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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파워 피플(95) 맥 휘트먼 휴렛패커드(HP) 회장] 맨주먹으로 억만장자 꿈 이룬 ‘닷컴의 전설’ 

이베이 키우며 e-커머스의 전형 만들어 ... 공화당 후보로 나선 선거에선 낙선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사진:뉴시스
맥 휘트먼(59) 휴렛패커드(HP)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는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해 지난 5월27일 발표한 ‘2015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00명’에서 14위에 올랐다. 지난해 20위에서 6단계를 뛰어올랐다. 포브스가 발표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자수성가 여성’에서는 10위를 차지했다. 6월4일을 기준으로 재산이 22억 달러에 이른다. 미국 내 949명의 억만장자 중 335위에 올랐다. 휘트먼은 유산 상속도, 창업도 하지 않고 그야말로 교육과 실력만으로 이런 재산과 자리를 차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휘트먼의 재산과 명성은 대부분 온라인 경매 업체인 이베이(eBay)에서 나왔다. 그는 이 회사에서 10년간 근무했다.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 자리 잡은 미국의 글로벌 인터넷 C2C 기업이다. 1995년에 설립돼 닷컴 성공신화를 이끌었다. 현재 30개 이상의 국가에서 현지 영업을 하고 있다. 경매 방식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직접 판매와 송금을 포함한 다양한 방식의 e-커머스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휘트먼은 뉴욕주 롱아일랜드 출신으로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하버드대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마쳤다. 이후 제조 업체인 프록터 앤드 갬블(P&G)에서 일하다 컨설팅 업체인 베인 앤드 컴퍼니으로 옮겼다. 이 회사에서 8년간 컨설턴트로 일한 그는 브랜드 관리에 중점을 두는 컨설팅을 주로 맡았다. 그 뒤 월트 디즈니 컴퍼니와 신발 제조 업체 스트라이드 라이트, 꽃 배달 체인 FTD, 완구 업체 하스브로 등에서 관리직으로 일했다. 모두 미국의 쟁쟁한 기업들이다.

1998년 소규모 벤처 이베이에 베팅

그는 1998년 과감한 결심을 했다. 42세였던 그는 당시만 해도 소규모 벤처기업에 불과한 이베이의 최고경영자를 맡은 것이다. 모험이었다. 주변에서 말렸으나 가능성을 보고 베팅을 했다. 인터넷을 이용한 닷컴산업의 미래를 누구보다 먼저 본 것이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을 선택한 것이다. 휘트먼은 1998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 이베이의 CEO로 활동했다. 10년 동안 신화를 만들었다. 직원 30명에 매출 500만 달러의 소규모 벤처기업을 직원 1만5000명에 매출 80억 달러의 공룡기업으로 키워놓는 신화를 쓰고 이 회사를 떠났다. 이베이는 1998년 9월 기업공개(IPO) 후 40분기 연속 매출 성장을 기록했다. 이익도 매년 늘었다. 인터넷 보급이 확산하고 e-커머스가 대중화되면서 초기 이베이 매출은 세 자릿수의 초고속 성장을 기록하기도 했다. 휘트먼이 당시에 받은 스톡옵션 등이 22억 달러에 이르는 재산의 원천이 됐다. 창업도, 유산 상속도 아니고 오로지 전문 경영인 근무를 통해 받은 급료와 보너스, 스톡옵션으로 이 정도 재산을 일군 것이다. 현재 이베이는 2014년 기준 직원수 3만 4600명에 매출 1790억 달러에 세전이익 35억1000만 달러의 초 거대 기업이다.

휘트먼이 이베이에서 퇴진할 당시 실리콘밸리는 ‘닷컴 신화를 만든 전설’이 사라지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1998년 이베이의 CEO로 취임해 고속성장을 주도한 그는 10년간 이베이를 세계 최대의 인터넷 경매업체로 키운 것은 물론 e-커머스의 한 전형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애 따라 실리콘밸리의 인터넷 산업을 실질적으로 이끈 지도자로 평가 받는다. 휘트먼에게는 ‘세계 최대 온라인 마켓플레이스(온라인 장터)를 만든 인물’ ‘맨주먹으로 억만장자 자리에 오른 전설적인 여성 경영인’이라는 수식어가 항상 따른다.

재미난 것은 이베이 CEO를 맡으면서 “회사의 참신한 전략과 성장을 위해 CEO는 10년 이상 해서는 안 된다”고 공언했다는 사실이다. 2008년 물러나면서 이 약속을 지켰다. 주변에 “이미 오랫동안 퇴진에 대비해 후계자 양성을 준비해 왔다”고 전했다. 마지막까지 CEO의 임무를 다한 셈이다. 그는 이베이의 후계자를 뽑기 위해 임원들에게 각기 다른 역할을 돌아가며 맡도록 했다. 다양한 경험을 쌓으며 역량을 키우라는 뜻도 있다.

그는 자신의 후임으로 이베이의 경매사업 부문 사장을 맡고 있는 존 도나후를 선택했다. 도나후는 2005년 휘트먼 자신이 경매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영입했다. 당시 연 매출 60억 달러의 3분의 2를 인터넷 경매에 의존하던 이베이는 경매사업 부문의 정체로 성장에 제동이 걸렸다. 이에 따라 경매사업 전문가인 도나후에게 CEO를 맡겨 자신이 떠나서도 성장이 가능하도록 만든 것이다. 휘트먼의 용의주도한 성격이 돋보이는 인사다. 휘트먼은 이베이에서 일하면서 ‘생산성은 자율 강화를 통한 창의성 배양에서 온다’는 인사 철학을 내세웠다. 사업을 진행하면서 굵은 방향만 제시하고 세부 사안은 임원들이 스스로 책임지고 결정하고 추진해 책임지도록 했다. 임원들이 더욱 필사적으로 일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재임 후반기에는 아마존닷컴 등과의 경쟁이 가열되면서 성장세가 둔화되기도 했다. 2005년 25억 달러에 인수한 인터넷전화업체 스카이프가 14억 달러로 가치가 떨어지면서 경영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베이를 그렇게 키운 공로는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휘트먼은 자신의 과감한 도전과 경영에 대해 어머니를 최고의 멘토로 꼽는다. 그의 어머니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공기와 트럭 제조 공장의 기계공으로 일했던 여장부였다. 중국을 80차례나 여행하기도 했다. 휘트먼은 어머니가 “일단 행동에 나서라”는 가르침을 자신에게 주었다고 말했다.

독특한 것은 이런 ‘닷컴의 전설’이 이베이의 경영 일선을 떠난 뒤 택한 길이 정치라는 점이다. 휘트먼은 물러나기 전에도 이미 정치 자금을 기부하는 등 공화당과 가까웠다. 이베이에서 물러난 뒤 치러졌던 20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공화당의 존 매케인 후보 캠프에서 일했다. 당시 매케인은 대선 토론에서 자신이 당선하면 휘트먼을 재무장관에 임명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선거에서 매케인이 버락 오바마에게 패배하면서 실현되지 못했다. 2012년 미국 대선에서는 미트 롬니를 지지했다. 롬니는 휘트먼의 능력을 칭찬하며 당선하면 내각에 기용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롬니가 대선에서 패배하면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고의 멘토는 자신의 어머니


▎휘트먼은 2010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지만 천문학적인 선거자금만 쓰고 낙선했다.
휘트먼은 2010년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에 출마했다. 그해 6월 공화당 캘리포니아 주지사 후보에 지명됐는데 극우 성향의 대중단체인 티파티의 강력한 지지가 바탕이 됐다는 평가다. 그해 11월 서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전을 펼치면서 휘트먼은 세가지 공약을 중점적으로 내세웠다. 일자리 창출, 주정부 지출 감축, 교육 개혁을 내세웠다. 전형적인 공화당 어젠다다. 수 많은 공약을 내놓고 이 중 일부만 완수하는 것보다, 완수할 수 있는 소수의 공약을 내세우는 게 유권자들에게 정직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글로벌 온난화에 대응하는 주 환경법을 폐기해 기업 규제를 완화하고 일자리 창출의 전기로 삼겠다는 공약도 내놨다. 공화당 출신의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아널드 슈워제네거도 이 법을 ‘일자리 킬러’라고 말하며 휘트먼을 지지했다. 하지만, 유권자들은 그런 휘트먼을 거부했다. 공화당 고위 정치인은 휘트먼을 높게 평가하지만 캘리포니아주 유권자들은 대중 정치인으로서 휘트먼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나친 공화당 색채를 드러낸 것이 패배의 원인이라는 지적도 있었다.

당시 화제가 됐던 것은 선거자금의 규모다. 무려 1억4200만 달러(약 1580억원)의 천문학적 액수의 선거자금을 사용했으나 민주당의 제리 브라운 후보에게 12.3%의 표차로 완패했다. 휘트먼이 쓴 선거비용은 미국 선거 역사상 개인 선거자금으로는 가장 많은 액수다. 당시 14억 달러가 넘던 개인 재산의 10%를 넘었다. 선거 과정에서 멕시코 이민 출신 전 가정부로부터 부당 해고와 임금체불을 이유로 소송을 당하면서 이미지가 크게 손상됐다. 미국 선거, 특히 멕시코와 접경하고 히스패닉 인구가 많은 캘리포니아주 선거에서 히스패닉은 상당한 영향력이 있다. 그 결과 미국 선거 역사상 가장 많은 개인 재산을 쏟아 붓고도 낙선한 후보라는 정치적 불명예를 얻게 됐다.

HP의 부흥 이루면 美 차기 대선에도…

휘트먼은 이런 선거자금을 바탕으로 캘리포니아 전 지역에서 신문·잡지·라디오는 물론 페이스북 비디오 등 스마트폰을 활용한 첨단 광고전을 대대적으로 펼쳤다. 하지만 득표율이 10%이상 차이 나는 쓰라린 패배를 겪었다. 당시 휘트먼은 미국 선거에서 최대 관심 인물이 됐다. 휘트먼을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에 맞설 공화당의 여성 대항마로 여기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선거에서 승리했더라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자리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휘트먼에게는 아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가 또다시 정상에 올라 명예를 회복하고 대선에 도전할 발판을 마련할 길은 의외로 빨라 다가왔다, 2011년 11월22일 세계 최대 PC제조 업체인 HP의 이사회가 그를 CEO로 임명한 것이다. 당시 HP는 주력인 PC시장의 성장 부진과 리더십·방향성 부재라는 악재가 겹치며 주가가 한 해 40% 이상 하락하면서 상당한 위기를 맞았다. 2000년대 초반 여성 CEO인 칼리 피오리나를 임명해 조직을 혁신했던 HP가 다시 여성 CEO 휘트먼을 맞은 것이다. 재미난 것은 피오리나도 2010년 캘리포니아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해 3선 관록의 바버라 박서 민주당 의원과 여성 대 여성의 대결을 벌였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상원의원 선거 중 캘리포니아가 가장 큰 관심을 모았다. 결과는 피오리나의 낙선이었다.

HP 이사회는 실적 부진을 이유로 레오 아포테커 CEO를 해임하고 당시 HP 이사로 활동하고 있던 휘트먼을 후임으로 임명했다. 레이 레인 이사회 의장은 “지금 HP는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며 “시장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경영전략을 실행할 수 있는 새 리더십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휘트먼은 검증된 기술적 통찰력이 있는 인물로 지난 8개월간 이사로 재직하면서 HP의 제품과 시장에 대해 높은 이해도를 보였다”고 지적했다. 휘트먼은 “미국 IT업계와 전 세계에 중요한 기업인 HP를 이끌게 돼 영광이다”라고 말했다. HP는 세계 최대 PC제조 업체로서 미국 테크놀로지 기업의 상징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윌리엄 휴렛과 데이비드 패커드가 공동 설립한 전자통신 기업으로 PC와 노트북, 서버, 프린터 등을 생산하는 IT 업체다. 2011년 매출 1120억 달러의 초 거대 공룡 기술기업인 HP의 조타수를 맡은 그는 2014년부터 회장도 함께 맡고 있다. 거대 기업 HP를 운영하면서 휘트먼 회장이 과거의 명성을 어디까지 회복할지에 수많은 사람의 관심이 모이고 있다. 차기 미국 대선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1290호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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