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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15)] 정쟁의 도구로 전락한 조정 인사 정면비판 

이정귀의 이조판서 사직소... 중립 지키려는 노력 의심받아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선비의 최고 명예라는 문형(文衡, 대제학)을 거듭 지냈으며 9차례나 예조판서로 보임돼 대(對) 중국 외교를 총괄한 인물. 훌륭한 학자이자 ‘한문 4대가’로 꼽혔던 그의 문장에 명나라 황제가 감탄했고, 중국 관리들은 그가 써 준 글을 자랑으로 여겼다. 바둑의 고수이자 역관들을 제치고 임금의 전담 통역을 맡을 정도의 능통한 어학 실력. 청렴하고 담백한 성품에 두 아들 모두 명신(名臣)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아들과 손자 3대가 대제학을 지냈을 정도로 자손이 번성한 사람. 바로 월사 이정귀(李廷龜, 1564~1635)의 이야기다.

아들과 손자까지 3대가 대제학 지내

14세의 나이에 승보시(陞補試, 초시)에 장원을 하며 이름을 날린 이정귀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외교 실무를 담당했고 각 조 판서 등 요직을 거쳐 광해군 3년, 이조판서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붕당이 격화되고 갈수록 혼란해져만 가는 정국에 실망한 그는 임금의 만류에도 계속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번에 소개하는 것은 그 두 번째 사직소로, 사직의사 표명과 함께 인사(人事)에 대한 그의 견해가 담겨 있다(이하 내용은 모두 [월사집] 권31, 차중(箚中)에서 인용함).

‘삼가 생각건대, 전관(銓官, 인사담당)의 직임은 예로부터 중요한 자리였거니와 오늘에 와서는 더욱 어렵기가 그지없습니다. 조정의 기강이 문란하여 사사로운 욕심이 성행하니, 가령 낮은 품계의 관직을 제수하는 것이 자잘한 일인 것 같아 보여도 청탁이 구름처럼 많은 탓에 사람의 선악을 구별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계속 머뭇거리고 돌아보며 이 사람을 취해야 할지 아니면 버려야 할지 결정을 못하고 있으니 폐습이 오랜 고질이 되어 더는 손을 쓸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청직(淸職, 학문과 문장이 뛰어난 사람이 맡는 직책)에 어울리는 사람을 선발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는 대부분 낭료(郎僚, 정랑과 좌랑 등 실무 책임자)들이 주관하는데, 지난 수십 년 동안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여 사분오열하고 서로를 시기하니, 당론에 빠져 있는 자는 인물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분간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편을 고르고, 중립을 내세우는 자도 인물의 현명함과 어리석음은 보지 않고 양쪽 인물의 숫자만 맞춰 등용하려 합니다. 이로 인해 등용해야 할 사람과 버려야 할 사람이 거꾸로 뒤집히고 바르고 사악함이 뒤섞여 버렸으니 사론(士論)의 분열은 지금 극도에 이르고 있습니다. 설령 큰 재량과 높은 덕망을 갖춘 이가 있어 위로는 임금의 신임을 받고 아래로는 백성의 우러름을 받더라도 이를 정돈하기 어려울 진데, 신과 같이 부족한 자가 어찌 퇴폐한 기풍을 바로잡고 어진 인재가 진출할 수 있는 길을 넓힐 수 있겠나이까.’

말로는 임무를 맡을 능력이 없어서 사임하겠다는 것이지만 당시 조정 상황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담겨 있다. 동인과 서인이 정쟁을 벌이고,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북인은 다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상대방을 원수처럼 여기고. 공존은커녕 서로를 타도해야 할 ‘적’으로 보는 상황에서 ‘인사’ 또한 공정함을 잃고 정쟁의 도구로 타락해 버렸다. 소속 붕당의 이익에 충실한 사람들은 한 사람이라도 자당의 세력을 늘리기 위해 혈안이 됐고, 중립을 내세우는 사람들조차 괜한 비난을 사지 않기 위해 기계적인 균형에 매달렸다. 뿐만 아니다. 관직에 청탁이 횡횡하고 재물이 오갔다. 현명한 인재를 찾아내 육성하고, 그 직임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사람을 발탁해 임무를 맡겨야 할 ‘인사’는 본연의 임무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을 극복하고자 이정귀는 나름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비난과 의심뿐이었다. ‘인재가 유능한지는 그의 출신 성분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런 한계를 타파하고 모두가 함께 나랏일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신은 오직 이런 생각으로 조정을 진정시키고 화합케 하여 어진 인재를 잃는 일이 없도록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신이 분명한 입장을 보이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요직에 있는 사람들도 신을 불만스러워합니다. 뭇 사람들의 의심이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나고 뭇 사람들의 노여움이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으니, 제 스스로도 보전하지 못할 형편에 어찌 국사를 살필 수 있겠나이까. 그저 입을 다물고서 잠자코 그럭저럭 임기만 보내며 남의 비방만 간신히 피할 따름이니, 이 어찌 성상께서 신에게 기대하신 바이며, 또한 어찌 신이 평소에 품었던 뜻이겠나이까.’

편향된 시각을 가진 사람에게 공정함은 또 다른 편향으로 보인다. 양 극단에 있는 사람에게 ‘객관’이란 이도저도 아닌 회색주의로 여겨질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자신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정귀는 붕당 간의 정쟁에 휩쓸리지 않고 중용을 지키고자 했지만 입장이 분명하지 못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소속 당파에 상관없이 인재라면 누구나 가리지 않고 등용하고자 했지만 모든 당파에게 불만을 샀고, 어느 당파도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진심이 의심받는 상황에서 이조판서의 직을 수행하기란 너무 힘겨웠던 것이다. 이에 이정귀는 간곡한 어조로 임금에게 간언한다. 올바른 인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임금이 관심을 가지고 노력해 달라는 것이다.

‘예로부터 임금이라면 누군들 군자를 등용하고 소인을 내치고 싶어 하지 않았겠습니까마는 이치를 밝게 헤아리지 못하고 사사로운 뜻에 마음이 가려지게 되어 소인을 군자로 여기고 군자를 소인으로 여겨, 마침내 충성스럽고 어진 이를 해치고 간사한 자를 믿어 정사와 나라를 망치면서도 그릇된 줄 모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대저 크게 간사한 자는 충성스러운 듯하고 크게 거짓된 자는 믿음직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아첨하는 말은 임금을 사랑하는 듯하고 곧은 말은 임금을 비방하는 듯하며, 현재의 폐단을 바로잡고자 애쓰는 자는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듯하고, 고식적인 태도로 구차히 세월만 보내는 자는 도리어 시무를 잘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정도를 지켜 흔들리지 않으며 출처를 엄격히 하는 자는 거만한 듯하고 아첨하며 자리만 지키는 자는 근면해 보입니다.

바른 인사 이뤄지도록 임금이 노력해야

명명백백한 자는 오활한 듯 보이고 사특하고 음험한 자는 깊이 있는 것 같으며, 돈독한 행실과 실덕(實德)을 갖춘 자는 질박하고 어눌해 보이고 간교한 말과 얼굴빛을 짓는 자는 재주와 지혜가 있는 듯 생각됩니다. 임금은 이러한 차이점을 분간해야 하니, 부디 성상께서는 학문에 힘써 이치를 궁구하고 사사로운 마음을 끊어내 공정하게 하소서. 마음이 맑아져 평형을 이룬 저울처럼 되면 일의 경중(輕重)과 사람의 미추(美醜)가 자연 명료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무릇 인사 담당자가 따로 있다 하더라도 최종 책임자는 어디까지나 임금이다. 좋은 인재를 구별해 우대하고 올바른 인사행정이 펼쳐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임금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임금이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서 인사담당자들에게만 성과를 내길 바란다면 그것은 사상누각을 짓는 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오늘날 리더들에게 이정귀가 주는 메시지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37호 (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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