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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인의 불교 성지를 외국인이 개발짜익티오는 미얀마인이라면 평생 세 번은 찾아간다는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 중 하나다. 해발 1102m 정상에 있는 황금바위를 보러 매년 300만명 이상의 순례객이 찾는다. 절벽 가장 자리에 아슬아슬하게 올려져 있는 바위 꼭대기 위에 올라선 7m 높이의 불탑이 장관을 연출한다. 대구 팔공산의 갓바위를 연상하면 된다.2011년 군부 독재 시대가 끝나면서 본격적인 경제개발에 착수한 미얀마 정부는 국민적 관광지인 짜익티오를 새로 단장하는 프로젝트를 계획했다. 그중 일부인 케이블카 건설을 유 사장이 따낸 것이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사업을 외국인이 따낸 것도 큰 화제거리였지만 ‘50+10+10(50년 운영, 10년 단위 2번의 재계약 가능)’이라는 계약 기간과 1에이커(약 4047㎡)당 100달러에 불과한 임대료도 매우 파격적이었다. “1990년대 초부터 미얀마에서 여러 사업을 진행했어요. 주로 미얀마 농산품을 수입하고, 플라스틱 원료를 수출했죠. 군부가 아웅산 수지를 가택 연금한 시기였으니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한국과 미얀마의 무역 규모가 100만 달러도 안 될 때였으니까요. 사업하는 저도, 미얀마 바이어도 모두에게 어려운 시기였죠. 하지만 그때부터 가깝게 지낸 이들이 지금은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고위 공무원이나 국영기업 대표가 됐습니다. 20년 넘게 미얀마에 공을 들인 보람을 느끼죠.”상사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한 유 사장은 일찌감치 베트남·아르헨티나·슬로베니아(당시 유고) 등 전 세계를 누비며 현장을 배웠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공식 스폰서였던 코오롱의 올림픽 홍보부장으로 공산권 국가의 올림픽 참가를 측면 지원한 경험도 있다. 코오롱 아르헨티나 지사장을 거쳐 1993년 법인장으로 미얀마에 첫 발을 디딘 그는 미얀마의 잠재력을 높이사 사표를 내고 아예 눌러 앉았다. “사실 미얀마는 1960년대까지만 해도 아시아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였습니다. 버마(미얀마의 옛 이름)식 사회주의와 미국 등 서방의 경제 제재로 아시아 최빈국으로 전락한 상황이었지만 제가 본 미얀마는 달랐어요. 상사 법인장으로 일했으니 온갖 사업을 다 건드려봤죠. 실패도 많이 했지만 가능성만큼은 전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나라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원유·천연가스 등 지하 자원은 물론 지리적 조건이나 노동생산성도 훌륭하니까요. 체제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엄청난 속도로 발전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죠. 예상보다 개방이 늦어졌지만 어쩌면 미얀마 경제의 도약은 지금부터 시작인 거죠.”그는 20년 넘게 미얀마에 머물면서 4년간 한인회장을 맡기도 했다. 터줏대감이나 마찬가지다. 그는 최근 일본과 중국 등이 미얀마 시장 개척을 위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데 한국만 뒤쳐지는 것 같아 아쉽다고 했다.“한국과 마찬가지로 미얀마도 일본의 지배를 받았죠. 여전히 반감은 있지만 일본은 이후 수십 년간 이 나라에 온 정성을 쏟으면서 구애를 해왔습니다. 경제 개방 이후 가장 적극적인 것도 일본이죠. 미얀마는 한국과 같이 차량이 우측통행을 하지만 좌측통행을 하는 일본·영국처럼 상당수 자동차의 운전석은 오른쪽에 있습니다. 일본 중고차를 대거 들여왔기 때문이죠. 당시 시장에 뛰어든 한국 업체도 있었지만 일본에 밀렸습니다. 서방 경제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중국과 살가운 일본은 환영을 받는데 한국은 아직 아닙니다. 미얀마 시장을 뚫으려는 국내 은행들이 계속 지점 개설에 실패하는 이유도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죠.”유 사장은 경제 교류가 확대되려면 미얀마가 한국에게 가진 서운한 감정부터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미얀마는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에 쌀을 지원한 국가 중 하나다. 그는 “미얀마 고위층 중에 ‘어려울 때 도와줬는데 한국은 잘 살게 되고 나서 우리를 외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고 했다. “한국은 아직도 잘못된 인식에 갇혀 미얀마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집도 없고, 전기도 안 들어오는 다큐멘터리 속 불쌍한 후진국으로만 생각하는 거죠. 도움의 대상이 아닌 투자의 파트너로 존중하지 않으면 돈을 싸 들고 와도 환영 받지 못합니다. 한국이 아니어도 투자할 나라는 넘쳐나니까요.”미얀마는 현재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중이다. 공급이 모자라 수도인 양곤 시내 월세 가격은 서울이나 도쿄보다 비싸고, 호텔 숙박비도 원화로 하루에 30만~40만원을 호가한다. 시내에 있던 한국식당들이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고 외곽으로 자리를 옮겼을 정도다. 외국인 투자자가 엄청나게 몰려든 탓이다. 유 사장은 “지가 등 투자 비용이 크게 증가해 늦은 감이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기회가 많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미얀마 진출에 성공하려면 미얀마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 외국인 투자법 관련 지식이 꼭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식민 지배했던 일본은 적극 구애로 미얀마 마음 얻어“미얀마는 영국 식민지가 되기 전인 18세기 동남아시아 최대의 왕국을 형성했던 나라입니다. 양곤에 있는 골프장 8개 중에 5개는 1800년대 말에 지어진 겁니다. 조선 말엽쯤에 이미 골프를 칠만큼 번성했던 거죠. 대국의 후손이란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예전에 미얀마에 진출하고 싶다며 찾아온 한 사업가에게 아는 공무원을 소개했는데 면전에서 ‘그 정도(투자금)는 서울 아파트 한 채 팔면 마련한다’며 무시하듯 말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후진국이니 내가 돈을 좀 풀면 뭐든 될 것’이란 생각으로는 뭘 하든 백전백패입니다. 외국인 토지 소유 규정이나 투자 제한 업종 등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고요.”유 대표는 뇌물 등 비정상적인 루트보다는 파트너와의 신뢰를 쌓는 게 먼저라고 지적했다. “미얀마는 우리와 같은 우랄 알타이 어족입니다. ‘엄마’ ‘아빠’는 미얀마에서도 발음과 뜻이 같습니다. 사람들의 행동이나 사회 분위기도 꼭 우리나라 1960~70년대와 닮았죠. 여러모로 정이 갑니다. 얼마든지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이죠. 돈과 투자를 논하기 전에 먼저 마음의 문을 여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