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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패권의 흑역사] 이란 발호할까 사우디·이집트·터키 ‘경계령’ 

종교·지역패권·석유정책 등 놓고 갈등 가능성 … 오스만 제국 해체 후 혼란 가중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뚜렷한 지역 패권국가가 없는 중동은 20세기 이후 분쟁과 갈등의 끊임없는 악순환에 시달리고 있다. 주민들은 이를 서구 탓으로 돌리며 증오의 화살을 날린다. 끊임없이 서로를 견제하기도 한다. 사우디·이집트·터키는 경제력을 회복할 이란을 경계한다. 이란이 37년 만에 정상국가로 돌아온 중동의 미래를 예측하기 쉽지 않은 이유다.

▎이란은 중동에서 미국에 맞서는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러시아와 더불어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이 버티는 원동력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왼쪽)과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 / 사진:중앙포토
지난 1월 16일 유엔 제재가 풀린 이란이 정상국가로 국제사회에 복귀하게 되자 중동 지역의 세력 판도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다량의 석유 수출이 가능해지면서 경제력을 회복할 계기를 마련한 이란이 지역 패권국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은 2012년 핵개발 이후 가해진 경제제재는 물론 1979년 이슬람 혁명과 미국과의 단교 등으로 인한 다양한 불이익을 한꺼번에 해결하게 됐다. 특히 1000억 달러(약 121조 5000억원) 규모의 해외 동결자산을 회복하면서 거대한 돈주머니를 차게 됐다. 이 자산은 우선적으로 이란의 국제적인 신용을 높이고 경제발전과 주민생활 향상에 쓰일 것이다. 하지만 군비 증강에 이용될 가능성도 당연히 있다. 이럴 경우 인구 7800만 명의 대국 이란의 위상은 중동 지역에서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다.

이슬람 시아파의 종주국인 이란은 그동안 중동에서 ‘친이란 시아파 벨트’를 형성하고 유지해왔다. 우선 시아파의 지파인 알라위트파를 믿는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 정부의 가장 강력한 지원자가 이란이다. 이란의 지원은 중동에서 미국에 맞서는 세력균형을 추구하는 러시아의 지원과 함께 알아사드 정권이 버티는 원동력이다. 알아사드 정권은 미국과 사우디가 지원하는 수니파 반군에 맞서 5년 가까이 버티고 있다.

족쇄 푼 시아파의 종주국 이란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와 종파가 난립한 레바논에서 이란은 시아파 무장단체인 헤즈볼라를 적극 지원하고 있다. 헤즈볼라 무장 민병대원은 레바논에서는 물론 중동의 여러 군대에 파견돼 시아파 벨트의 무력 축으로 작용해왔다.

이란과 국경을 맞댄 인구 3200만 명의 이라크도 시아파가 인구의 다수를 차지한다. 이라크의 국가원수는 소수민족인 수니파 쿠르드족인 푸아드 마아숨 대통령이지만 정부를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세력은 인구 면에서 다수인 시아파 아랍인이다. 다만, 미국의 영향력 등으로 인해 이라크 시아파 정부는 이란과 노골적으로 손을 잡지 못하고 세력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사우디는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고 있을 정도로 이라크 시아파의 세력 확대를 경계하고 있다.

이란은 이슬람 종파와 무관하게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반 서방 강경파인 하마스도 지원해왔다. 하마스가 실질적으로 행정권을 쥐고 있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가자지구는 이란의 세력권이나 다름없다. 이란은 바레인의 시아파 반정부 세력과 예멘의 시아파 무장단체 후티도 음으로 양으로 지원해왔다. 바레인과 예멘은 사우디를 둘러싼 나라이기 때문에 이란의 개입은 사우디의 반발을 초래하고 있다. 특히 바레인은 군주가 수니파로 사우디의 지원을 받고 있다.

사우디에게 이란은 눈엣가시


▎북부 모술의 쿠르드족은 아랍인의 통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영국은 전략물자인 석유가 있다는 이유로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게 했다. 이라크 탄생 후에도 폭군의 악순환은 이어졌다. 사진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 / 사진:중앙포토
이란은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인 사우디와 이슬람 세계의 종교적 권위는 물론 지역패권과 석유정책을 둘러싸고 사사건건 경쟁하고 대립해왔다. 따라서 사우디는 이란의 부상을 어느 나라보다 방해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를 위해 사우디는 석유 증산의 고삐를 놓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저유가를 계속 유지함으로써 앞으로 이란이 석유 수출을 늘려도 돌아가는 경제적 이익은 최소화하도록 이끌 것으로 보인다. 유가 조절을 통해 이란을 경제적으로 견제하려는 의도다. 이란이 회복된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과 외교력을 더욱 강화하는 것은 사우디엔 악몽이다.

뿐만 아니고 이란이 부상하면 중동의 전통적인 강국인 이집트도 나설 것으로 전망된다. 2013년 7월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은 지금까지 내정 안정에 치중해왔지만 이란이 움직이면 이집트의 국제적인 위상을 높이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나설 수밖에 없다. 인구 8200만 명의 대국인 이집트는 중동의 전통적인 군사외교 강국이었다. 그런 이집트를 빼고 중동 패권을 말할 수 없다. 이집트는 아랍민족주의를 앞세워 1958~61년 시리아와 통일 아랍공화국을 구성하기도 했다. 시리아의 군사쿠데타로 통일 아랍공화국은 사실상 사라졌지만 내정이 안정되고 국력이 회복되면 언제라도 아랍통일의 기치를 내걸고 중동 지역 외교에서 적극적이고 강력한 행위자로 나설 수 있다.

7500만 인구의 대국 터키의 반응도 무시할 수 없다. 국경을 맞댄 이란과 터키는 오랫동안 서로 간섭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왔다. 하지만 권위주의 통치자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완 대통령이 자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안보논리를 내세워 중동 지역에 대한 개입을 시작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터키는 오스만 제국이 무너지고 1923년 케말 아타튀르크의 주도로 민주주의와 세속주의를 받아들여 공화국을 건국한 이래 전통적으로 중동 문제에 대한 개입은 자제해왔다.

하지만 국경을 맞댄 시리아의 내란과 난민 사태 등으로 중동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터키는 중동 개입보다 튀르크 민족주의에 따른 중앙아시아 진출이 더욱 주목되는 국가다. 터키가 나서서 카프카스의 아제르바이잔과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투르크계 언어를 쓰는 민족을 묶는 범튀르크 벨트를 만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는 역사적으로 이란계 제국과 튀르크계 제국이 경쟁했던 땅이기도 하다. 종합하면 중동과 중앙아시아에선 사우디의 수니파 패권주의와 이란의 시아파 패권주의, 그리고 이집트를 중심으로 하는 아랍민족주의와 터키를 중심으로 하는 튀르크 민족주의가 각축을 벌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중동이 체질적으로 불안정한 이유를 알려면 이 지역의 역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동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야 비로소 독립국가가 생기기 시작했을 정도로 오랫동안 다양한 외세의 지배를 받았다. 미국 역사저술가 데이비드 프롬킨의 <현대 중동의 탄생(A Peace To End All Peace)>에 따르면 현대 중동국가는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의 필요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국가다. 이에 따라 개별 국가의 내부 통합은 물론 나라들끼리의 지역 세력균형 유지와 안정 추구도 매끈하지 못하다.

1차대전이 끝나기 전까지는 오스만 제국이 500년 가까이 중동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은 1차대전 이후 이 지역의 패권 외세였던 영국에 의해 해체됐다. 영국은 왜 그런 결정을 했을까? ‘민족자결주의’라는 고상한 이상을 위해서는 결코 아니었다. 프롬킨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의 해체와 현대 중동국가 구도의 탄생은 중동 주민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영국의 세계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영국의 글로벌 패권에 위협이 되는 요인을 제거해 중동 지역과 인도에서 영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다시 사정을 살펴보자. 오스만 제국의 말기는 1908년 벌어진 청년튀르크당의 혁명으로 혼란스러웠다. 군인 출신으로 혁명으로 오스만의 권력자가 된 엔베르 파샤가 터키민족주의를 추구했다. 그는 이른바 범튀르크주의·범우랄알타이주의·범투란주의에 앞장섰다. 오스만의 세력을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터키어 사용지역으로 확대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영국의 세계 전략 따라 오스만 제국 해체

군주인 술탄을 허수아비로 만들어놓고 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을 움켜쥔 그는 자신의 구상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려고 했다. 실제로 엔베르는 1차 대전 말기인 1918년 이슬람군을 결성해 1차 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세력 공백상태가 된 카프카스의 바쿠(현재 아제르바이잔의 수도로 석유산업의 중심지)로 진군했다. 이 지역은 튀르크계 언어를 쓰는 아제르바이잔인이 거주하는 지역이다. 오스만의 카프카스 진출에 영국은 경악했다. 만일 영국이 유럽에서의 전쟁(1차 대전)에 발목이 잡힌 상태에서 오스만 세력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한다면 당시 영국 식민지인 인도도 위험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은 엔베르 파샤의 튀르크 민족주의를 중동과 중앙아시아, 인도에서의 영국 패권을 위협하고 글로벌 세력균형을 깰 수 있는 중요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아제르바이잔은 중동보다 먼저 석유가 발견된 유전지대였다는 사실이다. 1차 대전은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이 본격적으로 부각된 계기였다. 영국은 당시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의 제안으로 해군 함선의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꾼 직후였다. 영국 입장에서 석유는 대영제국 유지의 핵심인 해군의 젖줄이었다. 따라서 전략자원인 석유 확보경쟁에 도전한 엔베르 파샤의 오스만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대전이 끝난 뒤 패전국이 된 튀르크를 손보기로 한 결정적인 이유였다.

문제는 튀르크를 해체하고 새 나라들을 세우는 게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선, 중동 지역의 대부분은 역사적으로 외세의 지배를 받아만 봤을 뿐 자기들의 나라를 운영해본 경험이 없었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사례가 이집트다. 인류 4대 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역사와 전통, 문화를 자랑하는 이집트는 2000년 넘게 자국 출신 지도자를 갖지 못했다. 이집트에선 기원전 31세기부터 기원전 525년까지 2500년 동안 26개의 고대 파라오 왕조가 명멸했지만 외세에게 정복됐다. 페르시아가 약 200년(기원전 525~기원전 332) 간 지배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밀려났다. 그 뒤로 알렉산드로스의 부하가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332~기원전 30)가 약 300년을 지배했다. 그리스 문화와 이집트 문화를 뒤섞은 그리스인의 왕조였다.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가 이 왕조의 마지막 파라오다. 그 다음에는 로마의 식민 지배(기원전 30~기원 393)를 360년 이상 받았다. 392년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고 이교도 사원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면서 고대 이집트 문화의 명맥마저 끊겼다. 그 뒤 이집트는 비잔틴 제국(395~646)의 지배를 받다가 이슬람 세력이 떠오르면서 아랍에 정복(639~1250) 당했다. 그러면서 상당수가 기독교도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것은 물론 고유의 언어도 버리고 아랍어를 쓰게 됐다.

이후 이슬람 군인집단인 맘루크의 지배(1250~1517)와 오스만 제국(1517~1805)의 통치를 잇따라 받았다. 그러다 19세기에 들어서 오스만 제국의 이집트 총독 무하마드 알리가 왕조(1805~1882)를 세웠다. 폭군으로 유명한 그는 발칸반도 출신의 알바니아계다. 1882년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영국과 프랑스가 점령했다. 1914년 영국의 보호령이 됐지만, 1922년 입헌군주국이 돼 무하마드 알리의 후손이 통치했다. 하지만 1936년 영국-이집트 조약에 따라 영국군이 주둔했으며 이들은 1952년 군사 쿠데타로 이집트 왕정이 전복되고 나서도 계속 주둔하다가 1956년에야 철수했다. 1952년 군부쿠데타로 집권한 나세르는 거의 2500년 만에 등장한 이집트인 통치자였다. 그러나 나세르도, 그의 뒤를 이은 사다트도 모두 평생 권력을 놓지 않았다. 사다트의 후계자인 무바라크도 30년을 군림하다 민중 혁명으로 물러나는 운명을 겪었다. 이집트의 역사는 중동에서 외세가 아닌 지배자가 자리 잡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렇다고 외세에 고분고분한 것도 아니다. 현재 중동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대한 반감이 팽배하다. 국가 지도자와 지배계층은 국익을 위해 서구와 협력해야 한다고 믿지만 일부 주민 사이에선 배척 분위기가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더구나 상당수 중동 지역은 부족 단위의 유목사회다. 지역은 외세의 지배 단위나 행정 단위로 묶였을 뿐, 주민이 바탕이 된 하나의 정치단위로 통합된 적이 드물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민족자결주의를 적용하려고 해도 그 민족이란 게 중동에선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특히 오래 전부터 아랍어로 ‘이라크’라고 불린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내부 민족·종교·종파 구성이 특히 복잡했다. 크게 나눠도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로 이뤄진 아랍인, 그리고 이슬람 수니파지만 아랍인과 민족이 다른 쿠르드인의 3개 분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아랍인이라고 해도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는 같은 나라를 만든다는 생각에 반대였다. 이슬람 시아파와 수니파는 하늘 아래 함께 살기가 불편할 정도로 종교적으로, 역사적으로 반목해왔기 때문이다. 같은 이슬람 수니파라고 해도 아랍인과 쿠르드인은 함께 하나의 나라를 만들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오스만제국 시절에는 동북부의 쿠르디스탄, 서부의 알자지라, 동남부의 이라크라는 세 지역으로 나뉘어 통치됐다. 그런데다 이 지역에는 아시리아 기독교, 유대교, 야지디교 등 다양한 종교적인 소수파가 존재한다. 하지만 영국은 이런 사실에 개의하지 않고 1922년 이 복잡한 지역을 ‘이라크’라는 이름의 한 나라로 통합했다. 이슬람 수니파와 시아파는 통합 이후에도 끝없이 반목했지만 외세는 물론 중앙정부도 이를 무시했다. 이들의 반목은 이라크전 이후 사람 후세인을 축출하고 새로 생긴 이라크의 정쟁과 사회불안의 요인이 됐다. 다수 시아파가 중앙정부를 장악하면서 후세인을 추종했던 수니파는 군대와 정부에서 축출돼 소외됐으며 탄압을 받았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극단주의와 손을 잡았다. 중동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이슬람국가(IS)는 이라크 출신의 아부 바크르 알바그다디가 주도하고 있으며, 군사와 행정을 주도하는 두뇌는 바로 이 소외된 후세인 추종 수니파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북부 모술의 쿠르드족은 아랍인의 통치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지만 영국은 전략물자인 석유가 있다는 이유로 바그다드 중앙정부의 지배를 받게 했다. 이라크 주민의 75%는 정부에 복종해본 적이 없는 반독립적인 부족민이었다. 지역 출신 지배자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던 주민들은 ‘폭군이 하나 제거되면 또 다른 폭군이 들어서는 악순환이 되풀이될 것’이라는 이유로 아랍인 지배자를 두는 데 반대했다.

쿠르드족, 아랍인 지배자 반대했지만…

영국은 서로 반목하는 이들을 하나의 나라로 묶어 이 지역 출신도 아닌 아랍인 파이살에게 넘겨줬다. 아라비아 반도 메카 출신으로 1차대전 중 오스만을 상대로 봉기를 일으켜 영국을 도운 아랍 명문가 하심 가문 출신이다. 이 왕조도 1958년 쿠데타로 군사정권에 권력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그 군사정권의 마지막 ‘폭군’이 사담 후세인이었다. 이라크의 모순은 사담 후세인이 집권한 1979년이 아니라 이라크라는 나라가 탄생했던 1922년부터 잉태되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폭군의 악순환’이라는 당시 부족민의 우려는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1320호 (201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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