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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르노카라바흐 사태의 본질은] 분쟁의 불씨 남겨 강대국 개입 여지 만들어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20년 만의 무력충돌... 지역 갈등 스스로 못 풀면 외세 개입 불가피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접경지인 아제르바이잔 테르테르에서 4월 3일(현지시간) 군인들이 아르메니아군과의 전투로 부상을 입은 사람을 병원으로 옮기고 있다.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 러시아와 이란, 터키로 둘러싸인 카프카스 지역에서 요란한 총성이 들리고 있다. 이곳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에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군대가 지난 4월 2일 무력 충돌해 양측 군인이 30명 이상 사망했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통신에 따르면 세르즈 사르키샨 아르메니아 대통령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교전으로 아르메니아계 병사 18명이 사망하고 35명이 다쳤다고 말했다. 이번 교전은 1994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맞붙었던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에서 휴전한 이후 가장 큰 규모다.

카프카스의 작은 충돌은 오랜 역사적 뿌리: 얼핏 보기에는 머나먼 곳에서 작은 군사적 충돌이 벌어진 사건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역의 불안은 세계사적인 의미가 있다. 유전 지역인데다 오랫동안 세계의 열강이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맞선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은 카스피해 연안의 수도 바쿠에 거대한 유전이 있는 산유국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이곳 바쿠 유전을 향해 진군하다 소련군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저지당한 적이 있다. 당시 소련은 바쿠 유전의 석유를 바탕으로 연료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아 전쟁을 치를 수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유전은 카스피해 연안에 주로 있어 카스피해를 공유하는 이란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카스피해 산유국 아제르바이잔, 뿌리 같은 터키와 밀접: 하지만 아제르바이잔은 터키계 언어를 쓰는 민족으로 터키와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터키군이 러시아 혁명으로 어지러운 상황이던 이 지역에 진출한 적도 있다. 1908년 청년튀르크당 혁명으로 오스만의 권력자가 된 엔베르 파샤가 범튀르크주의·범우랄알타이주의·범투란주의에 앞장섰다. 카프카스와 중앙아시아의 터키어 사용 지역으로 오스만 세력을 확대하려는 구상이다. 엔베르는 1918년 이슬람군을 결성해 1차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세력 공백’ 상태가 된 아제르바이잔의 바쿠로 들어갔다.

1918년 3월 볼셰비키와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고 러시아 남부 영토를 차지한 튀르크 동맹국인 독일조차 이런 엔베르의 행동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1차 대전에서 연합군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경악했다. 오스만 세력이 중앙아시아를 장악하면 최대 식민지이자 이권 지역인 인도까지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중동보다 먼저 석유가 발견된 전략적인 유전 지대였다. 당시는 석유의 전략적 중요성이 막 부각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영국 해군은 당시 윈스턴 처칠 해군장관의 제안으로 함선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꾼 직후였다. 석유에 전략적 이해가 걸린 셈이다. 이때 호되게 당한 영국은 대전이 끝난 뒤 오스만제국을 갈기갈기 찢어 분할했다. 당시 적용한 논리가 ‘민족자결주의’였다. 이상주의자였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 제안했던 이 논리는 식민지의 독립이 아닌, 영국을 자극한 오스만의 해체에 활용됐다.

영국은 새롭게 중앙아시아를 지배하게 된 소련도 경계했다. 볼셰비키는 처음에는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토착민에게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내 번복하고 다시 점령해 소련의 일부로 삼았다. 당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이 서로 갈등하며 전쟁을 일으키자 곧바로 개입해 양쪽을 모두 소련의 일부로 편입한 것이다. 이를 지켜본 영국은 볼셰비키를 ‘새로운 러시아 제국주의자’라고 믿었다. 그래서 오스만제국을 해체한 영국은 볼셰비키 제국주의자들이 감히 중동을 넘보지 못하도록 그 지역에 친영·친서방 정권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카프카스와 중동발 세계 질서 개편이다.

카프카스는 종교·문명권이 부딪히는 경계지역: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카프카스 지역은 대부분 험준한 산악지대다. 아시아와 유럽이라는 지리적인 대륙, 이슬람과 기독교라는 종교의 경계지대다. 이곳에서 2016년 4월 다시 총성이 들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카프카스산맥의 한복판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지역이 바로 나고르노카라바흐다. 나고르노카라바흐라는 이름에는 두 가지 개념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카프카스 남부 지역에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한 주로서의 개념이다. 아제르바이잔 영토지만 주민의 대부분은 아르메니아인이다. 아제르바이잔인은 터키계 언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슬람교도)이 대부분이고, 아르메니아인은 고유 언어를 사용하며 아르메니아정교를 믿는 기독교도다. 아제르바이잔인과는 역사도, 언어도, 종교도, 정체성도 다른 아르메니아인이 모여 사는 자치주가 나고르노카라바흐다. 이 자치주는 영어로 나고르노카라바흐라고 불러 국제사회에 그런 이름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러시아어인 ‘나고르니 카라바흐’에서 온 것이다. 현지어로는 모두 다르게 표기된다. 현지 주민이 쓰는 아르메니아어로는 ‘레르나인 가라바그’라고 하고, 아제르바이잔어로는 ‘다을르그 가라바으’라고 한다.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하지만 과거 나고로노카라바흐 자치주는 아르메니아와 경계를 맞대지 못하고 있었다. 작은 회랑을 통해 사람들이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이 자치주에다 아르메니아군이 점령한 주변 지역을 합친 지역이다. 합치면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아르메니아와 국경을 맞대게 됐다.

아르메니아 vs 아제르바이잔 끊임없는 갈등: 사실 이 지역을 둘러싼 갈등은 뿌리 깊다. 실제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는 20세기 초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제국에서 일시 독립한 이 두 나라는 잔혹한 폭력으로 점철된 일련의 분쟁을 겪었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분쟁은 1918년 3월부터 1920년 11월까지 2년8개월 간 이어졌다. 아제르바이잔은 처음 오스만 제국과, 나중에는 소련(엄밀하게는 러시아 소비에트)과 손잡고 아르메니아와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과 아르메니아 본국이 연결되지 않고 아르메니아 한복판에 있는 아제르바이잔 거주지인 나히체반의 아제르바이잔인이 학살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모두 소련의 일부가 됐으며 영토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소련 무너진 힘의 공백이 갈등 증폭: 이 문제의 불씨는 꺼지지 않다가 옛 소련 말기인 1988년 내전으로 다시 불이 붙었다. 1988년 2월부터 1994년 5월까지 6년3개월 간 계속된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이다. 전쟁의 연유는 이렇다.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요구했다. 당시 붕괴로 치닫던 소련은 이를 조절하거나 말릴 정치력이 없었다. 이에 따라 사태는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이 지역에 사는 아르메니아계 주민과 소수의 아제르바이잔계 주민 사이에 유혈사태가 벌어졌으며 서로 상대방이 자신들을 ‘인종청소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1988년 2월 20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의회는 투표 결과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분리와 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의결했다. 중간 과정으로서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을 선포했다. 일단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돼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이라는 주체로서 아르메니아와 통합 절차를 밟겠다는 것이다. 소련에서 분리되면서 잠시 여유가 없었던 아제르바이잔은 내정 불안이 진정된 1992년 이 지역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이 나선 중재가 결렬된 것도 계기가 됐다. 1993년 봄에는 아르메니아군도 나서 나고르노카라바흐로 이어지는 아제르바이잔 영토를 점령했다.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끝난 1994년 당시 아르메니아군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은 물론 인근 지역까지 점령한 상태였다. 아제르바이잔 전체 영토의 9%에 이르는 지역이다. 이 지역은 현재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의 영토가 됐다. 전쟁의 결과 아제르바이잔 각지에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23만 명과 아르메니아와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살고 있던 아제르바이잔인 80만 명이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 아르메니아인은 아르메니아로, 아제르바이잔인은 아제르바이잔으로 추방된 것이다. 분쟁의 결과 인구 교환이 이뤄진 셈이다. 러시아가 휴전을 중재해 1994년 5월 휴전협정이 이뤄졌고, OSCE에 민스크그룹이라는조직을 만들어 양국 간 평화회담을 계속하기로 했다. 카프카스 한복판에 남북한과 마찬가지로 정전만 이뤄진 채 ‘평화협정’이 미뤄지고 있는 셈이다.

국제적 미승인국만 나고르노카라바흐 승인: 나고르노카라바흐 공화국은 현재 국제적인 미승인 상태다. 아르메니아를 포함해 이를 국가로 승인한 유엔 회원국은 아무도 없다. 다만, 유엔 비회원국으로 비슷한 신세인 트란스니스트리아·남오세티아·압하지야 등이 독립을 인정할 뿐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를 국가로 승인한 이 세 나라(또는 지역)는 모두 옛 소련의 영토였다가 분리 독립 과정에서 별도의 국가로 독립을 시도했다가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받기 힘든 상황을 겪고 있다. 역사적인 특수성, 지리적인 특이성, 영토 욕심의 은폐 목적 등의 이유로 독립을 승인한 나라들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옛 소련의 몰도바 공화국과 우크라이나 공화국 사이를 흐르는 드네스트르강 동안을 따라 존재하는 길이 400km, 폭 3~60km의 길고 가느다란 땅을 영토로 하는 작은 국가다. 50만 정도의 인구가 사는데, 주민의 32%가 몰도바인, 30%가 러시아인, 29%가 우크라이나인으로 이뤄졌다. 드네스트르 강을 따라 있는 포도밭과 와이너리가 경제의 핵심으로 과거 옛 소련의 주요 포도주 공급원 노릇을 했다. 이 지역은 소련 시절 몰도바 공화국에 속해 있었으나 소련이 붕괴 위험에 처하자 몰도바로부터의 분리를 요구하며 1990년 9월2일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언했다. 몰도바가 아닌 소련에 남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모스크바는 여기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1991년 8월 27일 소련으로부터 정식 독립하기 직전 몰도바로부터 분리를 선언하고 그 해 11월 5일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을 선언했다. 하지만 이를 인정한 국제사회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상 루마니아어를 쓰는 사람이 주류인 몰도바가 독립한 후 루마니아와 통일을 이룰 경우 루마니아의 소수민족이 될 수밖에 없는데 그럴 바에 독립국가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독립 추구에 몰도바가 개입해 1992년 3~7월 트란스니스트리아 전쟁이 벌어졌다. 전쟁은 쌍방이 합쳐서 1500여 명의 사망자를 낸 뒤 러시아의 중재로 끝났다. 그 결과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사실상 독립했으나 몰도바는 국제사회로부터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영토로 인정받았다. 어정쩡한 상태가 된 것이다. 러시아군이 주둔해 현재의 양태는 계속 유지될 것으로 전망된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독자적인 헌법과 국기, 국가를 갖추고 선거로 뽑힌 대통령과 의회, 군대, 경찰, 우편제도 등 국가에 필요한 구성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다.

압하지야는 카프카스 지역의 조지아와 러시아, 흑해에 둘러싸인 작은 지역이다. 1991년 4월 조지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자 압하지야 주민은 그 해 7월 23일 그루지야로부터 분리를 선언했다. 인구 20만 명 정도의 무슬림 압하지야인은 조지아정교를 믿는 기독교도 조지아인의 지배를 거부했다. 그 결과 1991년 8월부터 1993년 9월까지 조지아 정부와 압하지야 주민 간에 압하지야 전쟁이 벌어졌다.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은 압하지야가 조지아군을 패퇴시키면서 사실상 독립했다. 그 직후 압하지야에 거주하던 조지아인은 조지아 지역으로 추방됐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분쟁이 수 차례 발생하는 등 압하지야 사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다. 압하지야는 실질적으로 러시아군이 장악하고 있으며 국제사회에서 국가 인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압하지야 의회는 2008년 압하지야가 러시아 영토라는 결의안까지 냈지만 러시아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한때 세계적인 장수 지역이었지만 전쟁은 장수의 전통을 앗아가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4월 8일 열린 CIS 외무장관 회의에서 러시아, 아르메니아 및 아제르바이잔 외무장관이 나란히 앉아 있다(왼쪽부터).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은 4월 2일부터 나가르노카라바흐 지역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다.
남오세티야도 대부분의 국제사회에서는 조지아 영토로, 실질적으로는 독립 상태를 유지하는 미승인 국가다. 인구 7만의 미니 국가다. 오세트인이 사는 오세티야는 남북으로 나뉘는데 북오세티아는 세베로오세티아(북오세티아라는 뜻)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영토이고 남오세티아는 조지아 영토다. 오세트인은 이란어 계열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70% 이상이 러시아 정교 신자인데 분파인 다로르인은 무슬림이다. 문명권이 만나는 카프카스 지역의 복잡한 역사와 상황이 고스란히 투영된 지역이다. 이 나라는 현재 러시아와 남미의 친러국가였던 니카라과, 베네수엘라, 그리고 남태평양의 나우루 등 유엔회원국이 독립국가로 인정하고 있다. 2008년 조지아가 남오세티야 지역에 폭동을 선동했다며 러시아 전폭기가 조지아의 군사기지를 폭격하면서 조지아와 러시아 간에 남오세티야 전쟁이 벌어졌다. 러시아 의회는 2008년 8월 25일 남오세티아 공화국과 압하스 공화국의 독립을 지지하기로 결의했다. 이 지역에서 러시아에 대항하려는 조지아의 발목을 잡으려는 러시아의 전략이 엿보이는 상황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승인한 국제적 미승인 국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 사태의 본질이 보인다. 그것은 이 지역에 불씨를 남겨둬 나중에 러시아가 개입할 근거로 만드는 것이다. 지역의 뿌리 깊은 갈등도 원인이다. 지역의 갈등을 스스로 조종하지 못하면 외세가 끼어든다는 교훈을 주는 사례다. 한반도와 동아시아도 남의 일이 아니다.

- 채인택 중앙일보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1331호 (2016.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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