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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진주’ 석유의 흑역사] 아랍 vs 서방, 아랍 vs 아랍 대결의 파열음 

1, 2차 석유파동 때는 고유가로 세계 경제 휘청 … 2016년엔 저유가 탓에 비상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유가 하락이 세계 경제에 축복으로 통한 적도 있었지만 현 상황에선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과거 유가 하락은 원유 수입 부담을 낮추고 가계의 실질소득을 높였지만 세계 경기가 나쁜 지금은 경제적 악영향이 커 더 이상 호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1, 2차 석유 파동 때는 살인적인 고유가 탓에 세계 경제가 휘청거렸다. 아랍 vs 서방, 아랍 vs 아랍의 대결이 빚은 파열음이었다. 석유를 ‘검은 진주’라고 불러서일까. 이래저래 흑역사만 뚜렷하다.

▎사진:중앙포토
2016년 들어 국제 유가가 요동치고 있다. 반등도 있지만 전반적인 기조는 저유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1월15일 두바이유에 이어 미국 서부텍사스산원유(WTI)와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이 잇따라 20달러 대로 주저앉았다. 유가가 배럴당 30달러 아래로 떨어진 것은 12년 만이다. 지난 20일에는 뉴욕상업거래소에서 WTI의 가격이 배럴당 26.55달러로 떨어지면서 2003년 5월 이후 1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장중 한때 26.19달러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날 런던 ICE 선물거래소의 북해산 브랜트유도 배럴당 27.88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한국이 주로 들여오는 두바이유는 석 달 새 45달러 선에서 26달러 선으로 떨어졌다. 국제 유가가 올해 중 배럴당 16달러나 10달러로 추락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그러던 국제 유가는 21일 반등을 시작해 22일에는 30달러 선을 회복했다. 21일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총재가 정례 통화정책회의 뒤 “저유가와 중국 경제 둔화로 유럽 경제가 타격을 입으면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추가 부양책을 예고한 것이 시장에 작용한 것으로 분석된다. 28일(현지시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이 감산에 합의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미국 WTI 3월 인도분과 북해산 브렌트유 3월 인도분이 사흘째 상승하면서 배럴당 33달러 대로 치솟았다. 세계 최대 산유국 사우디가 각 산유국에 원유 생산량을 최대 5% 감산하자고 제안했다고 타스 통신 등이 이날 보도하면서다. 러시아의 알렉산데르 노바크 에너지 장관은 이날 사우디가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비회원국의 석유 관계 장관 차원의 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직 국제유가가 본격 반등한 건 아니다.

OPEC의 유가 카르텔 흔든 이란: 국제 유가가 저유가 행진에 들어간 것은 기본적으로 공급 과잉 우려 때문이다. 미국이 40년 만에 원유 수출에 나서고 경제 제재가 풀린 이란이 석유 증산에 나설 것으로 전망되면서 국제유가의 하락에 속도가 붙고 있는 것이다. 세계 4위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이란은 제재 해제 전까지 하루 원유 생산량 280만 배럴, 수출량은 100만 배럴 수준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핵협상 타결로 경제 제재가 풀린 직후인 1월18일 원유 생산량을 하루 50만 배럴 늘리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BBC 보도에 따르면 앞으로 하루 원유 생산량을 현재보다 70%까지 늘어난 480만 배럴로 증산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수출 물량도 지금의 두 배인 하루 200만 배럴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란은 2012년 서방의 제재를 받기 전 일일 250만 배럴의 원유를 수출했다. 이란 변수는OPEC 중심의 유가 카르텔을 뒤흔들 것으로 예상된다. OPEC회원국과 OPEC 밖의 석유 카르텔이 통제하던 석유시장이 새로운 국면에 접어드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제재가 해제된 이란은 석유 생산을 늘려 생활 수준을 높여 국민의 불만을 누르려고 한다. 이에 따라 당분간 수급 조절이 정상적으로 이뤄질 가능성이 작다.

저유가, 디플레이션 유발: 유가 하락이 세계 경제에 축복으로 통한 적도 있었지만 현 상황에선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 과거 유가 하락은 원유 수입 부담을 낮추고 가계의 실질소득을 높였지만 세계 경기가 나쁜 지금은 경제적 악영향이 커 더 이상 호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유가로 벌어들이는 오일 달러가 줄어든 산유국의 내수가 위축되고 건설 발주가 줄어드는 부작용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무엇보다 저유가로 한국의 최대 건설플랜트 시장인 사우디 상황이 악화하고 있다. 유가 하락으로 인한 가장 큰 문제는 디플레이션이다. 이미 유럽과 일본은 저물가와 경기 하락이라는 디플레이션 증세에 시달리고 있다. 국제 유가가 떨어지면 생산과 운송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줄어줄 수밖에 없다. 그러면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 가격이 내리게 마련이다. 물가 하락이 이어지면 소비자는 지출을 줄이고 기업 생산도 감소하면서 경기 침체에 빠질 위험이 커진다.

핵협상 타결로 국제 제재에서 벗어난 이란이 원유를 증산하면 유가는 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사우디는 종교적·지정학적인 숙적인 이란의 경제 재건을 막으려고 증산을 하거나 감산에 반대해 유가를 떨어뜨리려 시도할 가능성이 작지 않다. 사우디는 이란의 핵협상이 타결 국면을 맞자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 해제를 막으려고 이슬람권의 원수로 통하는 이스라엘과 손을 잡기도 했다. 사우디는 750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바탕으로 저유가 사태를 당분간 버틸 수 있다. 하지만, 한때 국가 원수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에게 ‘에너지 차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의 에너지 강국 러시아는 현재 심각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다. 산유국 중 가장 약한 고리인 베네수엘라는 심각한 경제난으로 좌파 정권이 무너진 데 이어 국가 비상사태까지 선포했다. 나라 곳간이 비어가는 산유국들이 국제시장에 투자했던 자산 회수에 나서면서 세계 금융시장의 불안도 증폭되고 있다.

현재의 상황과는 달리 과거 국제 유가의 흑역사는 폭등에 따른 세계 경제 충격이 주를 이뤘다. 흔히 ‘석유 파동(Oil Crisis)’이라는 용어로 불리는 사태다. 1973년의 제1차 석유파동으로 전 세계 경제는 휘청거렸다. 세계 경제, 특히 서구의 자본주의 경제가 처음으로 유가 폭등 때문에 흔들렸다. 중동 산유국이 유가 인상과 감산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당시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중 아랍국가와 비회원국인 아랍국가, 이집트와 시리아로 구성된 아랍 석유수출국기구(OAPEC)가 집단행동에 나섰다. 그해 3월 국제유가는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로 껑충 뛰었다. 석유 파동을 넘어 석유 쇼크라고 할 만한 사건이었다. 유가 폭등은 글로벌 경제와 정치 모두에 중단기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월 28일(현지시간)에는 사우디와 러시아 등 주요 산유국이 감산에 합의할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국제 유가가 반등했다. 사진은 사우디의 알리 알나이미 석유장관. / 사진:뉴시스
4차 중동전쟁과 아랍-서방 대결로 비롯된 1차 석유파동: 시작은 정치적이었다. 그해 벌어진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에 벌어진 욤 키푸르 전쟁이 계기였다. 1973년 10월6일부터 25일까지 20일 동안 짧게 진행됐던 제4차 중동전쟁이다. 이집트와 시리아는 1967년 치욕스러웠던 6일 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고 당시 잃었던 시나이반도(이집트)와 골란고원(시리아)을 무력으로 되찾고자 오랜 준비 끝에 기습 공격으로 전쟁을 시작했다. 유대교에서 속죄일이라는 의미의 종교 휴일인 욤 키푸르에 발발해 욤 키푸르 전쟁이라고 불린다. 중동 전쟁은 흔히 이스라엘이 이집트나 시리아를 상대로 압도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전쟁 때는 초반에 상당히 밀렸다.

우선, 이스라엘로선 긴장을 풀고 있던 휴일에 완전히 허를 찔린 전쟁이었다. 거기에다 최신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로 무장했던 이집트와 시리아는 초기에 이스라엘 공군을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개전 첫날 긴급 출동한 이스라엘 전투기들은 아랍이 들여온 소련제 지대공 미사일에 줄줄이 격추됐다. 당시 이스라엘은 440대의 공군기 중 최소 102대, 최대 387대가 격추되거나 손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6일 전쟁의 영웅인 모세 다얀 장군이 당시 국방부 장관이었는데 책임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스라엘은 미국의 지원과 군인들의 필사적인 투혼으로 간신히 역습에 성공해 전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아리엘 샤론 전 총리가 당시 수에즈 반도 쪽의 143기갑사단 사단장이었는데 위험을 무릅쓰고 수에즈 운하를 건너 이집트 수도인 카이로 코앞까지 진군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미국과 소련이 나서 중재를 하는 바람에 전쟁은 20일 만에 끝났다. 그러자 이집트와 시리아는 OPEC 회원국 중 아랍국가를 설득해 이스라엘을 군사적으로 지원한 미국과 서방 국가에 대한 석유수출 중단 결정을 이끌어냈다. 당시 미국은 물론 캐나다, 일본, 네덜란드, 영국이 주요 대상이 됐다.

아랍의 6개 산유국이 가격 인상과 감산에 들어가면서 전쟁 전 두바이유 기준으로 배럴당 2.9달러였던 국제 유가는 즉시 4달러를 넘어섰다. 2~3달이 지난 1974년 1월엔 11.6달러로 폭등했다. 불과 몇 달 새 무려 4배로 치솟은 것이다. 석유를 중동에 의존했던 서방 선진국들은 중동 산유국의 한방에 녹초가 됐다. 1974 주요 선진국들은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에 이르렀고 물가는 두 자릿수로 수직상승했다. 경제성장률은 떨어지고 물가는 오르는 전형적인 스태그플레이션이었다.

한국도 극심한 타격을 입었다. 1973년 3.5%였던 물가상승률은 1974년 24.8%이라는 살인적인 수치로 올랐다. 12.3%를 자랑하던 경제성장률은 한 해 사이 7.4%로 떨어졌다. 외화가 넉넉하지 않은 상황에서 무역수지 적자가 10억 달러에서 24억 달러로 늘었다. 석유파동 시작 한 달 만에 원화 가치가 21.9% 떨어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에너지 수요가 급속히 증가하던 중이었기에 유가 상승은 더욱 큰 상처를 한국 경제에 남겼다. 석유파동의 영향은 한 해에 그치지 않았다. 1975년 물가는 여전히 24.7% 올랐고 성장률은 6.5%로 더욱 떨어졌다. 한국 경제가 정상을 찾은 것은 1976년이 되어서였다.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촉발한 2차 석유파동: 2차 석유파동은 이란에서 시작됐다. 1978년 12월 이란으로 귀국한 이슬람 시아파 반체제 사제 아아툴라 호메이니가 주도한 이슬람혁명이 계기였다. 이슬람혁명은 입헌군주국가였던 이란을 이슬람공화국으로 바꿔놓았다. 이슬람 공화국이 된 이란에선 국가원수가 대통령이 아니라 최고지도자라고 불리는 종교지도자다. 최고지도자는 이란의 국가원수이자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최고의 정치, 종교 권위자다. 1979년 이란 혁명 직후 만든 이란 이슬람공화국의 헌법은 최고지도자 직을 설치하고 국가원수와 최고 종교지도자, 군 최고통수권자, 그리고 사법부, 입법부, 행정부의 상징적인 수장을 겸하게 했다. 막강한 권력에다 임기도 없는 종신직이다. 사실상 신정 국가인 이란에선 국민이 뽑은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장일 뿐 종교지도인 최고지도자가 나라를 움직이는 것이다. 최고지도자는 선거로 당선한 대통령을 최종 임명하며 의회의 3분의 2 찬성을 얻으면 대통령을 해임할 수 있는 권한도 있다. 사법부와 군부 인사권도 쥐고 있다. 임기 8년의 대법원장, 임기 8년의 이란 국영 방송 사장, 육해공 수장을 임명하거나 해임한다. 보통직접선거로 뽑힌 임기 8년의 의원 86명으로 구성된 합의체인 이란 전문가회의(지도자 선출전문가회의라고도 함)가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고 그 활동을 감독한다.

이것 말고도 이란에는 신정국가 냄새가 물씬 나는 정부조직이 많다. 국민이 뽑은 의회(마슈레스) 말고도 이슬람 법학자 6명과 일반 법학자 6명 등 모두 12명으로 이뤄진 감독자평의회가 있어 상원 역할을 한다. 이슬람 법학자 6명은 최고지도자가 지명하며 일반법학자는 대법원장이 지명한 사람 중에서 의회에서 최종 선출한다. 전문가회의는 최고 지도자 다음 가는 최고 권위의 조직이다. 헌법을 해석하고 전문가회의 선거, 대통령 선거, 의회 선거를 감독하면서 입후보자의 자격을 심사하고 인증한다. 이슬람 자문회의, 즉 국회가 가결한 법안이 이슬람법인 샤리아에 부합하는지도 심사해 합법성을 보증하거나 의회 통과 법안을 거부할 수도 있다. 의회 위에 종교조직이 있는 것이다. 1978년 귀국해 1979년 이란 혁명을 주도한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이슬람 율법학자와 세속 법학자로 이뤄진 법학자들이 지배하는 세상을 꿈꿨다. 최고 지도자는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보호자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최고 지도자는 막강한 전문가회의의 위원 12명 중 절반을 마음대로 갈아치울 수 있으며 각 주도의 중앙 모스크에서 금요예배를 주도하는 이맘 임명권도 있다. 이러한 이란의 초대 최고 지도자는 이슬람혁명을 이끈 아야툴라 호메이니가 맡았다. 1989년 호메이니가 세상을 떠나자 오른팔이던 알리 호세이니 하메네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아 현재에 이른다. 이란 핵협상 타결의 실질적인 최고 책임자다.

이슬람혁명 확산 막으려 이란 침공한 후세인: 이슬람혁명으로 군주였던 샤를 내쫓고 이슬람공화국이 된 이란은 서방에 대한 응징 차원에서 전면적인 석유수출 중단에 나섰다. 그러자 배럴당 13달러 대였던 국제 유가는 20달러로 폭등했다. 1980년 9월22일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면서 30달러라는 마지노선마저 무너졌다. 국제 유가는 6개월 만에 2.3배로 급등했다. 이 전쟁은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면서 발발했다. 후세인은 이라크에서 페르시아만에 이르는 유일한 수로인 샤트알아랍 수로가 자국 소유라며 이를 확보하는 것을 전쟁의 목표로 내세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란의 이슬람혁명이 파급되는 것을 막는 게 진짜 목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라크는 인구의 20% 남짓 차지하는 이슬람 수니파가 인구의 70% 이상 차지하는 이슬람 시아파를 억압하고 있었다. 후세인은 수니파였다. 따라서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에서 벌어진 혁명이 자국의 시아파를 자극해 이슬람 민중혁명으로 이어질까 두려워했던 것이다. 1차 석유파동이 중동과 서방과의 관계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면, 2차 석유파동은 중동 국가의 내재적인 갈등이 국제 유가로 불똥이 튄 경우다. 국제 유가 관리의 어려움을 잘 보여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와중에 1981년 1월 사우디가 석유무기화를 선언했다. 이 때문에 중동 유가는 두바이유 기준으로 배럴당 39달러로 뛰었다.

서방 선진국들은 1차 석유파동 때의 교훈을 바탕으로 막대한 비용을 투자해 석유 비축 기지를 늘리는 등 나름대로 대비책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경제적 충격은 1차 석유파동 때보다는 적었다. 하지만, 경제 규모가 작아 제대로 준비를 할 여력이 없었던 한국 경제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1980년 실질성장률이 마이너스 2.1%로 1960년대 초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뒷걸음질을 기록했다. 물가상승률은 28.7%에 이르러 서민들은 허리를 더욱 졸라매야 했다. 계속되는 경제성장으로 구직난보다 구인난에 시달리던 한국에서 실업률이 5%를 넘었다. 석유 파동에 겹쳐 1979년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과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 민주화 투쟁 등 정치적 혼란이 겹치면서 한국 경제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인 1981년 경제성장률은 6%대로 반등했지만 물가상승률은 계속 20%를 웃도는 등 쇼크에서 제대로 헤어나지 못했다. 2차 석유 파동은 1981년까지 한국 경제를 뒤흔들었다. 유가와 관련한 한국의 아픈 경제사다.

이제 우리는 국제적인 저유가라는 새로운 환경을 맞고 있다. 저유가 상황을 헤쳐나가는 지혜를 발휘해야 하는 시점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방문을 통해 저유가라는 불리한 환경을 새로운 기회로 만드는 국가적인 전략이 절실하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1321호 (20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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