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턴 티파티’ 재현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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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 1620년 9월 16일 영국의 종교적 박해를 피해 네덜란드로 이주했던 35명의 청교도와 신앙의 자유와 경제적 자립을 갈망하는 67명의 영국인이 메이플라워호(Mayflower)에 승선해 신대륙을 향했다. 미국 건국 시조로 알려진 필그림 파더스(Pilgrim Fathers)를 태운 메이플라워호의 목적지는 버지니아였다. 그곳에는 필그림 파더스보다 앞선 1607년에 건너온 영국 이주민들이 정착해 건설한 제임스타운이 있었다.메이플라워호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겨울을 맞아 추위와 병으로 과반수의 승객이 사망했다. 1587년 로어노크 섬에서 115명의 영국 이주민이 전원 실종된 사건에 비하면 이들은 운이 좋았다. 1620년 11월 11일 살아남은 승객 중 성인 남성 전원은 선상에서 미국식 민주주의 기초가 되는 메이플라워 서약(mayflower compact)을 만들었다. 하지만 신대륙을 영국 식민지로 종속시켜 영국 왕실에 충성하겠다는 내용을 넣어 자유와 자치의 한계를 스스로 구속했다.
신대륙 식민지에 직접세 부과
▎보스턴 티파티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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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정신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을 영국의 식민지로 확장하던 영국 이주민들은 프랑스 이주민들과 오하이오에서 영토분쟁을 벌이게 됐다. 1753년 12월, 21살에 소령이 된 조지 워싱턴 (George Washington, 1732년 2월 22일~1799년 12월 14일)은 버지니아 주지사의 지시에 따라 오하이오에 주둔한 프랑스군이 캐나다로 철수할 것을 통첩했다. 이를 거부한 프랑스와 1755년에서 1763년까지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다.아메리카 인디언과 연합한 프랑스군이 초기에는 유리했지만 영국 본토의 정예부대와 독일 용병이 참전하면서 8년에 걸친 ‘프렌치 인디언전쟁’은 영국과 영국 식민지주민의 승리로 끝났다. ‘프렌치 인디언전쟁’으로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불붙은 영국과 프랑스는 유럽에서도 ‘7년 전쟁’으로 불리는 ‘포메라니아 전쟁’에서 맞섰다. 결국 영국이 승전해 대영제국의 기반을 세웠다.신대륙의 주도권을 장악한 영국과 영국 식민지 주민은 새로운 갈등을 빚게 된다. 유럽과 신대륙에서 일어난 전쟁 탓에 영국의 재정은 바닥이 나고 국고를 채워주던 동인도회사도 과도한 차(茶) 수입으로 무역역조가 심화돼 파산 직전이었다. 신대륙에 있는 식민지의 재정 지원이 절실했지만 식민지 13개주는 전쟁 경비 부담을 외면했다. 프랑스의 위협이 사라지자 오히려 영국군 철수를 요구했다. 게다가 ‘프렌치 인디언전쟁’에 참전한 보상을 영국에 요구했다.신대륙 길들이기에 나선 영국은 신대륙 식민지에 직접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영국 의회는 1764년 설탕조례를 시작으로 1765년에는 인지 조례를 통과시켰다. 영국군의 주둔 비용 분담을 규정한 요새비용분담 조례를 받아들일 때까지 식민지 의회의 기능을 정지시키는 내용과 차를 비롯한 모든 거래 품목에 직접세를 높이고 세금 징수에 필요한 비용도 부담시키는 타운센드 법안(Townshend Acts)이 1767년 시행됐다.연이은 세금폭탄을 거부하는 저항운동이 식민지에서 들불처럼 번졌다. 이론에 능한 새뮤얼 애덤스(Samuel Adams)와 과격한 행동을 선호하는 사업가 존 핸콕(John Hancock)은 자유의 아들들(Sons of Liberty)을 결성해 영국의 압력에 맞섰다. 영국에 대한 원성이 높아지는 가운데 1770년 3월 5일 보스턴에 주둔한 영국군과 부두에서 술을 마시던 노동자들 사이에 유혈사태가 벌어져 민심이 더욱 악화됐다. 영국군을 보스턴에서 철수시킨 영국은 민심을 달래려고 차에 부과하는 세금을 제외한 모든 악법을 폐지했다.숨 고르기에 들어간 영국과 식민지는 중국산 차를 놓고 힘겨루기에 다시 돌입했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중국차 수입물량은 전체 교역물량의 40%에 달했다. 영국 귀족부터 노동자까지 차에 빠진 영국은 신대륙에도 차를 수출했지만 네덜란드와 결탁한 신대륙 차 상인이 밀수한 차와 가격경쟁을 할 수 없었다. 영국의 관세장벽을 피해 밀수한 차가 신대륙에서 대량 유통되면서 영국 동인도회사의 대주주인 영국의 정치가들은 큰 손실을 보게 됐다.차를 독점 취급하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창고마다 가득 쌓인 차 수출과 차 밀수상인의 밀무역을 막기 위해 영국 수상 프레드릭 노스(Frederick North)는 식민지에 수출하는 차의 관세를 면제하는 차조례(Tea Act)를 1773년 시행했다. 식민지에서의 소비자 차 가격을 밀거래되는 차보다 낮추자 재고로 넘치던 차가 급격히 소진되며 식민지 소비자의 불만도 사라졌다. 오히려 저렴한 값에 차를 마실 수 있어 이 정책을 환영했다. 다만 밀거래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존 핸콕 같은 차 상인들은 주요 수입원이 사라지게 됐다.1773년 12월 16일 저녁 7시경 존 핸콕을 필두로 150명의 자유의 아들들은 모호크족으로 분장하고 보스턴 항구에 나타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의 무역선 3척을 습격했다. 배를 파괴하지만 말아달라는 선장에게 창고열쇠를 받은 이들은 3시간에 걸쳐 324 상자, 42t에 달하는 차를 바다에 쏟아버렸다. 이날의 차 파괴사건(Destruction of the Tea)을 대다수 식민지 지식인들은 ‘비열하고 가치 없는 반달리즘(vandalism)’이라고 평가절하 했다. 예전처럼 비싼 가격에 차를 마시게 된 시민들도 분개했다. 영국은 보스턴 항구를 봉쇄하고 메사추세스의 자치정부를 해산시켰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시민들과 모금하여 차 값을 변상하러 영국에 갔지만 영국 의회는 이를 거절하고 직접 통치 의도를 드러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모호크족으로 분장하고 차를 1 버리는 모습을 담은 석판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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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4년 제1차 대륙회의에서 패트릭 헨리는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명연설을 했지만 식민지 시민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영국인이라는 인식에 젖어 독립의지가 미약했다. 1776년 1월 토마스 페인(Thomas Paine)이 [상식(common sense)]이란 책을 발표하며 ‘미국 독립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독립의 필요성이 상식임을 설파한 토마스 페인의 책은 인구 300만이 살던 신대륙에서 50만부가 팔렸다. 미국은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기초한 독립선언문을 1776년 7월 4일 공표하며 본격적인 독립전쟁에 돌입했다.1783년 9월 3일 파리 조약을 거쳐 독립국가로 인정받은 미국은 21세기 주요 2개국(G2)으로 성장했다. 미국 독립의 단초가 된 보스턴에서 차를 바다에 버린 사건은 1830년대에 와서야 보스턴 티파티 (Boston Tea Party)라는 근사한 이름을 갖게 됐다.
서영수 - 1956년생으로 1984년에 데뷔한 대한민국 최연소 감독 출신. 미국 시나리오 작가조합 정회원. 1980년 무렵 보이차에 입문해 중국 윈난성 보이차 산지를 탐방하는 등 차 문화에 조예가 깊다. 중국 CCTV의 특집 다큐멘터리 [하늘이 내린 선물 보이차]에 출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