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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 회장 - “中 정부의 정보 수집 요청 없었다” 

다보스 포럼 공개토론회에서 군대에서 쫓겨나 회사 세우기까지 과정 밝혀 

피터 굿맨 아이비타임스 기자

▎런정페이 회장은 독자 스마트폰을 개발해 애플·삼성 그리고 중국 내 주요 라이벌 샤오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 (오른쪽) 화웨이 어센드 메이트 7 스마트폰
런정페이 회장은 지난 1월 22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에서 “1980년대 초 중국 정부가 군을 감축해 생계를 꾸려나갈 방안을 찾다가 어쩔 수 없이 회사를 창업했다”고 말했다.

런정페이 회장이 유쾌하게 풀어놓은 스토리에 따르자면 그 뒤로는 모든 일이 그냥 저절로 풀려나갔다. 화웨이는 다른 회사가 제조한 통신장비를 재판매하기 시작했다. 고객을 찾아 중국 각지에 새 판로를 개척했다. 그 뒤 직접 장비를 설계해 팔았다. 중국에서 출발해 개도국으로, 그리고 마침내 미국과 유럽으로 뻗어나갔다. 근래에는 독자 스마트폰 모델을 개발해 애플·삼성 그리고 중국 라이벌 샤오미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군대에서 나와 먹고 살려고 창업”

화웨이는 결단과 끈기를 바탕으로 조금씩 전진하며 전 세계에 직원 14만명 이상을 거느린 통신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오늘날 세계 최대 통신 업체 중 하나로 손꼽힌다. 올해 화웨이는 대략 560억 달러(약 61조원)의 매출을 달성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런정페이 회장은 말했다. 전년 대비 20% 증가한 수치다.

군대에서 퇴출된 의욕적인 젊은이가 국가의 발자취를 따라 성공가도를 달린다. 그의 이런 흥미로운 이야기는 인민해방군(PLA) 출신 배경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거나, 또는 적어도 상당한 부담을 주는 그 영향을 완화하려는 교묘한 시도로 보인다. 화웨이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 업체 중 하나로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입지를 구축했다. 하지만 성장을 가로막는 커다란 걸림돌이 있었다. 군대와의 연줄 그리고 화웨이 장비가 사실상 보안에 문제가 있다는 인식이다. 중국 첩보당국이 국가 및 기업 비밀을 훔쳐보는 잠재적인 관문 구실을 한다고 알려졌다. 더욱이 요즘은 광범위한 사이버 정탐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시대다.

화웨이 장비를 구입하는 통신 기업은 미국의 관급 계약에 입찰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미국 국가안보국(NSA)이 엄포를 놓았다. 그 영향으로 화웨이의 미국 내 매출이 떨어졌다. 미국 국회의사당에는 중국 기술 업체를 국가 후원 자본주의의 산물로 간주하는 국회의원이 적지 않다. 중국이 사이버전쟁과 첩보수집 역량 확대에 그들을 활용한다는 주장이다. 그들은 그 대표적인 증거로 항상 화웨이를 거론한다.

런정페이 회장은 전면에 나서려 하지 않고 언론 인터뷰를 꺼리기로 유명하다. 그런 이미지를 씻어내려 이번에 WEF 무대에 올랐다. 현재 170개국에 퍼져 있는 고객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기업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려 애쓴다. “우리는 중국 기업”이라고 그가 말했다. “분명 중국 공산당을 지지한다. 우리 나라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의 이익을 해치지는 않는다.”

화웨이도 사이버 정탐의 피해자로 알려졌다. 미국 NSA가 첩보 수집을 위해 중국 남부 도시 선전에 있는 화웨이 서버에 침투했다고 알려졌다. NSA 전 계약사원 에드워드 스노든이 유출한 문서 내용이다. 해외로 수출하는 장비에 몰래 장치를 심는 방법으로 정보 수집을 지원해 달라는 요청을 중국 정부로부터 받은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는 분명하게 ‘노’라고 답했다. “중국 정부로부터 그런 요청을 받은 적이 결코 없다. 우리가 다른 시스템에 침투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다.” PLA와의 연줄을 배경으로 그와 그의 회사를 규정지으면 중국 역사와 그의 역사적 위상을 오해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는 1944년 중국에서 가난하기로 손꼽히는 구이저우성 마을에서 일곱 아이 중 장남으로 태어나 성장했다. 중학교는 더 큰 도회지에서 다녔고 충칭에서 대학을 나왔다. 그리고 문화혁명의 씨앗이 된 혼란의 한복판에 발을 내디뎠다. 끊임없는 혁명에 동참하도록 마오쩌둥 주석이 강한 드라이브를 걸었다. 홍위병으로 알려진 젊은 약탈자 무리가 운동에 열성적이지 않은 사람들을 공격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사회 초년병에게 취업기회는 거의 전무했다. 군대가 피난처가 됐다.

1960년대 후반의 중국은 고질적으로 옷감 등 소비재 부족에 시달렸다.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합성섬유를 수입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 자체 조달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오지에 공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마련했다. 하지만 “아무도 이 궁핍한 곳에 공장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부는 군대를 파견했다”고 그가 말했다. “글만 좀 읽을 줄 알면 공장 건설에 적임자가 될 수 있었다. 그게 내가 군에 입대하게 된 경위다.”

군에서 런정페이 회장은 틈나는 대로 공부했다. 전자공학 교재를 구입해 석사학위까지 취득했다. 전역한 뒤에는 얼마 되지 않은 연금만 들고 거리에 나앉게 됐다. 그는 새로운 삶이 어떨지 어렴풋이 감은 잡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고통스러웠다. “우리 군인들은 시장경제에는 완전 문외한이었다”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돈벌이하는 상황이 영 거북했다.”

그는 중국 남부 광둥성 도시 선전에 자석처럼 이끌렸다. 덩샤오핑 주석이 주도하는 개혁의 진행 과정에서 중국이 글로벌 시장에 처음 빗장을 여는 현장이었다. “당시 우리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었다”고 그가 말했다. 그래서 소규모 사업을 시작했다.

TV와 기타 전자제품을 들여와 중국에서 판매하는 사업이다. 위험한 일이었다. 물건값을 선불로 지급한 뒤 떼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번은 중국 북동부 도시 지린을 방문했다가 가진 돈을 가방째 몽땅 도둑에게 털린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우리는 정말 무지했다. 하지만 시장경제에 관해 두 가지를 깨닫게 됐다. 하나는 고객의 중요성이다. 또 하나는 믿을 만한 제품 공급처를 확보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1980년대 중반 중국은 고도성장 과정에 있었다. 곧 이어질 수출 주도형 호황의 기본 인프라를 구축하는 단계였다. 누군가 통신시장의 기본 구성요소를 만들어 팔면 떼돈을 벌게 될 참이었다. 그 시장에서 한 몫 잡을 요량으로 런정페이 회장은 1987년 선전에서 화웨이를 창업했다. 외국 기업들이 어떤 식으로 하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방 기업이 하는 대로 따라 했다”고 그가 말했다. “그 뒤로 서방 기업을 우러러 보게 됐다.”

편의주의적인 중국식 잡탕 자본주의 상징?

그 말에는 다소 모순이 담겨 있다. 화웨이가 외국 라이벌 기업의 지적재산을 제멋대로 가져다 쓴다는 비난을 받아 왔기 때문이다. 2004년 미국 통신 대기업 시스코가 제기한 소송은 쌍방간 합의로 해결했다. 인터넷 라우터의 원천기술을 사실상 베껴 썼다는 주장을 무마했다. 그런 합의도 화웨이가 혁신보다는 베껴 쓰기를 더 많이 한다는 인식을 거의 씻어내지 못했다. 더구나 중국 정부가 그들을 후원한다고 간주됐다. 4년전 화웨이는 경쟁자들이 오래 전부터 제기해온 의혹을 시인했다. 그들이 정부로부터 300억 달러에 달하는 수출신용 혜택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화웨이는 아프리카·중동·남미·아시아 전반에 걸쳐 제품을 수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은 그들이 편의주의적인 중국식 잡탕 자본주의의 상징이라는 인식을 강화할 뿐이었다. 정부가 될성부른 떡잎을 골라 중국 국영기업을 통해 주문을 몰아주고 전세계로의 수출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런정페이 회장은 중국 내 위상을 감안할 때 화웨이가 불공정한 경쟁우위를 누린다는 주장을 일축했다. “미국은 전자산업에 관한 한 절대적인 선도자 지위를 누렸다”고 그가 말했다. “우리는 작은 풀잎에서 작은 나무로 성장하려 애쓰고 있다. 우리의 성공은 우리 자신에게 달렸다.”

1274호 (2015.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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