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락논, 20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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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시와 그림의 역사를 논할 때 ‘시는 당(唐)에서 끝나고, 그림은 송(宋)에서 완성된다’는 말을 합니다. 당나라 때는 이백(701년~762), 두보(712년~770), 왕유(699년 추정~759) 같은 걸출한 시인이 등장했습니다. 송대에 들어 그림은 절정을 맞습니다. 이성(919년~967 추정)과 범관(990년 추정~1027 추정), 곽희(1020년 추정~1090 추정)가 중국 회화사에 일획을 긋습니다. 곽희는 화론인 [임천고치(林泉高致)]를 저술하고 북방계 산수화 이론을 완성합니다. 임천고치는 중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산수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산수화의 교과서’입니다. 소식(소동파, 1036년~1101)으로 대표되는 문인화가 탄생한 것도 이 시기입니다. 송은 중국 예술사에서 문예부흥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특히 이 시기에는 화가들의 수양이 강조됐습니다. 붓질의 기교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배경과 경험을 중시했으며 이를 회화비평과 창작의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이러한 시대적인 분위기로 인해 산수화·화조화·인물화 등 그림이 꽃을 피웠습니다. 남송의 비평가인 조희곡은 자신이 쓴 ‘고화변(古畵辯)’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슴속에는 만권의 책이 있고, 눈 앞으로는 진기한 명적(名迹)을 실컷 보며, 또한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이 천하의 반은 되어야만 바야흐로 붓을 댈 수 있다.’여기서 ‘만권의 책’은 인문학적인 소양을 말합니다. ‘진기한 명적’을 실컷 본다는 것은 예술 전통에 대한 연구를 강조한 말입니다. 또 ‘수레바퀴 자국과 말 발자국’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노력과 체험이 밑바탕 돼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디 그림에만 해당되는 말일까요. 예술가라면 누구나 가슴에 새겨야 할 명언입니다.진경산수의 대가 겸재 정선은 위 세 가지를 몸소 실천한 화가로 생각됩니다. 그는 화원화가가 아닌 양반 출신입니다. 당시 쟁쟁한 문인 그룹을 이끌고 있던 안동 김씨 가문의 창협·창흡 형제와 교류하며 학식을 쌓았습니다. 절친인 시인 이병연과 시화상간(詩畵相看)을 하면서 한층 더 성숙한 붓질을 선보였습니다. 또 중국의 산수화 이론을 섭렵하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새로운 화법을 창안했습니다. 금강산과 관동팔경 등 전국의 이름난 명승지를 누비고 다니며 실제 눈으로 본 우리나라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습니다.겸재는 생전에 금강산을 세 번이나 올랐습니다. 겸재의 금강산 작품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겨우 세 번?”이라고 의아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강산을 간다는 것을 요즘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통이 불편하고 등산로가 정비되지 않은 시절입니다. 조선시대 때 금강산을 오른다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생각해 봅니다. 호랑이 같은 맹수가 사람을 물어가던 시대입니다. 곳곳에서 산적이 출몰하기도 합니다. 깊은 산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위험을 각오해야 합니다. 칼 잘 쓰고, 활 잘 쏘는 호위무사가 동행해야 합니다. 험한 산길을 안내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산에서 먹고, 자는데 필요한 음식과 침구 등을 져 날라야 하는 노복도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수십 명이 동원됐을 겁니다. 짐을 지고 험한 산길을 오르는 나귀도 필요할 것입니다. 요즘 기준으로 치면 히말라야 등정쯤 되지 않을까요. 세도가의 양반이 아니면 금강산행은 꿈꾸기 어려운 일입니다. 다행히 겸재는 영조의 후원과 함께 세도가였던 안동김씨 가문의 지원을 받아 금강산에 세 번이나 오를 수 있었습니다.겸재의 금강산 그림은 사실적이면서도 예술성이 높기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부감으로 그려진 ‘풍악내산총람’은 마치 지도를 그리듯 그림 속에 명승지 이름을 써 넣기도 했습니다. 몇 해 전 독일의 과학자들이 최신 장비를 동원해 겸재 정선이 어느 지점에서 금강산을 그렸는지 조사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지점은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조선시대 산수화 아름다운 필묵의 정신사, 고연희, 돌베개, 2011). 겸재는 자신이 실제 경험했던 금강산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재 조합해 하늘에서 내려다보듯이 정교하게 그렸습니다. 그가 험한 산길을 얼마나 누비고 다녔을지 가히 짐작이 갑니다.
아는 만큼 더 보인다나는 이 대목에서 ‘사진은 발로 찍는다’는 말이 생각납니다. 당시에 카메라가 있었다면 겸재는 위대한 사진가가 되지 않았을까요. 사진은 시간과 공간의 전략적 선택으로 이루어집니다. 시간은 사진을 찍는 시점을 뜻하며, 공간은 사진의 대상이 됩니다. 이때 시간은 빛을 의미합니다. 빛에 따라 공간은 달리 보입니다. 아침 빛이 다르고, 저녁 빛이 다릅니다.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시간은 공간을 얼마든지 다른 모습으로 바꿔 놓을 수 있습니다.울주에서 찍은 다락논 사진입니다. 막 모심기가 끝난 시점입니다. 해가 뜨자 논에 고인 물에 노을빛이 반사됩니다. 판화의 질감과 비슷한 빛과 어둠의 강한 대비가 인상적입니다. 산을 깎으며 논밭을 일군 농민들의 피땀이 서려있는 듯 합니다. 논에 고인 무채색의 물과 초록의 모가 아침 빛을 받아 전혀 다른 형태와 질감을 만들어 냅니다. 시간이, 빛이 공간의 형상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시간과 맞물려 돌아가는 공간의 선택도 치밀한 계산이 필요합니다. 사진은 프레임의 예술입니다. 프레임의 안과 밖, 즉 공간의 취사선택도 전략적이어야 합니다. 온전하게 숲을 보여줄 수도 있고, 나무를 보고 숲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상징적인 기법도 있습니다. 사진에서 시간과 공간은 무한한 조합을 만들어 냅니다. 사진 작품은 그 과정에서 탄생합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시간을 달리하며 수십, 수백 번 찍어 봐야 합니다. 조희곡의 말처럼 사진가의 ‘발자국이 천하의 반’이 되어야 카메라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풍경사진은 발로 찍고, 땀으로 완성됩니다.철학·문학·과학·수학 등 인문학적인 소양을 갖추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진은 보는 것이 반입니다.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존재론적인 탐구이자 자기 성찰입니다. 아는 만큼 더 보입니다. 특히 현대사진은 시대정신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접근하기조차 어렵습니다. 또 문학과 미술과 음악 등 예술작품을 꾸준히 접해야 합니다. 그 감동으로 가슴이 흥건히 젖어 있어야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기능적인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사진으로 이르는 길은 사진 밖에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