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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⑦] 유명무실해진 둔전제 폐지 주청 

청남의 영수 허목, 활발히 정견 제시하면서도 관직 맡긴 꺼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자는 노력을 더하지 않으므로 그 덕은 반드시 이지러지며, 스스로 능하다 자만하는 자는 다른 사람이 도와주지 않으므로 반드시 그 공이 떨어지게 됩니다. 무릇 발동하기 쉬운 것은 욕심이고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감정이니, 한 순간이라도 생각이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생각이 게으르면 사치와 의심이 그 틈을 타고 들어오게 되고, 안락함과 즐거움이 마음을 그르치며, 칭송하고 아첨하는 말이 귀에 가득 차게 됩니다. 그리 되면 충직한 말은 설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눈을 덮을 정도로 눈썹이 길어 ‘미수(眉臾)’라는 호를 가졌던 허목(許穆, 1595~1682)의 사직상소 중 일부이다. 청남(淸南, 남인에서 갈라진 당파로 전문 관료 중심의 탁남과 달리 명분과 도덕성을 강조했다)의 영수로서 예송논쟁 당시 송시열과 맞서 남인의 예론을 주도했던 허목은 56세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벼슬을 했고,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도 63세라는 매우 늦은 나이였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재야 명망가 영입 케이스로 발탁된 것인데 당시로서는 평균 수명을 훌쩍 넘긴 나이에 조정에 출사한 것이다.

63세에 본격적인 정치활동

그래서였을까. 허목은 빈번하게 사직상소를 올리곤 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있었지만 “늙고 병들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자신의 말대로, 함부로 관직을 맡기가 조심스러웠으리라. 활발히 정견을 제시하면서도 그것을 굳이 사직상소에 담아 올렸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허목이 자신의 생애에 대해 직접 서술한 [자서(自序)]에서 ‘특별히 임금께서 따라주셨다’고 말했을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갖는 상소인 1659년(효종10) 4월의 사직상소도 여기에 해당한다(이하 인용은 모두 [眉叟記言], ‘因辭職更申前事疏’가 출처임).

이 상소에서 허목은 크게 4가지 문제를 건의했다. 우선 둔전(屯田)이다. 병사들이 평소 부대 주변의 공한지(空閑地, 놀려두거나 개척되지 않은 토지)에 농사를 지어 군량을 자체 조달하도록 하는 둔전제는 군량의 운반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 차원에서 경작지를 늘리고 수확량을 증대시키는 이점이 있었다. 그런데 둔전의 운용 과정에 부정이 개입되면서 폐단이 생겨났다. 실제 수확량에 비해 지나친 할당량이 부과돼 이를 담당하던 병사들이 과중한 부담을 못 견뎌 군영을 이탈한 것이다. 둔전이 조세회피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둔전에 지정된 토지는 면세혜택을 받고 수확의 일부만 해당 부대에 군량미로 납부하면 된다는 점을 악용한 것이다. 권세가들은 기름지고 멀쩡한 토지를 둔전으로 조작해 세금을 탈루했다.

여기에 대해 허목은 둔전제의 폐지를 주청했다. ‘시골 사람들이 말하길 둔전에서 소출한 곡식을 네 몫으로 나누면 한 몫은 공납하고 한 몫은 뇌물로 주고 나머지 두 몫은 감독관의 차지라고들 합니다. 지금 둔전이 늘어난다고 해도 나라에는 아무런 이득이 되지 않으니 그 둔전들은 모두 군영이 없는 곳에 있습니다. 둔전으로 개간했다고 하는 토지도 태반은 본래 나라에서 조세를 매기는 토지문서에 실려 있는 전지로서, 공한지는 실로 적습니다. 국가의 이득이 하나라면 손실은 백이나 되는 상황입니다.’ 태조 때부터 내려온 제도이므로 함부로 폐지할 수 없다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허목은 개의치 않았다. 둔전이 공한지를 개간해 군량을 자급자족한다는 본래의 취지를 상실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허목은 ‘예(禮)’를 강조했다. 유교사상에서 ‘예’는 인간과 사회의 질서를 규정하는 근본 원리로서 실천윤리에 해당된다. 실제 정치와 행정에서의 ‘예’는 지켜야 할 절차와 매뉴얼의 의미도 갖는다. 업무의 스탠더드이기도 하다. 허목은 당시 국정의 혼란이 이 예를 준수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진단했다. 예란 예식을 담당하는 관리만이 숙지해야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관리가 함께 지켜야 할 표준이라고 주장했다. 때론 번거롭고 불필요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질서이자 표준인 예가 전제되어야 업무를 하는 사람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고 정책도 올바름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변례(變禮)’, 즉 예의 변통 역시 먼저 예의 본질에 충실해야 가능하다고 보았다. 기본이 밑받침 되어야 응용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어서 허목은 법질서의 확립이 중요하다고 밝힌다. 법을 부차적인 수단으로 보았던 유학자들과는 다른 면모다. 그는 “유교의 정책을 중용하는 나라에서 법은 다만 그것을 담당하는 관청의 업무일 뿐이며 군자가 임금을 섬길 적에는 요순(堯舜)의 도가 아니면 아뢰지 않아야 하오나, 오늘날에는 부패와 해이가 극심하여 법이 아니면 이러한 상황을 타개할 수 없나이다”라고 말한다. 유학의 가르침대로라면 법이나 형벌보다는 인의(仁義)와 예를 내세우는 것이 마땅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을 적용하기에는 현실이 너무 타락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다소 강제적이더라도 법을 통해 사회를 개선하고자 했다. 허목은 “오늘의 법령 하나하나는 모두 선왕들께서 제정하신 것이오니, 성상께선 마땅히 준수하여 어기지 않아야 할 것이옵니다”라며 임금에게도 준법을 요구한다. 임금이 법을 지켜야 백성과 신하들도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기본과 원칙에 따른 국가 시스템 주장

마지막으로 허목이 거론한 것은 ‘시사(市肆)’에 관한 문제다. 시사란 요즘의 ‘시장(市場)’으로 허목은 “모든 재물이 이곳에서 소통되니 민생의 복리가 여기에 달렸다”고 보았다. 그는 당시 시장질서가 혼탁하고 물가가 안정되지 못한 것은 “장사꾼들이 시세를 틈타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독점하여 팔지 않으며, 도리어 없는 말을 만들어 법을 어지럽히고 사욕만 채우기 때문으로 이는 나라에서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탓”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상인들이 질서 없이 싸우고 혼란한데, 관에서는 이에 대한 조정을 포기하고 물가도 방치하고 있으니, 이는 관 스스로 나라를 문란케 만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주장했다. 그렇다고 관에 의한 완벽한 시장통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건과 재화가 자유롭게 유통될 수 있도록 나라에서 건전한 시스템을 구축해 주자는 것이다.

허목의 주장은 ‘기본’과 ‘원칙’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아무리 좋은 기획에서 만들어진 제도라 할지라도 본래의 의미를 상실했다면 그것은 과감히 폐지되어야 한다. 오랜 시간 시행되어온 것이라 해서 주저한다면 망설이는 시간만큼 폐해만 더 쌓여갈 뿐이다. 예와 법을 지켜야 하는 것도 그래서이다. 기본에 충실하지 않고 원칙을 따르지 않았는데 사회질서가 확립될 리 없고 좋은 정치가 펼쳐질 리 없는 것이다. 시장도 마찬가지다. 시장이 제 역할을 하려면 만들어진 취지에 맞게 작동되어야 한다. 요컨대, 기본과 원칙에 따른 국가 시스템의 운용. 허목의 바람은 여기에 있었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24호 (2016.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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