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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⑭] 숙종의 조변석개 언행에 직격탄 

퇴계학파의 거물 정시한의 진선 사직소... 소통 부재도 강력히 비판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정시한은 내가 직접 만나보지 못했으나 의로운 행동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왔네. 사적인 자리에서 늘 ‘어찌 그를 기용하지 않는가?’하고 토로하지 않았던가.”(송자대전). 이처럼 남인임에도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칭찬해 마지않았던 우담 정시한(丁時翰, 1625~1707)은 퇴계학파의 중심 인물로 많은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당파를 초월한 원칙론으로 조야의 존경을 두루 받았는데 특히 숙종의 환국정치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다.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해 있던 1691년(숙종17)에도 그는 자신에게 내려진 진선(進善, 세자 교육 담당)직을 사임하며 폐위된 인현왕후를 동정하고 숙종의 조치들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다(이하 인용은 모두 연려실기술 35권의 기사임).

폐위된 인현왕후에 대한 조치 비판

정시한은 우선 숙종이 금기로 삼았던 폐비문제를 거론했다. ‘폐비는 전하를 모신 지 거의 10년이나 되어, 전하께서는 배필로 대우하셨고 신민은 어머니로서 섬겼습니다. 비록 폐하신다 하더라도 별궁에서 살게 하시고 예로 대우하여 전날의 은의(恩義)를 온전하게 하심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폐서인이라 부르며 여염집에 거처하게 하시니 전하의 대우가 너무 박하지 않습니까? 군자는 절교하더라도 상대에 대해 나쁜 말을 하지 않는 법인데 전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는 뜻을 보이시기는커녕 도리어 박절하고 인정 없는 처사를 내리시니 참으로 답답합니다.’

일반적으로 왕후를 폐위하면 지위를 강등하여 외진 전각에 유폐하되 일정 수준의 예우를 해준다. 설령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한때의 아내이자 국모(國母)였던 사람에게 최소한의 존중을 표하는 것이다. 그런데 숙종은 인현왕후를 일반 평민으로 격하시켰을 뿐 아니라 민가에서 힘들게 살도록 방치하고 있으니 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시한은 숙종이 조정의 분열을 조장한다고 지적했다. ‘세자의 명호를 정할 때에 비록 한두 사람의 이론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본심을 캐어본다면 어찌 다른 마음을 품었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대해 죄를 물으시고 한사코 배척하시어 세자궁에 속한 관직을 제수하는 데 같이 참여시키지 않으시니 이는 너무 편벽되고 지나치신 처사입니다. 장차 전하께서는 이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을 모두 우리 세자께 맡기실 터인데 지극히 공평한 도리를 가르치지 않으시고 도리어 편벽된 사사로움을 보이시니, 모든 신하를 평등하게 사랑하라고 바르게 가르치셔야 하는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장희빈의 소생인 세자는 태어난 지 2년 만에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당시 집권당인 서인은 중전(인현왕후)이 아직 아들을 낳을 수 있는 상황에서 섣부른 조치라며 반대했었다. 그러자 숙종은 크게 진노했고, 이후 서인은 세자를 반대한 세력이라며 서연 등 세자 관련 관직에서 모두 배제되었는데 정시한은 이를 지적한 것이다. 설령 책봉 당시 다른 주장을 했더라도 그것이 꼭 세자에게 나쁜 마음을 품어서는 아니다. 더욱이 장차 왕이 될 세자는 모든 당파를 포용하고 아우르는 정치를 펼쳐야 하는데, 벌써부터 세자에게 편향적인 마음을 심어주어서야 되겠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시한은 당파 간의 공존을 무너뜨리고 상대방에 대한 갈등과 증오를 심화시키는 숙종의 조치들을 비판한다. 물론 당사자인 신하들이 초래한 결과이긴 하지만 그 배경에는 숙종의 잘못된 태도가 깔려있다는 것이다. ‘이 나라는 너그럽고 어진 마음으로 세워져 예로써 신하를 대우하고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어찌 거듭하여 대신들을 죽인 전하의 조정 같은 때가 있었겠나이까. 전하께서 즉위하신 지 16년 동안 정국은 크게 세 번 변했는데, 변할 때마다 오로지 한쪽 편의 사람만 쓰시어 내쫓긴 자들 한을 품어 뼈에 사무쳤고, 뜻을 얻은 자들은 마음대로 보복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예의와 사양이 있어야 할 조정은 싸움터가 되었고, 교화의 모범이 되어야 할 벼슬아치들은 중상모략을 일삼습니다. 전하께서도 그저 이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시고 피차를 융화시켜 인심을 바로잡을 생각은 하지 않으시니, 신은 이대로 가다가는 전하의 조정에 싸움이 그칠 때가 없을까 두렵습니다.’

숙종은 모두 세 차례의 환국(換局)을 단행했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으로 집권당인 남인이 몰락했고 1689년(숙종 15)에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제거되었다. 정시한이 상소를 올린 뒤인 1694년(숙종 20)에는 ‘갑술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숙청되고 서인이 재집권했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일당이 조정을 독점하도록 정국을 운영하는데, 이로 인해 각 당파들도 상대당의 전멸을 시도하게 되고, 보복과 보복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며 극단적인 양상을 보이게 된다.

정시한은 이를 이렇게 꼬집었다.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 어질다고 존경하며 사랑하신 자가 몇 사람이었습니까? 그런데 경신년에 이르자 죽이지 않으면 귀양 보냈고, 귀양 보내지 않으면 내쫓으셨습니다. 이들을 어진 사람이라 해야 합니까 아니면 간사한 사람이라 해야 합니까? 그 후에도 어질고 존경하며 사랑하신 자가 많았는데 기사년에 이르자 또 죽이고, 귀양 보내고, 내쫓으셨습니다. 이들을 어떤 사람이라 해야 합니까? 이를 비추어 보면 기사년 이후 지금 어질다고 존경하며 사랑하고 계신 자들도 훗날 과연 어진 사람으로 남을지 간사한 사람으로 불릴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가 보기에 가장 큰 문제는 원칙 없이 자신의 기분에 따라 조변석개하는 숙종의 태도였던 것이다.

감정과 기분 따라 조직 운영하는 폐단

정시한의 비판은 계속 이어졌다. ‘지금 같이 인재가 매우 부족한 때는 일찍이 없었으니 이것은 나라를 둘로 쪼개었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편벽되이 한쪽 말만 들으면 간악한 일이 생기고, 한쪽에만 맡기면 혼란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는 사람을 좋아하실 때는 무릎 위에 안아줄 것처럼 하시다가 물리칠 때는 깊은 못에 밀어 넣는 것처럼 하여 마음이 일정하지 못하십니다. 주고 빼앗음에 번복이 많습니다. 때문에 신하들이 전하를 섬김에 모두 장구한 계획이 없고, 각자가 제 몸만 위하고 나라의 일은 생각하지 않아서 조정에 기상이 얕고 질서 없이 뒤숭숭한 것입니다.’ 정시한은 현 시국을 진단하고,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로를 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금이 바른 말에는 귀를 닫아버리고 오직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니 이런 폐단이 만연하다는 것이다. 그는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고문을 받고 죽은 박태보와 오두인을 거론하며 ‘전하께서는 앞 시대의 역사를 보시옵소서. 간언을 올리는 자를 때려죽인 임금은 과연 어떠한 임금이었습니까?’라고 숙종에게 직격탄을 날린다. 목숨을 건 강경한 발언을 통해서라도 숙종이 깨닫는 바가 있길 바라서였을 것이다.

이상 정시한이 지적했던 문제들은 비단 숙종의 사례에만 한정되지는 않는다. 리더의 감정과 기분에 따라 인사가 결정되고 조직이 운영되며, 판단이 공정함을 잃고 편향되는 것은 요즘도 자주 만나게 되는 모습이다. 이런 조직은 리더의 눈치만 살피며 편을 갈라 싸우느라 결코 하나로 역량을 결집하지 못한다. 좋은 인재들도 사장되거나 소모품처럼 허비되고 말 것이다. 리더의 공평무사함을 강조하고 그것을 위해 소통의 문을 활짝 열라는 정시한의 메시지를 지금 다시 되돌아보아야 하는 까닭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35호 (201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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