 빠지면 결과를 먼저 지레짐작하기 때문에 오만한 판단이나 잘못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사후 확신 편향은 일종의 결과론이다. 9회말 투 아웃 주자 만루다. 마운드의 투수는 지금까지 던진 선수다. 감독은 고민 끝에 이 선수를 믿기로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기 안타를 맞고 게임을 졌다. 이때 해설자가 말한다. “저렇게 될 줄 알았어요. 저 위기에서는 투수를 바꿨어야죠.” 결과를 보고 그럼직한 이유를 뒤늦게 끼워 맞추면 틀릴 일이 없다. 그럼에도 실제 예측은 생각보다 쉽지않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많은 경제학자가 “부동산 버블로 위기의 징조가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그 전으로 되돌아가보면 달랐다. 경제학자 대부분은 호경기를 찬양했다. 심지어 슈퍼컴퓨터를 이용해 만든 파생상품은 너무나 안전해서 대공황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도 했다.

세계 역사에 대한 해석도 ‘사후 확신 편향’에 빠진 경우가 많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울린 단 한발의 총성이 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는 것은 지금은 상식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누구도 이 사건이 수많은 사람을 죽이는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것 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의 공격을 미리 예측하지 못한 조선 조정을 보면 한심하다고 느끼지만 그건 600년 뒤 후손의 얘기다. 당시에 있었던 조선인이라면 왜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판단하기 힘들었을 수 있다. 인천 상륙작전이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상대의 허를 찌를 묘수라고 생각하지만 당시 작전을 감행한 장성들은 실패의 두려움에 떨었을 것이다. 구한말 청나라·러시아·일본·미국을 두고 조선의 명운을 걸어야 했던 고종황제의 선택은 어려웠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매우 똑똑해졌다고 생각한다. 충분한 교훈도 얻었다고 믿는다. 하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가 ‘사후 확신 편향’에 빠져있기 때문이다. 1929년 호된 대공황을 겪고도 크고 작은 공황은 반복되고, 마침내 2008년 금융위기까지 맞았다. 집값이 과도하게 뛰면 버블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들이 사면 집을 사게 된다. 주식시장도 과도하게 상승하면 곧 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주가 폭등에는 펀드라도 들어야 안심이다.

결과를 보고 이유를 끼워 맞추긴 쉬워

안형은 그 남자가 자살할 것이라 짐작했다면서도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안형은 말한다. “혼자 두면 죽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그게 내가 생각한 최선의, 그리고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 남자의 자살 가능성이 크다고는 해도 100% 죽을 것이라 안형도 확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더 적극적으로 그의 죽음을 막든가, 아니면 그 자리를 피했을 것이다.

당일 코스피 주가를 본 뒤 “전날 미국 주가가 강세였기 때문에 충분히 예측된 결과”라고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애널리스트들이 있다. 너무나 예리한 분석이어서 그의 식견에 깜짝 놀란다. 하지만 그에게 장이 열리기 전에 주가를 예측보라고 한다면 어떨까. 그가 가진 폭넓은 지식을 동원하면 주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까? 세계 경제의 결과를 가장 명민하게 해석한다는 세계적인 석학도 다가올 미래 예측은 어렵다. 누군가 자신이 미래 예측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사후 확신 편향’을 의심 해봐야 한다.

1265호 (20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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