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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 교수의 ‘실리콘밸리 창업마피아’| 구글의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순 없다 

세상보다 딱 한 발자국만 앞서 ...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로 이룬 기적 

홍익희 배재대 교수

▎(왼쪽) 래리 페이지, (오른쪽) 세르게이 브린. / 사진:중앙포토
구글이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무렵 그 많던 검색엔진 시장에서 그들은 세상보다 딱 한 발자국 앞서 나갔다.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천재들을 세상은 그리 반겨하지 않는다. 수많은 천재들이 비운에 사라진 이유이다. 시장은 딱 한 발자국 앞에서 대중이 필요로 하는 것을 공급하며 대중을 이끌어주는 자를 반긴다. 무지개 빛 뜬 구름보다는 ‘실용성’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 무렵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검색엔진들에 사람들은 짜증을 냈다. 검색을 하면 불필요한 쓰레기 정보까지 무더기로 뱉어내는 통에 제대로 된 정보를 찾기 힘들었다. 그야말로 ‘두서 없이’ 떴다. 검색할 때마다 골머리를 앓던 래리 페이지는 고객이 검색하는 정보가 중요한 순서대로 검색창에 뜨게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이 구글의 시작이다.

쓰레기 정보까지 뜨던 검색 시장 평정

때마침 래리 페이지는 지도교수로 인공지능의 최고 권위자인 테리 위노그래드 교수를 택한다. 그는 인간과 컴퓨터 상호작용 분야의 선구자였다. 페이지가 위노그래드 교수를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교수는 래리 페이지에게 월드와이드웹을 논문 주제로할 것을 권유했다.

1995년 어느 날. 그는 불현듯 떠오른 자신의 아이디어를 정신 없이 종이에 쓰기 시작했다. 이 해에 야후가 탄생하고 이 회사의 라이벌 AOL이 거의 500만의 인터넷 가입자를 유치한 해였다. 그 1년 전 넷스케이프가 탄생했고 인터넷산업은 바야흐로 개척기에 들어서고 있었다. 래리는 정보의 중요도에 따라 가중치를 어떻게 매길지 고민했다. 중요한 논문일수록 피인용 횟수가 많다는데 착안했다. 따라서 사람들이 링크를 걸어 인용하거나 공유하는 정보일수록 쓸모 있는 정보라고 판단했다. 그에겐 그 아이디어를 수학적 알고리즘으로 만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다.

친구 세르게이 브린은 천재적인 수학적 재능으로 이 문제를 해결했다. 이른바 ‘페이지랭크(Pagerank)’ 기술이다. 둘은 같은 유대인이자 1973년생 동갑내기였다. 스탠퍼드 대학은 유대인 학생이 전교생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었다. 둘은 일을 함께 하면서 단짝이 되었다.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두 사람은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결국 래리와 세르게이가 개발에 성공한 검색엔진은 웹검색에 관한 한 초기 수준의 인공지능과도 같은 혁명적 검색엔진이었다. 그들은 이 유용한 검색엔진을 사줄 포털 업체를 찾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기껏 만들어 놓았는데 사장될 위기에 봉착했다. 할 수 없이 학생 신분임에도 스스로 회사를 차릴 수밖에 없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창업의 길로 내몰린 것이다. 돈이 없던 그들은 여자 친구 집 차고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들이 검색시장에 진출했을 때는 야후·알타비스타·라이코스·익사이트 등 너무 많은 업체들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자적인 창의성을 갖춘 이들의 검색엔진이 결국 시장을 평정했다.

유대인 부모들은 자녀의 탤런트를 찾아주는 데 최선을 다한다. 아이가 재능을 찾는 데 부모가 도움을 주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책을 읽어주거나 놀이 등을 통해 아이가 어느 것에 호기심을 느끼는지 살펴본 뒤 그 방향으로 아이를 자연스레 유도한다. 래리 페이지 역시 그의 성공 뒤에는 부모의 노력이 있었다. 아버지는 미시건주립대 컴퓨터공학 교수이고, 어머니도 컴퓨터 교사였다. 부모 덕에 그는 이미 다섯 살 때부터 메모리 용량 32Kb(킬로바이트)인 ‘엑시디 소러스’란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다. 이런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래리 페이지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레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발명가를 꿈꿨다. 그는 12살 때 위대한 발명가 니콜라 테슬라의 전기를 읽고 큰 감명과 동시에 충격을 함께 받았다. 테슬라는 교류발전소와 교류발전기, 전기모터 등을 발명해 오늘의 전기시스템 기반이 있게 한 진정한 천재였다. 래리의 아버지는 틈날 때마다 발명가를 꿈꾸는 아들을 미국 전역으로 데리고 다니며 로보틱스 컨퍼런스를 보여주었다. 래리 페이지는 어릴 적 그런 경험들이 더 많은 가능성을 꿈꾸게 했다고 회고했다. 아버지가 아들의 꿈을 찾아준 셈이다.

재능을 키우는 유대인 교육법


세르게이 브린은 수학 천재였다. 모스크바대학 출신 유대인 과학자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이들 유대인 부부는 러시아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다. 결국 어렵게 비자를 얻어 1979년 소련을 떠나 브린이 6살 때 미국으로 왔다. 부부는 유대인답게 자기 분야에서 특출했다. 어머니는 미국 우주항공국(NASA) 과학자로 특채되었으며 아버지는 메릴랜드대학 응용통계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그런 부모님 덕에 브린은 어려서부터 수학에 흥미를 보였다. 부모님이 수학 연산을 많이 필요로 하는 일을 했기 때문에, 세르게이 브린은 9살 때부터 가정용 컴퓨터를 만질 수 있었다. 그는 중학교 때부터 수학 신동으로 불렸다. 이를 계기로 메릴랜드대학에서 수학과 컴퓨터공학을, 스탠퍼드 대학원에서 컴퓨터공학 박사과정을 밟았다.

성실히 일하는 사람은 일에 미친 사람을 못 당하고, 일에 미친 사람은 일을 즐기는 사람을 못 당한다. 요새 젊은이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 하는 곳 중의 하나가 구글이다. 즐거운 놀이터 같은 근무환경과 복지제도가 좋기로 소문났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환경은 사람을 편하게 한다. 게다가 최고급 식당은 직원들의 3끼 식사를 무료로 제공한다. 여기에 사내 탁아소, 헬스, 스파, 수영장, 의료진, 치과, 자동차정비소, 바비큐 시설은 물론 심지어 근무시간에 마사지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직원들은 근무시간인데도 소파나 수면캡슐에서 잠자는 건 다반사고, 뜰에서 비치발리볼을 즐기고 자신의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직원이 적지 않다. 모두 개인의 창의성을 이끌어 내려는 노력이다. 창의성은 경직된 분위기에서는 잘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일을 재미있게 즐길 때 창의성이 더욱 높아진다.

책상 앞에 앉아서 매일 똑같은 업무를 반복하는 직원에게서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없다는 건 두 창업자의 7:2:1 정책에서도 잘 드러난다. 7:2:1은 직원들이 업무에 70%의 시간을 할애하고 20%는 업무 이외에 회사와 관련된 자신만의 독자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10%는 회사 일과는 전혀 상관 없는 일로 연구하는 것이다.

구글의 기업문화는 상당 부분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이라는 젊은 창업주의 개성에서 비롯했다. 구글의 대표적인 윤리 원칙은 ‘악해지지 말라(Don’t be evil)’다. 구글에 악(惡·evil)은 인터넷 이용자들을 성가시게 하는 모든 것들, 이용자를 속여서 돈을 버는 행위, 정보를 독점하거나 그 자유로운 유통을 방해하는 행위들이다.

‘전 세계 정보를 체계화해서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미션을 내걸고 있는 구글의 래리 페이지는 자신이 죽으면 재산을 자선단체에 기부하는 대신 엘런 머스크에게 주겠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비전 있는 기업이 사회에 기여한다는 신념을 보여준다.

홍익희 - 배재대 교수. KOTRA 근무 32년 가운데 18년을 뉴욕·밀라노·마드리드 등 해외에서 보내며 유대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유대인들의 경제사적 궤적을 추적한 [유대인 이야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출간했다.

1292호 (201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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