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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맥가이버형 기술이 세상을 밝힌다 

종이로 만든 50센트짜리 현미경 … 저개발국 질병 진단의 획기적 돌파구 마련 

박용삼 KAIST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
미국의 비영리 재단인 새플링에서 운영하는 TED(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는 ‘널리 퍼져야 할 아이디어’라는 모토로 경제·경영·사회·과학 분야에서 세계적 저명 인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다. TED 웹사이트에 등록된 강의(1900여건)는 대부분 한국어 자막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뭔가 부족하다. 시사성 있는 강의를 선별해 소개하고, 그 의미를 해석하고 설명한다면 금상첨화가 아닐까. DJ나 VJ처럼 LJ(Lecture Jockey)로서 테드 강의를 돌아본다.

초등학생 시절, 골목 어귀에 모인 아이들과 심각하게 토론했던 주제는 ‘A와 B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였다. 김일과 이노키가 싸우면? 홍수환과 알리가 싸우면? 차범근과 펠레가 싸우면? 몇 차례 설전이 오가지만 대개 답은 정해져 있다. 치사한 반칙과 편파적 판정에도 결국 한국 선수가 이긴다. 김일과 펠레가 축구로 붙어도 김일이 이긴다.

그럼 007과 맥가이버가 싸우면 어떻게 될까? 이건 좀 생각이 필요하다. 우선 007에게는 듣도 보도 못한 온갖 첨단 무기가 있다. 자동차가 방탄인 것은 기본이고 미사일도 나간다. 버튼만 누르면 독침이 되는 만년필도 있다. 맥가이버는 빈손으로 껄렁 껄렁 아이스크림이나 먹고 다닌다. 하지만 위기에 몰리면 주변에 있는 잡동사니로 기막힌 무기를 뚝딱 만들어 내는 절대무공이 있다. 사실 007은 무기가 다 떨어지면 맥을 못 춘다. 결국 맥가이버 승(勝).

기술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우리는 007형 첨단기술 개발에 몰두해왔다. 더 빠르고, 더 강하고 그래서 더 비싼 기술들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약간 느리고, 왠지 어설퍼도 제 때 제 역할을 해내면 그만이다. 가격까지 싸다면 금상첨화. 특히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에게는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007 보다는 소탈하고 친절한 맥가이버 쪽이 훨씬 잘 어울린다. 맥가이버형 기술이 필요한 이유다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007형 첨단기술


▎큐드럼은 바퀴 모양으로 만들어진 생수통으로 식수를 담아 손쉽게 끌 수 있게 만들어졌다.
미국 스탠퍼드대 바이오공학과에 재직 중인 마누 프라카쉬(Manu Prakash) 교수는 저개발국 빈민들이 환영할 만한 맥가이버형 기술을 선보였다. 그것도 단돈 50센트라는 믿기지 않는 가격에.

17세기 중반 발명된 현미경은 의학 분야에 혁명을 가져왔다. 각종 질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과 바이러스를 육안으로 확인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현미경은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그 결과 매해 수백만명이 검사 한번 못해보고 정확한 병명도 모른 채 사망에 이른다. 프라카쉬 교수는 개발도상국이나 제 3세계 사람들의 질병 진단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저렴한 현미경을 개발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종이로 만든 현미경, 일명 ‘폴드스코프(Foldscope)’다.


제작 방법은 간단하다. 도면을 종이에 인쇄한 다음 선에 따라 접기만 하면 된다. 종이로 된 지지대 안에 렌즈와 배터리, 그리고 LED 전등이 가지런히 구성되어 있다. 검사 시료가 놓인 슬라이드를 그 사이로 밀어 넣으면 된다. 종이로 만들었다고 해서 장난감 정도로 여기면 오산이다. 배율이 최대 2000배나 되고, 진단 용도에 맞게 형광·편광·투사형 현미경 등 제대로 구색이 갖춰져 있다. 실제로 프라카쉬 교수는 테드 강연 중에 30여 종류의 폴드스코프를 서류봉투에서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휴대성과 내구성이 뛰어난 폴드스코프는 작동 방법도 매우 간단하다. 눈썹이 렌즈에 닿을 정도로 눈을 폴드스코프에 가까이 대고 관찰하고 싶은 물체를 보면 된다. 초점이 맞지 않으면 두 손으로 슬라이드를 상하좌우로 밀면서 맞춘다. 그러면 이내 눈앞에 초미세의 세계가 펼쳐진다.

프라카쉬 교수는 이렇게 개발된 폴드스코프를 아프리카와 동남아 지역에서 질병 진단 도구로 쓰일 수 있도록 보급하고 있다. 최근 스탠퍼드대학은 폴드스코프를 해마다 10억개 이상 생산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폴드스코프는 한마디로 ‘적정기술(適正技術, Appropriate technology)’이다. 첨단기술은 아니지만 해당 지역의 환경이나 경제, 사회적 여건에 맞도록 만들어진 기술을 말한다. 특히 저개발국·저소득층의 삶의 질 향상과 빈곤퇴치 등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저비용의 간단한 기술과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로 구성된다는 것이 특징이다.

적정기술의 개념은 1960년대 <작은 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를 출간한 독일 출신의 영국 경제학자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슈마허의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 개념에서 시작됐다. 슈마허는 소규모 자본과 소박한 기술을 바탕으로 지역 주민의 빈곤문제를 해결하고 자립을 돕는 ‘인간의 얼굴을 한’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후 중간기술이라는 용어는 좀 더 의미가 확장되어 적정기술, 대안기술, 따뜻한 기술, 착한 기술 등으로 불리게 된다.

소아정신과 의사였던 폴 폴락(Paul Polak)도 적정기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폴락은 “공학자의 90%가 부유한 10%를 위해 일하고 있다”며 “우리의 역량을 소외된 90%를 위해 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실제로 물이 부족한 저개발국 빈농을 위해 발로 밟아 지하수를 끌어 올리는 페달 펌프를 개발해 방글라데시에 150만대, 전 세계적으로 300만 대를 판매하기도 했다. 그것도 대당 25달러라는 저렴한 가격에 말이다.

그 외에도 적정기술의 사례는 많다.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 오지에서 한번에 75리터의 물을 굴려 나를 수 있는 원주형 식수통인 ‘큐드럼(Q drum)’이 대표적이다. 또한 오염된 물에서 박테리아·기생충 등을 걸러주는 3.5달러짜리 휴대용 정수기 라이프스트로(Lifestraw)도 있다. 물과 약간의 표백제(10ml) 만으로 태양광을 이용해 40~60와트 밝기의 빛을 내는 페트병 전구는 필리핀과 남미의 빈민들에게 빛을 선물했다는 극찬도 듣는다.

최근에는 하버드대 여학생 2명이 빈곤층 어린이들이 가지고 노는 동안 전기를 생산·저장하는 축구공인 ‘소켓(SOCCKET)’을 개발해 큰 박수를 받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아이들이 3시간 정도 공을 차면 30분 정도 전기가 나오나요”라고 묻자 “30분 정도 차면 3시간 분량의 전기가 나온다”고 대답해 화제가 된 적도 있다. 2011년 개발자들이 설립한 사회적 기업 ‘언차티드 플레이(Uncharted Play)’에서는 이 공을 99달러에 판매한다. 판매 수익은 아프리카 등에 무료로 소켓 축구공을 보내는데 쓰인다.

인간의 얼굴을 한 따뜻한 ‘적정기술’

적정기술이 접목된 제품은 명분에 비해 시장성이 낮아 기업 혼자만의 힘으로 기술 개발을 추진하고 제품화하는 게 어려운 편이다. 따라서 당장은 정부가 적정기술 개발을 이끌고 제품화와 마케팅을 도와줄 필요가 있다. 출연연구소와 민간 기업이 함께 적정기술 개발에 나서고, 정기적으로 로드쇼 등을 통해 홍보에 나선다면 큰 도움이 되리라 본다.

다행히 최근 정부 주도로 장애인 및 고령자 등 취약계층을 배려하고, 범죄예방과 작업환경 개선 등 국민안전을 확보하기 위한 따뜻한 기술 개발에 나서고 있는 모습은 매우 바람직해 보인다. 부의 양극화 탓에 갈수록 심해지는 정보·문화·교육·에너지·의료서비스 측면에서의 사회적 격차를 완화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 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1285호 (2015.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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