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경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약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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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자리를 비울 수도 없습니다. 전기약탕기가 없던 시절, 한약을 달일 때 우리 어머니들은 온종일 약 달이는 데에 정신을 쏟았습니다. 자칫 한눈 팔다 보면 약이 졸아붙고 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여 일찌감치 불에서 약을 내려놓으면 약이 멀개져 약맛이 안 나는 것은 물론, 약효도 떨어질까 걱정이 많았습니다.약을 제대로 정성껏 달였다 해도 문제는 또 남습니다. 한약은 들어가는 약재에 따라 달여진 약의 양이 들쭉날쭉 합니다. 잎이나 꽃, 열매가 많이 들어간 약은 수분 흡수량이 많아서 달일 때 물을 많이 넣어야 합니다. 수분 흡수가 적은 뿌리, 줄기, 동물성 약재가 들어간 약은 물의 양을 적게 해서 달여야 제대로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이런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이 달인 약을 약사발에 담으면 넘치기도 모자라기도 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강지처가 달인 약의 양은 들쭉날쭉한데, 첩이 달인 건 항상 양이 정확하다는 겁니다. 사실 처는 그저 낫기만을 바라는 마음에 약을 달여진 대로 내는 반면에 첩은 잘 보이기 위해 남으면 버리고 모자라면 물을 타서 내는 것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부인은 핀잔받고 첩은 정성껏 약을 잘 달였다고 칭찬을 받는다는 것이지요.이를 예방하기 위해 조선시대에 이르러 우리 선조들은 자기에 글과 그림을 넣고 유약을 발라 아름답고 유용한 도구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약호(藥壺) 입니다. 사진의 약호는 18세기경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약호입니다. 모양이 투박하지 않고 면이 매끄러우면서 문양이 세련된 것으로 보아 민간의 가마에서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관요(관청에서 운영하는 도자기 제조장)에서 만든 것으로 여겨집니다.
약 찌꺼기 거르는 효과도약호라는 한방용기는 액체로 된 약을 담아두거나 용량을 가늠하기 위해 만든 도자기의 한 종류입니다. 약호와 약병은 언뜻 보면 같은 종류로 보이지만 약호는 가운데가 약간 불룩하게 나온 항아리 모양이고, 약병은 윗부분이 목처럼 잘록한 형태를 띠면서 몸체가 약간 긴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약호나 약병은 자기나 오지(질그릇)로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이나 드물게는 청동으로 만들어진 것도 있습니다. 입구가 가운데 부분보다 좁기 때문에 한약이나 술 등을 넣어 보관하고 따르고 가늠하기에 적합한 것이겠지요.탕약이 다 끓으면 약탕기에서 바로 약사발로 약을 옮겨 붓는 것이 아니라 이 약호에 담습니다. 약호는 지름이 4.7cm 이고 높이가 8.6cm 이어서 약 한 사발이 딱 들어가게 만들어졌습니다. 상단에는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라는 연년익수(延年益壽), 만수무강(萬壽無疆)의 글자가 청화로 적혀있어 약을 드는 사람의 건강을 염원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약호는 세 가지 기능을 합니다. 첫째로는 약을 식혀서 마시기에 적당한 온도가 되게 합니다. 둘째로는 탕약의 양을 가늠해서 약사발에 일정한 약을 담게 해줍니다. 셋째로는 약 찌꺼기를 약호의 바닥에 침전되게 해서 약사발에는 들어가지 않게 해줍니다. 지체 있는 집안에서는 약호가 필수품이었습니다.예로부터 한약의 효과를 제대로 보려면 짓는 정성, 달이는 정성, 먹는 정성이 고루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약을 달이는 것은 음식을 만드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같은 음식 재료와 레시피가 주어져도 요리사에 따라 음식 맛이 달라지듯이 약도 달이는 방법에 따라 약효가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약은 달이기 전에 2시간 정도는 물에 담궜다가 달이는 편이 좋습니다. 실험결과에 따르면 약재를 찬물에 두 시간 정도 담구어 놓으면 유효성분의 절반 정도가 나온다고 합니다. 이를 냉침(冷浸)이라고 합니다. 집에서 한약을 달이거나 약초를 끓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약을 달일 때에는 시간·온도·압력을 잘 맞추어야 합니다.한약은 무조건 오래 달인다고 좋은 건 아닙니다. 냉침한 약재는 90분 정도 달이면 약효가 충분히 우러납니다. 약한 불이나 슬로우쿠커에 반나절 이상 약을 달이면 도리어 쓸데없는 성분이나 섬유질이 추출되어 약효가 감소되거나 소화불량을 일으키기 십상입니다. 야채가 들어간 국을 오랫동안 끓인다고 해서 맛이 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한약은 치료 목적에 따라 달이는 시간이 차이가 납니다. 보약은 좀 오래 달여야 하고 감기약이나 소화약은 30분 정도만 달여도 충분합니다. 탕약이나 약차를 끓일 때에는 온도도 잘 맞추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강한 불로 달이다가 서서히 약한 불로 달이는 편이 효과가 좋습니다. 잎이나 꽃이 처방된 약재는 강한 불일 때에는 넣지 않고 나중에 약한 불로 달일 때 탕약 속에 넣습니다. 이를 후하(後下)라고 합니다.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잎이나 꽃으로 이루어진 약재는 나중에 넣고 달여야 향이나 효과가 줄어들지 않습니다.압력 또한 중요합니다. 예전에 집에서 약을 달일 때에는 한의원에서 약을 지을 때 썼던 종이를 약탕관 위에 덮고 김이 나가지 않도록 해서 달였습니다.그래야 압력이 적당히 유지되고 수증기로 약효성분이 빠져 나가지 않게 됩니다. 고압 약탕기에서 달여진 약은 혀가 아리고 소화가 안 되어 속이 더부룩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시간·온도·압력을 잘 조절해야 재탕도 효과가 있게 됩니다.요즈음에는 집에서 한약 달이는 일은 거의 없고 약호 쓸 일은 말 그대로 옛날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한의원에서 기계로 달여 배달된 파우치에 담긴 약을 먹기 때문입니다. 파우치에 담긴 약을 복용할 때에도 지켜야 할 점이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약은 따뜻하게 데워서 드시는 편이 좋습니다. 간혹 약성이 뜨거운 약은 찬 상태로 복용해야 하기도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약은 따뜻하게 해서 드셔야 약성이 유지되고 흡수도 잘 됩니다.
약은 가급적 따뜻하게 데워 먹어야한약을 데울 때에는 전자레인지는 쓰지 않는 게 좋습니다. 강제로 약을 데우는 과정에서 약 성분의 입자도 깨지고 약성이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머그컵에 한약 파우치를 넣고 뜨거운 물을 담아 1분 정도 있다가 마시거나 세면대에 뜨거운 물을 받은 후 담갔다 마시면 편합니다. 어린이나 쓴 것을 싫어하는 분은 빨대를 이용해 복용하는 것도 시도해볼 만합니다.이제 선인(先人)들이 애용하던 약호는 한약 파우치로 진화했습니다. 달이는 방법도 숯불풍로와 도기약탕관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제어되는 무압력 옹기로 변했습니다. 한약의 효능에 대한 연구도, 엑기스로 만들어 약을 간편하게 복용하는 방법도 진화했습니다. 그렇지만 한의학과 고미술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그리 진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관심은 사랑으로 진화되고 사랑은 관심을 먹고 자란다는 말이 여기에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윤영석 -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의학 박사. 경희대 한의과대학 외래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7대째 가업을 계승해 춘원당한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의학 관련 유물 4500여점을 모아 춘원당한방박물관도 세웠다. 저서로는 [갑상선 질환, 이렇게 고친다] [축농증·비염이 골치라고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