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ubator of Nature, 2016, 선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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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사진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DSLR카메라 보급률이 세계 1위입니다. 풍경사진에 대한 열기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이른바 ‘국민 포인트’라 불리는 관광지를 가면 삼각대를 받쳐 놓고 사진을 찍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주말이면 사진 동호인들이 ‘출사’라는 이름으로 삼삼오오 모여 밤을 달려 사진을 찍으러 갑니다. 규모가 큰 그룹은 관광버스까지 동원합니다.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나는 이를 산수화의 전통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는 ‘밈(meme)’이라는 용어가 등장합니다. 생물학적 유전자인 ‘진(gene)’의 대조적인 개념으로 ‘문화적인 유전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술, 철학, 종교, 사회적 관습 등도 모방과 흉내를 통해 복제되며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이론입니다.급속한 서구화로 산수화의 전통이 단절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조상들의 자연을 사랑하는 정신만큼은 ‘밈’이라는 유전자를 통해 전달됐고, 이것이 풍경사진 열풍에 한몫했다고 생각합니다.동양에서의 자연은 숭배의 대상이자, 속세를 떠나 귀의하고 싶은 이상향 같은 곳입니다. ‘인자요산(仁者樂山), 지자요수(知者樂水)’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에도 담겨있듯이 자연은 철학적 성찰의 대상입니다. 세상 사는 지혜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기도 합니다. 철리적 자연관은 예술에도 반영됐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산수화입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풍경사진 열풍중국 송나라 때 화가이자 비평가인 곽희가 쓴 [임천고치(林泉高致)]에는 동양의 자연관이 잘 드러납니다. 임천고치는 중국은 물론, 한국과 일본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 ‘산수화의 교과서’입니다.‘산림과 정원에 거처하면서 자신의 천품을 수양하는 것은 누구든지 원하는 바이고, 샘물과 바위에서 노래하며 자유로이 거니는 것은 누구든지 즐기고 싶은 바일 것이다. …(중략). 속세의 풍진사에 구속받는 것은 인정상 누구든지 언제나 싫어하는 바이고, 안개 피어오르고 구름 감도는 절경 속에서의 신선이나, 성인은 인정상 누구든지 동경하는 바이나 그들을 만나 볼 수 없는 형편이다.’산수화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에서는 세계적인 풍경사진가가 나오지 않을까요. 나는 이를 정체성의 혼란과 철학의 부재에서 답을 찾습니다. 우리 사진계의 현실을 들여다볼까요. 카메라가 급속하게 보급됐습니다. 너도 나도 카메라들 들고 산으로, 바다로 갑니다. 철학의 부재는 ‘그 나물의 그 밥’을 양산합니다. 누가 더 화려한가, 누가 더 아름다운가에만 집착합니다. 내공을 키울 생각은 않고 ‘날씨’라는 운칠기삼에 승부하려 듭니다. 프로들은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기세에 밀려 외국으로 나갑니다. 아프리카의 사바나, 아마존의 원주민, 미국의 캐년, 히말라야의 오지로 향합니다. 아마추어의 풍경 사진을 ‘판박이 사진’이라고 비난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내셔널지오그래픽 류의 사진을 흉내 내기에 급급합니다.서양의 철학은 과학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합니다. 앤셀 아담스로 대표되는 미국 풍경사진의 전통은 서부 개척과 관련이 있습니다. 19세기 후반 서부 개척 시절 지질 조사를 위해 촬영했던 사진들이 ‘랜드스케이프(Landscape)’라 불리는 풍경사진의 원조가 됐습니다. 미국의 풍경 사진은 신비하고 경이로운 대자연의 아름다움 자체에 방점을 둡니다.산수화는 분명 우리 것입니다. 그러나 사진은 서구에서 들어왔습니다. 역사도 100년 남짓, 아주 짧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의 풍경사진가들은 종종 정체성의 혼란을 보여줍니다. 미국식 풍경사진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갓 쓰고 양복입은 격’이랄까요. 풍경사진이 천덕꾸러기 대접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갓 쓰고 양복입은 격’으로 어색해마이클 케냐라는 세계적인 풍경사진가가 있습니다. 영국 출신이지만 유럽보다 한국, 중국, 일본에서 팬층이 두텁습니다. 그의 장노출 사진은 때로 먹물 번짐 효과를 내기도 합니다. 케냐는 한때 불교의 선(禪) 사상에 심취했다고 합니다. 케냐의 사진은 산수화를 닮았습니다. A4용지 만한 사진 한 장이 수백 만원에 팔립니다. ‘호랑이 없는 골에 여우가 왕노릇’ 하는 격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서양의 사진가는 동양 문화를 배우려고 애쓰는데, 한국 사진가들은 거꾸로 서양의 사진을 흉내냅니다. 2011년 한국을 방문한 케냐는 ‘철학자의 나무’라는 타이틀의 전시를 열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존재의 위엄, 희망, 철학적인 감정 등을 저는 나무에서 봅니다…(중략)…늙은 나무는 사진을 찍고 나중에 다시 가보면 베어지고 없어집니다. 이렇게 세월의 흐름을 따라 계속 변화하고, 통제나 예측이 불가능한 삶을 산다는 점에서 나무는 사람이나 인생을 닮았죠. 또 나는 어떤 대상을 찍을 때 마치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그곳을 여러 번 찾아가고 자주 만나고 점점 더 깊이 알아가면서 그 과정들을 사진에 담아내려 합니다.”나무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케냐의 자연관은 곽희의 산수화 이론과도 통합니다. ‘봄 산은 담박하고 온화하여 웃는 듯하고, 여름산은 싱싱하고 푸르러 물에 젖은 듯 촉촉하고, 가을산은 밝고 깨끗하여 단장한 듯하고, 겨울산은 처량하고 쓸쓸하여 자고 있는 듯하다.’ 산이 웃고, 화장하고, 잠을 잡니다. 그는 산을 사람 대하듯 그렸습니다. 풍경사진의 답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