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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부르는 자유로운 심상이 작품의 경우 친절하게도 ‘바람 부는 날’이라는 꽤 구체적인 제목이 붙어있다. 참고로 윤명로 작가도 자신의 개인전에서는 개별적인 제목을 달지 않는 편이다. 덕분에 화면에 나타난 형상이 무엇인지 잘 몰라도, 작가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라도, ‘바람’이 불러오는 자유로운 심상을 떠올려볼 수 있다. 여기에 윤명로라는 작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겸재예찬’ 시리즈를 떠올릴 확률도 있다. 겸재의 ‘인왕제색도’는 누구나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중국 화풍을 따라 그리기만 했던 당시 풍속에서 겸재 정선은 최초로 우리나라의 인왕산의 비온 후 모습을 마음에 담아 고유의 화법으로 그린, 말하자면 최초의 인상주의적 산수화를 그렸던 주체적인 조선 화가였다. 윤 작가는 우리나라 문화유산에 스며있는 가장 고유한 정체성에서 가장 세계적인 것이 나온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의 작품 ‘겸재예찬’ 시리즈에서 그는 산수화의 실루엣 같기도 하고 현대 추상회화 같기도 한 작품들을 독특한 화풍으로 선보였다.시기상 ‘바람 부는 날’은 겸재예찬 시리즈 이후의 작품이지만, 왠지 ‘바람 부는 날’은 ‘바람 부는 날의 산’을 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흘러내리듯 요동치듯 자유로운 붓질이 인왕산의 멋진 바위나 구름에 둘러싸인 나무를 그린 것 같다. 공기에서는 막 삶은 가제 손수건의 수증기 냄새마저 난다. 마음을 가라앉게 하면서 동시에 슬며시 설레는, 생기 넘치는 산바람 냄새.이제 황혼의 나이가 된 그는 살아있는 ‘숨결’의 귀함에 주목한다, 살아있는 이 순간에 대해 생각하고, 보이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생기·숨·바람을 작품으로 옮겼다. 지금 여기 존재하는 나의 생이란 무엇인지. 당연한 사실이기도 하지만, 그는 들고나는 ‘숨’이 있기에 이 세상의 모든 바람도 나무도 꽃향기도 이렇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달았다고 했다.살다 보면 가끔 숨이 찬 줄도 모르고 있을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해서 어깨가 딱딱해지고, 가끔은 종일 깊이 숨 쉬는 것도 잊는다. 윤명로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인간적인 욕심을 모두 버리고 화면 앞에 선다고 말한다. 의지와 욕망이 섞인 채 붓을 들면 한 치도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여러 번 경험한 그는 호흡의 귀함과 소중함을 인생 후반부의 작품 속에 경건하게 불어넣었다.보는 사람의 욕심일 수도 있겠지만, 웨스틴조선호텔의 반들반들한 아크릴 액자는 ‘바람 부는 날’과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이 습습한 공기의 결을 그대로 드러내는 캔버스를 직접 마주할 수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보존의 문제일 것이니 어쩔 수 없었을 테지만, 그래도 이 액자의 투명한 플라스틱판은 그림을 덮어 관객의 숨과 그림 속의 바람이 섞이는 걸 차단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이 세상처럼 어딘가 몽롱한 저 바람 부는 세상. 매끌매끌한 액자의 표면 왼편으로 도시의 하늘색이 생경하게 반사된다. 빌딩과 나무들, 도시의 풍경이 그림에 겹쳐진다. 우연처럼, 우리가 사는 세계와 바람 부는 산수화가 그렇게 섞이고 있다. 그림 앞에 선다. 겉으로는 고요한 척하고 있지만 시시각각 요동치는 내 마음의 풍경이 보인다. 그림 속 자유롭고 싱싱한 저 공기가 굳은 내 속으로 생기의 바람을 불어넣어 주는 장면을 상상하며 느릿한 심호흡을 들이켜 본다.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_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로 106 웨스틴조선호텔1914년 설립된 국내 최초 근대식 호텔인 서울 웨스틴조선호텔은 국내 외 유명 작가들의 작품 50여 점을 로비, 연회장 등 호텔 곳곳에 전시중이다. 윤명로 작가의 ‘바람 부는 날’은 호텔 로비층으로 들어와 로비 우측에 위치한 저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방향으로 가다 보면, 창가 옆에 자리 잡고 있다.
박보미 -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bomi1020@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