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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희교수의 ‘실리콘밸리 창업마피아’ 에릭 슈미트] 이성적 경영자이자 감성적 관리자 

혈기 넘치는 창업자 조율하며 구글 키워 ... 자바 언어 확산시킨 일등공신 

홍익희 배재대 교수

▎에릭 슈미트.
구글의 두 천재 창업자, 래리 페이지와 세르게이 브린에게는 에릭 슈미트라는 훌륭한 어른이 있었다. 사실 이 혈기왕성한 두 젊은이들의 창의성만 가지고는 구글이 선망 받는 기업이 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둘을 잘 조율하고 소통하게 하는 에릭 슈미트가 있었기에 오늘 날의 구글이 가능했다.

구글이 슈미트를 영입한 계기가 있었다. 1999년 구글이 한창 고속 성장할 때, 나날이 증가하는 서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를 받아야 했다. 창업 초기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창업자 앤디 벡톨샤임과 아마존 회장 제프 배조스로부터 받은 엔젤투자금 10만 달러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그래서 두 청년은 벤처캐피털로부터 투자를 받기로 했다. 이때 투자키로 한 ‘클라이너 퍼킨스’와 ‘세쿼이아 캐피탈’은 2500만 달러 투자에 대해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 20대였던 래리와 세르게이가 너무 젊고 경영 경험이 없으니, 제대로 기업을 이끌어갈 수 있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에릭 슈미트였다.

투자 받는 조건으로 영입한 전문경영인


이런 사례가 그전에도 있었다. 애플이 그랬다. 스티브 잡스는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라는 권유를 받고 당시 펩시콜라 CEO였던 존 스컬리를 모셨다. 하지만 2년 뒤 스컬리는 이사회를 움직여 잡스를 회사에서 몰아냈다. 그 뒤 애플은 경영난에 빠지며 파산 직전까지 이르렀다. 다행히 잡스가 돌아와서 회사를 구했지만 애플에게는 위기의 순간이었다.

에릭 슈미트는 다르다. 올해 60살인 슈미트는 외모로만 본다면 보수적인 느낌의 관리자 타입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 역시 영락없는 엔지니어다. 이런 점에서 창업자들과 호흡을 같이 할 수 있었다. 슈미트는 경제학 교수인 아버지와 심리학을 공부한 어머니를 둔 학구적인 가정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가졌다. 당시 컴퓨터는 종이카드에 구멍을 뚫은 펀치카드를 사용하던 시절이었다. 운동도 좋아해 고교 때 달리기 선수였다. 그는 프린스턴대학에서 처음엔 건축학을 공부했으나 전기공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방학 때면 그는 벨연구소에서 인턴을 했다. 당시 벨연구소는 C언어와 UNIX 운영체재를 개발하고 있었는데, 슈미트는 인턴을 하면서 LEX언어를 개발해 천재의 면모를 보였다. 그 뒤 UC버클리에서 전기공학으로 석사와 박사학위를 땄다. 1983년 썬마이크로시스템즈 창립 초기 슈미트는 개발팀장으로 입사해 자바(Java) 언어 개발을 이끌었다. 당시의 C언어로는 기계마다 작동구조가 달라서 각각의 기계마다 따로 프로그래밍을 해야 했다. 때문에 모든 기계에 통용되는 프로그래밍언어가 필요했다. 그것이 자바였다. 에릭 슈미트는 자바를 전 세계로 확산시킨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능력을 인정받아 썬테크놀로지 사장을 거쳐, 18년 만에 썬마이크로 시스템즈의 최고기술책임자(CTO)를 맡게 된다.

그는 직원들에게 편하고 친근한 상사였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직원들은 만우절 에릭의 사무실 전체를 해체해 연못 위에 다시 그대로 복구해뒀다. 심지어 전화선까지 연결해놓았다. 직원들은 또 슈미트의 폴크스바겐 비틀을 분해해 그의 사무실 안에 다시 조립해 놓기도 했다. 이런 격의없는 수평문화는 창의성과 혁신이 자라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1997년 슈미트는 썬을 떠나 네트워크 기기 개발사 노벨(Novell)의 대표이사를 4년간 지냈다. 그가 취임할 당시 노벨은 힘든 시기였다. 시작부터가 도전이었다. 분기 사업보고서에 1400만 달러 적자를 공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경영진은 회사의 잉여금으로 손실을 덮자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슈미트는 당당히 손실을 공개했다. 두려움에 맞선 것이다. 주가가 폭락해 파산 위기까지 갔다. 그는 회사에 깊게 뿌리 내린 두려움의 문화를 없애고 직원들에게 열정을 불어넣어 다시 회사를 흑자로 돌려놓는데 성공했다.

2000년 12월, 래리와 세르게이는 벤처캐피털과의 약속대로 전문경영인을 찾았다. 초기에는 스티브 잡스 아니면 안 된다던 순진함을 뒤로 하고, 존 도어의 추천에 의해 에릭 슈미트를 인터뷰했다. 슈미트가 사무실을 들어서자 래리와 세르게이는 그의 이력서를 프로젝터로 크게 쏘아 놓고, 곧바로 수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슈미트는 그 자리에서 창업자들과 치열한 기술적 논쟁을 벌였다. 2001년 슈미트는 CEO로 취임해 구글의 총괄사장이 됐다. 그는 회사를 경영하는 것뿐만 아니라 래리와 세르게이가 회사를 잘 이끌어갈 수 있도록 그들에게 경영 노하우를 전수했다. 슈미트는 그들과의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만들었다. 중대한 결정에 대해서는 세 명 모두의 동의가 있어야 한다는 약속이 그것이었다. 슈미트는 창업자들의 창의적인 발상과 대기업의 조직적 운영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맡았다. 그는 창업자들의 머리에만 존재하던 아이디어들을 끄집어내어 회사 전체가 공유하고 토론할 수 있도록 했다. 취임 초엔 슈미트를 영입하라고 했던 벤처캐피털 회사들과도 마찰이 있었다. 클라이너 퍼킨스의 존 도어와 세쿼이아 캐피탈의 마이클 모리츠는 슈미트가 취임하면 사업가답게 바로 수익구조를 만들어 적극적으로 매출을 올리기를 바랬다. 하지만 슈미트는 자신의 페이스대로 회사를 키워나갔다.

이러한 비판적 분위기에서도 슈미트는 창업자들과 놀라운 관계를 형성해 가며 회사를 키워나갔다. 매출도 시기적절하게 키우기 시작했다. 광고수익을 내면서도 사용자 만족도 간의 균형을 맞추어 매출과 사용자를 모두 늘리는 대단한 성과를 이루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평가는 호평과 존경으로 바뀌었다. 그는 이전 썬마이크로시스템즈와 노벨에서의 경험을 살려 대기업화 되어가는 구글을 성공적으로 이끌어갔다. 슈미트의 경험과 노련함이 창업자들에게는 없었던 회사의 핵심적 자산이 되었다. 세쿼이아 캐피탈의 마이클 모리츠는 슈미트에 대해 “나는 에릭의 팬이 되었다. 그는 대표이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역할인 탁월한 경영진을 구성하고 이끌어왔다”고 평가했다.

중용의 묘를 살리다

2004년 8월 구글은 나스닥에 상장했다. 상장은 창업자들을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사람 20위에 들게 했다. 그 다음으로 주식이 많은 에릭 슈미트 또한 현재 자산이 약 90억 달러(약10조원)에 달한다. 슈미트의 탁월한 경영능력 때문에 가능했다. 구글이 1999년 받은 시리즈A 투자 이후 슈미트는 창업회사가 헤쳐 나가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에도 추가 투자를 전혀 받지 않고 매출로만 회사를 키워냈다.

슈미트는 경영자이자 개발자였다. 그는 과거 그가 개발했던 자바를 기반으로 ‘네트워크 컴퓨터’를 추진했다. 이것이 오늘날 구글의 클라우드 컴퓨팅으로 발전했다. 2011년, CEO직을 맡은 지 10년이 되자 슈미트는 래리 페이지에게 CEO직을 넘겼다. 그는 구글의 이사회 의장직을 맡아 한 발 물러서 구글을 이끌며 ‘구글의 어른’ 노릇을 성공적으로 마친 아름다운 전문경영인의 선례를 남겼다. 그는 이성적 관리자 못지않게 감성적 관리자였다. 그는 직원들에게 ‘인생은 모니터 속에서 이뤄질 수 없다. 하루 한 시간만이라도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끄고 사랑하는 이의 눈을 보며 대화하라’고 권하곤 한다.”

홍익희 - 배재대 교수. KOTRA 근무 32년 가운데 18년을 뉴욕·밀라노·마드리드 등 해외에서 보내며 유대인들을 눈여겨보았다. 유대인들의 경제사적 궤적을 추적한 [유대인 이야기] 등을 썼으며 최근에 [달러 이야기], [환율전쟁 이야기], [월가 이야기]를 출간했다.

1294호 (2015.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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