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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승민 기자의 센터링경제학 ⑥ 절대강자의 ‘리즈 시절’은 어떻게 끝났을까? - 아! 우리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는데… 

강력한 리더가 바뀔 때 조직은 위기에 빠져 … 후임자의 변신 시도는 없어도, 과해도 곤란 

‘권세는 10년을 못 가고 예쁜 꽃은 열흘을 피지 못한다(權不十年 花無十日紅)’. 절대 지지 않을 것 같던 축구 클럽도, 시장에서 절대적 지위를 구가하던 기업도 뜻하지 않은 이유로 한 때의 전성기를 마감하곤 한다. 특히 절대적인 존재감을 과시하던 리더가 바뀌면서 위기가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곳곳에서 인사(人事) 칼바람이 부는 연말이다. 리더 교체에 따른 절대강자의 몰락 사례를 살펴봤다.

▎UEFA 컵의 전신인 인터시티스-페어스 컵에서 우승한 리즈 유나이티드. 리즈는 1960~1970년대 전성기를 누린 뒤 쇠락했다.
‘리즈 시절’. 최근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신조어다. 한 인물이나 단체의 전성기, 즉 ‘한 때 좀 잘나가던 시절’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OOO의 리즈 시절’ 같이 쓰인다. 배불뚝이 박 부장님의 날씬했던 대학시절, 노처녀 김 차장이 뭇 남성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때, 전교 1등으로 천재 소리를 듣던 구박 덩어리 신입사원의 과거가 바로 리즈 시절이다.

이 말은 국내의 한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에서 시작된 표현이다.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 선수였던 앨런 스미스에 대해 얘기하며 이전 소속팀인 리즈 유나이티드(리즈) 시절의 강력함이 없다는 의미로 ‘앨런 스미스 리즈 시절’이라는 표현을 쓰던 것에서 파생됐다. 이후 리즈 시절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퍼지면서 ‘지나간 전성기’라는 의미의 관용어로 자리 잡았다.

따라서 리즈 시절의 어원은 엄밀히 말하면 앨런 스미스의 리즈 시절이다. 그런데 혹자는 신조어의 주인공이 된 잉글랜드 축구 클럽 리즈 유나이티드의 리즈 시절 자체가 이 말의 어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지금은 비록 2부 리그에 머물고 있지만, 1990년대 후반 프리미어리그에 돌풍을 일으키며 리즈 시절을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하게 남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리즈의 진짜 리즈 시절은 1990년대보다는 1960~1970년대다. 정확히는 전설적인 명장 돈 레비가 지휘하던 1961~1975년이다. 돈 레비 감독은 부임 당시 심각한 재정위기와 더불어 2부 리그에 속해 있던 팀을 완벽한 리빌딩을 통해 강력한 팀으로 변모시켰다. 1964년 1부 리그 승격 후 두 차례의 리그 우승, 5번의 준우승, 한 차례의 FA컵 우승으로 자국 리그 내 모든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UEFA컵의 전신인 인터시티스- 페어스 컵에서도 두 차례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절 리즈는 단 한 번도 리그 4위권을 벗어난 적이 없는 강팀이자, 다른 팀들에겐 타도의 대상이었다.

절대강자 같던 리즈의 전성기는 돈 레비가 잉글랜드 대표팀 감독으로 떠나자마자 막을 내렸다. 그의 뒤를 이은 브라이언 클러프 감독은 성적 부진으로 경질됐고, 이후 수차례 감독이 바뀌었지만 돈 레비 시절을 재현해내지는 못하고 1982년 2부 리그로 강등됐다.

리즈의 몰락은 조직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과시하던 리더가 바뀔 때 그 조직이 어떻게 흔들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 사례다. 성공을 이끌었던 리더의 갑작스런 공백은 제국이 몰락을 시작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다. 전임자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을 후임자가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곤 한다.

축구사에서 이 같은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돈 레비의 리즈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장미전쟁’을 펼쳤던 매트 버스비 감독의 맨유도 이 같은 과정을 겪었다. 버스비는 1945~1969년 맨유의 지휘봉을 잡았다. 1958년 뮌헨 비행기 참사에도 ‘버스비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조지 베스트, 보비 찰튼, 데니스 로 같은 걸출한 스타를 배출하면서 리즈보다 앞서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버스비의 후임들은 리그 우승 5회, FA컵 우승 2회, 유럽 챔피언스컵 우승 1회 등 버스비 감독이 남기고 떠난 그림자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었다. 프랭크 오파렐, 토미 도허티, 데이브 섹턴, 론 앳킨슨 등 버스비 감독 이후 15년 동안 4명의 감독이 맨유를 거쳤지만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부임한 후인 1993년까지 우승은 단 한차례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한 때 2부 리그 강등이라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가깝게는 ‘포스트 퍼거슨’의 맨유도 암흑기에 빠져있다. 1992년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한 번도 3위 이하 성적을 거둔 적 없는 맨유는 퍼거슨 퇴임 이후 데이비드 모예스 체제에서 한 시즌만에 7위로 밀려나며 유럽대회 진출권을 놓쳤다. 맨유가 유럽 무대에 나서지 못한 마지막은 1988~1989시즌 이후 처음이다. 새로 부임한 루이스 반 할 감독 역시 아직까지는 만족스러운 경기력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잉글랜드뿐 아니라 이탈리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다. 1976~1986년 지오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의 유벤투스는 유럽의 주요 우승컵을 휩쓸었다. 그러나 그가 떠난 뒤 다시 우승컵을 드는 데에는 10년이 걸렸다.

돈 레비나 버스비, 퍼거슨, 트라파토니 감독처럼 한 리더가 긴 시간 조직을 이끌면 그들이 심은 시스템이 조직에 스며들어 있게 마련이다. 이런 조직에서는 리더 부재로 인한 반작용이 더 심하다. 선수층도 그대로이고, 구단도 투자를 아끼지 않는데 오히려 성적은 떨어진다. 성공의 요인이 무형적이었던 만큼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그 원인을 정확하기 짚어내기 어렵다.

리더의 교체에서 오는 문제를 몇 가지 유형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과도한 변화가 독이 된 경우다. 클러프의 리즈가 대표적이다. 돈 레비의 자리를 채운 클러프 감독은 사실 전임 감독과의 악연이 있는 사이다. 이 때문인지 그는 부임 직후 ‘돈 레비 시절과는 다른 리즈’를 천명하며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섰다. 그러나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리즈는 경기력이 급격히 저하됐고, 클러프는 44일 만에 경질되는 수모를 당했다.

‘흔적 지우기’에 조직원과 불화 생기기도


▎리버플 지도자 양성의 상징이 된 ‘안필드 부트 룸’. 오른쪽부터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파이즐리 감독과 페이건 감독.
클러프는 사실 리즈를 제외한 다른 팀에서는 엄청난 업적을 이룬 ‘기적의 감독’이다. 그는 리즈에 부임하기 전후에, 2부 리그에 있던 더비 카운티와 노팅엄 포레스트를 이끌고 승격은 물론 1부 리그 우승까지 이뤄냈다. 클러프 본인이 겪었던 것처럼 그의 위업 때문에 후임 감독들이 힘들어했을 정도다. 그의 후임이었던 콜린 애디슨은 “‘클러프의 저주’를 받으며 감독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노팅엄의 조 키니어 감독은 “아직도 클러프가 감독 같다”며 불평을 쏟아내기도 했다. 결국 역사란 돌고 도는 셈이다.

이처럼 전임자의 강렬한 성공은 후임자에게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를 깨려다 보면 부작용이 따르기도 한다. 바로 기존 핵심 구성원과의 마찰이다. 클러프 감독과 오파렐 감독은 ‘돈 레비의 아이들’ ‘버스비의 아이들’과 마찰이 있었다. 퍼거슨이 떠난 맨유에서도 모예스 감독과 루니, 긱스 등 핵심 멤버와의 불화설이 제기됐다. 첼시에서는 무리뉴의 후계자로 불렸던 빌라스-보아스 감독이 변화를 시도하다가 오히려 ‘무리뉴의 제자들’과의 불화로 팀을 떠나야만 했다.

그렇다고 후임자가 전임자의 뒤만 따르는 것은 조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되레 위기를 자초한다. 제때 혁신하지 못하고 과거의 성공에만 집착하기 때문이다. 리더의 교체에서 오는 문제의 두 번째 유형이다.

1964년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보자. 1기 갈락티코(은하수라는 뜻으로 스타 선수를 대거 영입하는 정책)로 1950년대 강성했던 레알 마드리드와 젊은 선수로 구성된 인터밀란이 만났다. 레알은 과거의 성공 공식만을 따랐다. 이전 시대와 똑같은 포메이션에, 40대로 접어들며 전성기가 지난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등을 그대로 기용했다. 반면 인터밀란의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은 강력한 수비전술인 ‘카데나치오’를 새로 도입한 상태였다. 당연히 승리는 인터밀란이 챙겨갔다.

시간을 건너뛰어 8년 뒤인 1972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는 인터 밀란이 입장이 바뀐 채 아약스를 상대한다. 인터밀란은 그동안 에레라의 지휘 아래에서 ‘라 그란데 인테르(위대한 인터밀란)’로 불리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런데 에레라 감독이 1968년 물러난 뒤에도 인터밀란은 그의 전매특허인 카데나치오를 고수했다. 이 때는 이미 상대가 카데나치오에 대한 연구를 끝낸 때다. 아약스는 유기적인 포메이션 변경 전술로 인터밀란의 수비를 분쇄했다.

비근한 예로는 바르셀로나(바르샤)가 있다. 물론 바르샤는 지금도 강한 팀이지만 2008~2009 시즌 과르디올라 감독 시절 트레블(한 시즌 동안 자국 정규리그, 리그컵, 축구협회(FA)컵, 대륙별 챔피언스리그 중 3개 대회에서 동시 우승하는 것)을 달성할 때에 비해서는 침체한 게 사실이다. 다수의 전문가는 바르샤의 엔리케 감독이 과거의 전술인 ‘티키타카(짧은 패스와 전방 압박을 위주로 하는 전술)’를 버리지 못 하는 게 화근이라고 지적한다. 티키타카가 완벽했던 바르샤는 최강이었지만, 이 전술의 핵심 선수가 노쇠화하고 다른 전술적 특성을 가진 선수를 보유한 상황에서 과거의 스타일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강해도 제때에 변화를 주지 못하는 조직은 도태한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리버풀의 전성기 참고할 만

어찌 됐든 후임자는 어려운 처지다. 무리하게 변화를 추구해도 안 되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만도 없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지금까지 축구사에서 예를 찾았으니 해법도 축구에서 찾아보자. 필자가 가장 정답에 가까운 사례로 본 것은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까지 이어진 리버풀의 전성기 모습이다.

당시 리버풀의 눈에 띄는 특징은 감독직의 승계 시스템이다. ‘빌 샹클리-밥 파이즐리-조 페이건-케니 달글리시’로 이어지는 감독 라인은 모두 사제 관계다. 파이즐리는 2부 리그로 강등됐던 리버풀을 두 시즌 만에 승격시키고 승격 후 세 시즌 만에 우승을 달성한 샹클리 감독(1959~1973년)의 수석코치였다. 샹클리가 명예롭게 은퇴한 후 감독이 된 파이즐리는 더 성공적으로 팀을 이끌었다. 그가 재임한 10년(1973~1983년) 동안 차지한 우승 트로피는 총 20개다.

샹클리와 마찬가지로 명예로운 은퇴를 한 파이즐리의 바통을 이어받은 게 수석코치 페이건(1983~1985년)이다. 페이건 역시 샹클리와 파이즐리 감독이 해낸 것을 물려받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1985년 헤이젤 참사라는 경기 외적 요인으로 그가 물러나면서 당시 주장이었던 달글리시가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했다. 당시 리버풀은 유럽대회 출전 금지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 번의 리그 우승과 두 번의 FA컵 우승의 기염을 토했다. 1989년 힐스보로 참사라는 또 한 번의 사건이 없었다면 성공의 역사는 이어졌을지 모른다. 헤이젤 참사는 벨기에 브뤼셀의 헤이젤 경기장에서 열린 유벤투스와 리버플의 경기 때 양측 팬들의 충돌로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한 사건이다. 힐스보로 참사는 힐스보로 경기장 철조망이 무너져 96명이 사망한 사고다.

리버풀이 당시 성공적인 감독 교체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사이에 철학이 공유됐기 때문이다. 상징적인 것이 ‘안필드 부트 룸’이다. 리버풀의 홈 구장인 안필드에서 코칭 스태프들이 경기 전 모여 조용히 작전을 구상하기 위해 신발 매장 근처에 만든 작은 방을 일컫는다. 샹클리, 파이즐리, 페이건 감독이 원년 멤버다. 달글리시 감독 역시 이 곳에서 감독 교육을 받았다. 안필드 부트 룸은 리버풀이 감독 교체에도 일정한 색깔과 역량을 유지하는 비결이 됐다. 또한 선수들 역시 새 리더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하기 때문에 불화로 인한 염려도 덜 수 있다.

그렇다고 이들이 현실에만 안주한 것은 아니다. 철학을 공유하는 것과 기술을 공유하는 것은 다르다. 팀에 같은 색깔을 입히지만 같은 전략만을 고집하진 않았다. 공유하는 틀 안에서 적절한 변신을 통해 성공 가도를 달렸다. 리더 교체로 인한 두 번째 불안요소를 상쇄한 것이다. 찬 바람이 부는 인사철, 많은 기업이 참고할 만한 부분이다.

1266호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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