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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자식은 더 강하게 신하는 더 엄하게 

‘사랑은 수고를 동반하는 일’ ... 왕들의 자녀 교육에 인용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전통사회에서 지식인들의 필독서였던 사서(四書, 논어·맹자·중용·대학)는 지금도 동아시아의 소중한 고전이자 인문 교양서다. 그러나 원문이 한문인데다 본질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주로 다루다 보니 다가서기가 쉽지 않다. 이 시리즈는 사서의 내용과 구절이 구체적인 현실, 특히 정치 현장에서 어떻게 읽혔는지를 다룬다. 왕과 신하들이 국가 비전을 논의하고 참된 리더의 자격을 되새기고 올바른 삶의 원칙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사서가 어떤 방향성을 제시했는지 실록을 토대로 살펴본다. 사서가 ‘박제된 고전’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고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길 기대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북송시대의 대문장가 소동파는 이런 말을 남겼다. “사랑하기만 하고 수고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금수(禽獸)가 그의 새끼를 사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충성한다면서 깨우쳐주지 않는다면 이는 부시(婦寺, 궁녀나 환관)의 순종에 지나지 않는다. 사랑하면서 수고롭게 할 줄 아는 것인 즉 그 사랑이 깊은 것이며, 충성하면서 깨우쳐 줄줄 아는 것인 즉 그 생각하는 마음이 큰 것이다.”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편들어주고, 대신 해주고, 막아주고, 이는 의존심만 키워줄 뿐 종국엔 그 사람을 망쳐버린다. 마찬가지로 진정 그에게 충성한다면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말로 깨우쳐주고 바른 길로 이끌어야 한다. 공자가 [논어] ‘헌문(憲問)’편에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 것처럼 말이다.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愛之 能勿勞乎 忠焉 能勿誨乎)’.

맹목적 사랑은 ‘금수(禽獸)’의 새끼 사랑

이 대목은 역사 속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세조는 이렇게 천명했다. “주공(周公)이 말하길 ‘먼저 농사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고, 공자가 이르길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내가 대군청(大君廳) 북쪽에 집을 한 채 짓고 세자로 하여금 여기에 나가 있게 하여, 항상 백성들과 만나고 세상일을 알게 하려 한다.” 세자(훗날 예종)가 깊은 궁궐 안에서만 성장하여 백성의 삶을 모르니 직접 듣고 겪어볼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이었다(세조10.3.27).

세조가 [맹자]의 말을 인용해 “하늘이 장차 어떤 이에게 큰 임무를 맡기려 할 땐, 반드시 먼저 근골을 수고롭게 하고 그 마음과 뜻을 고통스럽게 하니, 이는 그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감정을 참아 내게 함으로써 하지 못했던 일들을 능히 해낼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라며 밤낮으로 세자를 가르친 것도 같은 맥락이다(세조13.1.29). 그는 직접 [훈사(訓辭)] 10장을 지어 세자에게 내리기도 했는데(세조4.10.8), 지나치게 엄격하다 할 정도로 세자를 단련시켰다.

이에 비해 그의 손자인 성종은 세자(훗날 연산군)에게 관대한 편이었다. 그 자신은 신하들이 경연(經筵) 중단을 건의할 정도로 철저한 모범생이었지만, 세자의 서연(書筵)은 자주 중지시켜 줬다. 한번은 날씨가 덥다며 서연을 대폭 축소하라고 지시하자 대간을 비롯한 신하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삼가 살피건대, 세자의 나이가 아직 약관이 되지 아니 하였으니, 학문을 익히고 인격을 도야하는 공부는 잠시라도 중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근래에 심한 더위로 인해 주강(晝講)과 석강(夕講)을 중지하도록 명하셨는데, 춘방(春坊,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과 사헌부에서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전하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물론 신 등은 전하께서 세자를 아끼시는 마음에, 혹시라도 세자가 더위를 먹어 건강을 잃게 될까 걱정하여 그렇게 하신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공자가 말하기를 ‘어려서 이룬 것은 천성(天性)과 같고, 습관은 자연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어찌 학문의 성취를 중지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은 굳이 먼 옛날을 거울삼을 필요도 없습니다. 전하께서 초년에 매일 세번씩 경연에 나아가시어 아무리 추운 겨울과 더운 여름이라 하더라도 중지하신 적이 없으니, 성상(聖上)의 학문이 고명하심은 그만한 까닭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세자를 사랑하심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심보다 더 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하심이 고식적인 것이지 덕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니, 신 등은 적이 의아스럽습니다. 공자께서 말하기를 ‘참으로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생각한다면 올바른 길을 일러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하셨습니다. 삼가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서연을 다시 처음과 같이 하도록 명하소서.” 세자를 정말로 사랑한다면, 세자가 장차 훌륭한 왕이 되길 바란다면 엄격하게 훈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종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세자는 본래 기질이 허약한데다 지금 또 더위를 앓고 있으므로 내가 중지하도록 명한 것이다. 여름철에는 종친들도 방학을 하지 않는가?” 신하들이 “세자의 공부는 종친과 다르므로, 비록 더운 여름이라 해도 중단할 수 없습니다”라며 반대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성종 23.6.23).

요컨대 세조는 자신이 먼저 나서서 ‘내가 세자를 사랑하니 수고롭게 만들겠다’고 실천한데 비해 성종은 그러질 못해 ‘세자를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받은 것이다. 비록 요절하긴 했지만 예종은 임금으로서 명철한 자질을 보였고, 연산군은 폭군의 대명사로 남게 된 이유 중 하나를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진 않을까?

두 번째 구절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도 그 의미는 같다. ‘충(忠)’이라는 글자로 인해 주로 임금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데, 예컨대 영조 때 서종섭은 이 대목을 이렇게 부연했다. “충성한다면 깨우쳐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은 그 깨우쳐 주는 것이 바로 충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도리를 가지고 말하자면, 오로지 명령을 받들어 지키며 아첨하는 것을 주로 하면서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고 보필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이를 어찌 충성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체로 충성에는 그릇된 것과 바른 것이 있으니, 보필하며 잘못을 바로잡아 고치는 것이 바른 것이고, 명령을 받들어 지키며 아첨하는 것이 그릇된 것입니다.”(승정원일기 영조1.1.24).

그러나 이것을 ‘충성’이라고만 표현하면 그 의미를 축소시킬 우려가 있다. ‘충’은 비단 임금에 대한 충성뿐 아니라, 대상이 누구든 그에 대한 공정하고 진심 어린 마음을 뜻한다. 따라서 공자의 이 말도 ‘(누군가에게) 충성한다면’보다는 ‘(누군가를) 진정으로 생각한다면’으로 해석하는 것이 낫다. 그렇게 되어야 ‘사랑한다면 수고롭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와 ‘진정으로 생각한다면 깨우쳐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도 하나로 연결될 수 있다.

연산군에 지나치게 관대했던 성종

흔히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더 강하게 키우고, 아끼는 부하일수록 더 엄하게 대해야 한다고들 말한다. 벼랑 끝으로 자기 자식을 내몬다는 맹수처럼은 아니더라도, 필요한 자질을 갖추며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위해 악역을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다. 물론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사랑하는 감정이 객관적인 판단을 가로막기도 하고, 그 사람을 엄하게 대하다 혹시라도 서먹해질까 지레 물러서기도 한다. 이럴 땐, 내가 대상으로부터 바라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그 사람의 미래와 가능성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길 원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수고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깨우쳐주어야 한다. 공자의 말처럼 말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01호 (201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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