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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실록으로 읽는 사서’] 허물 되풀이 말고 노여움 옮기지 말라 

공자가 말한 호학(好學)의 조건 … 현종은 화풀이로 비판 받아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동양의 전통사회에서 위대한 성인(聖人)으로 추앙 받아온 공자는 생전에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 문도의 수가 3000명에 이르고 이 중 유명한 사람이 72명, 특히 탁월했던 제자만 12명이다. ‘공문칠십이현(孔門七十二賢)’,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다.

그렇다면 이 수많은 제자들 중에서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는 누구였을까? 자로, 자공, 자하, 염유, 중궁, 유약 등 여러 제자가 공자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지만 단연 돋보이는 것은 안회(顔回, 안연)다. 안회는 공자의 가르침을 가장 잘 체현했다고 하여 ‘복성(復聖)’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또 문묘 대성전, 즉 공자 바로 옆 자리에 배향 되었는데 [논어]에는 그에 대한 공자의 칭찬으로 가득하다. 공자는 ‘한 그릇의 밥과 한 바가지의 물만 가지고 가난한 마을에 살게 되면 사람들은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법인데, 회는 자신의 즐거움을 바꾸지 않으니 참으로 어질구나, 회여!’(논어, 옹야편), ‘일러주면 게을리 하지 않고 실천하는 사람은 안회뿐이다’(논어, 자한편)라며 그를 높이 평가했다. 안회가 젊은 나이에 죽자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라며 비탄에 빠지기도 한다(논어, 선진편).

공자의 최고 제자는 ‘안회’

공자는 이후에도 자신의 곁을 일찍 떠나가 버린 안회에게 짙은 아쉬움을 표했다. 한번은 노나라의 임금 애공이 “제자들 중에서 누가 가장 학문을 좋아합니까?”라고 묻자 공자는 이렇게 답했다. “안회라는 제자가 있어 학문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았고, 같은 허물을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는데, 불행히도 명이 짧아서 이미 죽었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그런 사람이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有顔回者好學 不遷怒不貳過 不幸短命死矣 今也則亡 未聞好學者也).”(논어, 옹야편). 안회가 죽은 후에는 그만큼 진정으로 학문을 좋아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학문을 좋아한 안회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대표적인 특징으로 거론하는 ‘불천노(不遷怒)’와 ‘불이과(不貳過)’다.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지 않고, 같은 허물을 두 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다’의 두 가지를 ‘호학(好學)’의 결과, 혹은 조건으로 꼽고 있는 것이다.

얼핏 평범해 보이지만 이 둘은 사실 매우 힘든 경지다. 우리는 누구나 한 번 저지른 잘못을 다시 반복해선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같은 실수를 거듭하면 안 된다는 데 동의한다. 잘못이나 실수는 제대로 반성하지 않았고 그것을 통해 배운 바가 없으며, 방심했을 때 되풀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여움도 그렇다. 밖에서 화가 난 일이 있었다고 해서 그 기분을 집으로까지 들고 와서는 안 된다. 기분이 나쁘다고 괜한 사람에게 화풀이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이는 우리 모두가 분명히 알고 있는 것들이다.

문제는 그것이 머리에만 머문다는 점이다. 일상생활에서는 “아, 내가 또 왜 이랬지?” “저번에 그래 놓고 또 그랬네”라는 말이 익숙하다.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에게 옮기는 일’은 더욱 잦다. 회사에서 화가 난 채 들어 와 집에서도 화를 내고, 평소 같으면 별 것 아니게 지나갔을 일도 내가 기분이 나쁘다고 짜증을 내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께 성적표를 보여드릴 때, 상사에게 업무 보고를 할 때, 먼저 ‘기분이 어떠시나?’하고 살피는 것도 그래서다. 기분이 좋으면 안 좋은 일도 상대적으로 부드럽게 넘어가지만, 기분이 안 좋으면 사소한 일도 큰 꾸지람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불천노’와 관해 일찍이 송시열은 현종의 문제점을 지적한 적이 있다. 그는 “공자께서 안자(顔子,안회)가 학문을 좋아함을 논하면서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같은 허물을 두 번 다시 되풀이 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현종은 이와 반대로 자신의 노여움을 다른 사람들에게 옮기고 있다”고 비판했다. 현종이 자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은 이조의 관리들에게 화를 내다가 승지들에게 화풀이를 했으며, 나아가 대신들에게까지 괜한 트집을 잡은 것에 대해서였다. 이어 송시열은 “맹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한 번 노하였고 무왕(武王)이 한 번 노하였다’고 했으니, 성인(聖人)이라 하여 어찌 노여운 마음이 없겠습니까. 화가 날만한 일을 당하면 화를 내되, 다만 그 노여운 마음을 옮기지 않는 것이니, 밝은 거울과 고요하고 맑은 물이 사물의 형체를 비추어주지만, 비추어진 사물의 아름다움과 추함은 그 사물에 따른 것일 뿐, 거울이나 물과는 상관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사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해 마음의 함양이 순일하지 못하게 되면, 노여움은 천둥같이 일어나고 산처럼 치솟아서, 그런 줄을 알아도 또한 스스로 그만 둘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현종개수실록1.7.25). 그는 노여움 자체가 없을 수는 없지만 학문과 수양을 통해 그것을 직시하고 객관화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지 않고서 방치하게 되면 노여움은 다른 곳으로 번지게 되고 이내 통제 불능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불이과’에 대해서는 인조 때 오윤겸의 해설을 보자. 오윤겸은 인조에게 이렇게 진언했다. “옛말에 ‘잘못했다가도 제대로 고치기만 한다면 이보다 더 큰 선(善)은 없다’고 하였고, 공자께서는 안자가 같은 허물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을 평가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런 마음을 잊지 마시고 안자가 학문을 좋아하듯 하시면 반드시 허물을 반복하지 않는 경지에 이르시게 될 것입니다.”(인조2.9.9). 허물은 무조건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안회가 같은 허물을 다시 되풀이하지 않았다는 말은, 안회도 한번은 실수하고 한번쯤은 잘못한 적이 있다는 말이다. 다만, 학문을 통해 그것을 반성하고 그것에서 교훈을 얻음으로써 다시는 똑같은 허물을 되풀이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교에서는 ‘허물을 고치고 다시는 반복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된 훌륭함이라고 평가한다. 개선과 성찰의 노력을 중시하는 것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시행착오에서 배워야

요컨대 ‘불천노 불이과’라는 안회의 경지는 학문의 목적이 거창한 그 무엇이 아니라, 생활 속의 올바름을 구현하는 데 있음을 보여준다. 자신의 중심을 지켜 감정에 휩쓸리지 않으며, 다른 사람과 관계맺음을 잘하고, 시행착오에서 얻은 배움을 통해 끊임없이 자신을 나아지게 만드는 것이다. 내 기분에 따라 상대방을 대하고, 같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고, 비록 사소하다 싶은 일에서일지라도 이런 일이 자꾸 쌓이다 보면 결국 내 감정으로 인해 큰일을 그르치고, 내 부주의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르게 된다. ‘불천노 불이과’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09호 (201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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